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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3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3. 포교계 제출 거부와 교회 폐쇄(1918)
한국의 기독교가 20세기 초 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교세가 급격하게 성장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극도로 경계하며 이들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을 내놓았는데,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 규칙’과 1915년 8월 ‘포교규칙’이 그것이었다. 기독교의 경우,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통해 미션스쿨을, ‘포교규칙’을 통해 교회를 통제하고자 했다. ‘개정사립학교 규칙’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스쿨의 성경 교육을 포함한 기독교 교육을 전면 금지하면서 동시에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식민지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고, ‘포교규칙’은 대부흥 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성장하고 있던 기독교를 억제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포교규칙을 강요받은 것은 대한기독교회(1906~1920,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전신)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교단은 1914년에 발발한 교단 내 지도권 다툼으로 인한 내홍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원산에서 개최된 1914년 제9차 대화회(총회)에서 제1대 감목(총회장)이던 펜윅이 이종덕 목사를 제2대 감목으로 지명함에 따라 교단 내 지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교단 지도자들은 대화회가 있기 전부터 제2대 감목은 신명균 목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펜윅의 전격적인 결정은 교단 내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결국 신명균 목사는 침례교를 이탈해 기호 지역의 교인들을 선동, 규합하여 조합교회를 조직했다.


교단 내 지도권 다툼으로 인한 내분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포교규칙’ 강요는 교단을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일제의 ‘포교규칙’ 강요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교단 임원들이 1916년 1월 20일 원산총부에 모였다. 이들은 열띤 토의 끝에 일제의 규제와 마찰을 피하려는 방편으로 일단 교단 산하에 있는 모든 남녀 학당을 폐쇄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교단에서 운영하던 남녀 학당들은 ‘포교규칙’ 제9조의 강의소에 해당하여 총독에게 설립과 폐지를 신고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므로 학당운영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포교계를 제출해야만 했다. 결국, 이런 일제의 강압적인 규제와 간섭을 피하려면 학당을 폐쇄하는 극단적인 자충수(自充手)를 써야 했는데, 이는 교단 내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신앙의 자유이며, 궁극적으로는 정교분리원칙 구현을 위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남녀 학당 폐쇄는 우려했던 대로 교단 내 많은 신자의 반발을 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포항지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던 허담 교사를 들 수 있다. 당시 그는 경북 포항의 조사리교회 내 원우학교(源于學校)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교단 지도자들의 결의로 인해 학당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강하게 불만을 품고 교단을 떠났다.


1916년 11월 18일 경북 예천구역에 속한 신원교회에서 제11차 대화회가 개최됐는데, 이때 다급하게 다뤄야 할 사안은 바로 ‘포교규칙’ 문제였다. 당시 펜윅은 아내 하인즈(F. B. Hinds)의 지병을 고치기 위해 출국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부재 속에서 포교계 제출 문제는 난항이 겪었다. 이종덕 감목은 일본 정부가 교회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포교계 제출을 단호하게 반대했던 반면, 교단의 중진이었던 손필환 목사와 김규면 목사는 포교계 제출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정부의 단순한 법적 절차요,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교회가 일제의 박해를 자초할 수 있으므로 포교계 제출에 순응할 것을 주장했다.


대한기독교회(1906~1920)의 포교계 제출 거부를 심각한 법 위반으로 규정한 일제는 교단 대표인 이종덕 감목을 체포·투옥했고, 1918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교회 폐쇄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내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가 집회의 자유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는다. 이후 다시 교회 문이 열리기까지 약 2년 동안 침례교회는 집회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채 일제로부터 온갖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이로 인해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으로 인해 교세가 급격하게 악화됐다. 일제에 의해 구금됐다가 1918년에 풀려난 이종덕 감목은 서둘러 원산을 떠나 간도의 종성동으로 이주해 일제의 교단 폐쇄로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규합하고 일제의 박해를 극복하고 신앙을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한편 포교계 제출 문제로 이견을 보였던 손필환 목사는 1916년 12월, 교단을 이탈해 기호와 영남 일대의 교인들과 추종 세력을 규합하여 대동교회(大同敎會)를 조직했고, 김규면 목사도 함경도·간도·시베리아 일대의 교인을 규합해 대한성리회(大韓聖理會)를 설립해 분리해 나갔다. 포교계 제출에 동조하던 이영구 목사도 교회를 떠났고,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던 한태영·이자헌·이자운·장봉희·윤재헌·한대춘은 타락의 길로 빠졌으며, 예산구역과 공주구역에서는 신자들이 구세군과 조합교회와 안식일교회로 넘어가는 사태가 일어났다.


