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사복음서에서 제시된 부활현현의 체험과 부활신앙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다. 지난 호에는 마태가 전하는 부활현현 사건의 마지막 국면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누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부활현현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는 누가의 부활신학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누가는 공관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부활현현의 중요성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저자이다. 누가만이 엠마오 사건을 통해 사도들의 체험 외에 다른 두 제자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전달한다(눅 24:13-35).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 지 두 세대가 지난 그의 세대의 신자들을 향해 어떻게 그들이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가에 관한 교훈을 길게 전달한다. 누가 역시 부활현현 사건들에 앞서 먼저 빈무덤 사건을 전달한다. 그는 마가와 마태와는 또 다른 국면에서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누가복음에서 모든 부활현현 사건들은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의 사건들은 부활절 당일에 일어난 것으로 제시되는데,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명령으로 끝난다(눅 24:49).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다른 부활현현 사건들을 인정하면서도(행 1:3), 부활의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주는 마지막 명령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이다(행 1:4).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릴에서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될 것을 예고하고 실제로 갈릴리에서 부활현현을 경험한 사건들(막 16:7; 마 28:16-20; 요 21:1-23)과는 사뭇 다른 국면을 담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예수를 거부하고 반대하며 배척한 사람들의 중심지였는데, 초대교회 복음전파 사역의 초기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그들의 동행자들로 하여금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에 예루살렘 밖으로 여행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의 공생애의 연장선에서 이해되는 것이 필요하다. 누가도 역시 예수의 공생애와 그것의 결말인 그의 십자가 죽음의 연장선에서 부활현현 사건들을 제시한다. 그래서 누가는 이 부활현현 사건들을 통해 어떻게 제자들이 전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예고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눅 9:44-45; 18:31-34),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역설적인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 것을 깨닫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이것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이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들은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예수의 제자들에게 계시해 주고 그들의 사명을 위해 준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가는 빈무덤 사건을 전달함에 있어서 마태와는 다르게 비교적 마가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일부분 변경된 내용으로 제시한다. 누가는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이름을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전달한다(24:10; cf. 막 16:1). 누가는 또 그 여인들이 그 무덤을 막고 있던 심히 큰 돌을 옮기는 것에 관해 말한 것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녀들이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만 말한다(24:2). 누가는 그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에 있어야 할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묘사한다. 그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전달함에 있어서 일부 사본들은 단순하게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전달하는 반면(대표적으로 NRSV), 또 다른 사본들은 “주 예수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전달한다(한글 개역과 개정개역). “주 예수”라는 칭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셨으며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를 말하기 위해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행 1:21; 4:33; 8:16 등). 부활신앙의 빛에서 이 사건을 제시하는 누가의 입장에서 보면 “주 예수의 시신”