교회 폐쇄령이라는 일제의 박해로부터 침례교가 다시 교회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3.1운동 이후인 1920년이었다. 일제는 이전의 강압적인 ‘포교규칙’을 새로운 포교규칙으로 개정해 1920년 4월 7일(부령 제59호) 발표했다. 이는 전체적으로 조문의 변경, 삭제, 첨가가 수반된 대폭적인 개정으로, 내한선교사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한편 이전의 통제를 완화했다. ‘개정 포교규칙’은 신설된 조항들을 통해 기독교계를 회유하면서 3.1운동과 같은 움직임의 재발을 철저히 막으려는 일제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이 같은 변화에 교단총부는 전국의 교회에 포교계를 제출하도록 종용했는데, 교단 대표로서 이종덕 감목은 ‘달편지’를 통해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한기독교회에 포교계를 제출하라고 광고했다.


그런데 감목(총회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신속하게 포교계를 제출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이를 1912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기독교 포교소 현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일본감리교회, 일본기독교회, 일본조합기독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성공회, 구세군, 노국정교회, 천주공회, 동조선성분도회, 남감리회, 제7안식일예수제림교, 동양선교회 등은 통계에 나오는데 당시의 침례교인 대한기독교회(1906~1920)와 동아기독교회(1921~1932)는 빠져있다. 또한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12~1925)에도 기독교 포교자 현황이 나오는데, 일본감리교회, 일본기독교회, 일본조합기독교회, 동양선교회호리네스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성공회, 구세군, 노국정교회, 천주공회, 동조선성분도회, 남감리교회, 미감리교회, 제7안식일예수재림교, 동양선교회, 조선회중기독교회, 기타 등의 통계는 나오지만 대한기독교회(1906~1920)와 동아기독교회(1921~1932)는 없다.


그러나 이종덕 감목(총회장)의 포교계 제출 광고 이후 20년이 지난 1940년에 이르러 교단(동아기독교회)에 속한 교회들이 점차 포교계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1940년 일제의 포교관리자 설치 요구에 따라 이종근 감목이 1940년 7월 15일 함경남도 원산부 영정을 주소로 포교관리자 설치를 신청해 인가를 받았고, 원산총부교회의 백남조 목사가 1940년 9월 26일에 ‘포교계’를 제출했다. 그런데 일제의 대한기독교회 박해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20년 제15차 대화회에 교단의 명칭문제가 안건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즉, 교단 명칭인 ‘대한기독교회’ 중에 “대한”이란 용어에 대해 일제가 문제로 삼았다. 일제는 이 명칭이 국권의식을 상기시킨다고 생트집을 잡아 교단 명칭을 변경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일제가 대한기독교회를 탄압하는 빌미였다. 교단 이름으로 인해 교역자들이 강제로 연행되어 취조당하거나 구금당하기 일쑤였는데, 대표적으로 칠산교회의 장기영 감로는 수년 전부터 이 문제로 인해 시달림을 당했고, 김희서 교사(전도사)는 강제로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외 김현호·김형태·김재덕·유종두·윤종우 등의 신자들이 마구잡이로 구타를 당하거나 구금되는 등 일제로부터 온갖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대화회(총회)에서 이 안건이 건의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다. 더불어 1918년 이후 만주의 길림성에서 중국인 신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중국인 교회도 개척되면서 “대한”이란 명칭이 너무나 민족적이고 편협하다는 여론도 교단 명칭변경의 또 다른 명분이 됐다. 


그런데 교단 명칭을 만든 펜윅은 1917년 5월 아내의 지병 치료를 위해 출국하고 없었으므로, 교단 명칭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난항을 지속했다. 이듬해인 1921년 제16차 대화회(총회)에서 이 문제는 다시금 제일 시급하게 처리돼야 할 안건으로 올라왔다. 결국, 난상 토론 끝에 15년 동안 사용하던 ‘대한기독교회’ 대신에 ‘동아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East Asia)로 변경했다. 이것은 교단의 선교지역이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까지 이르고 있었으므로 교단 명칭도 그것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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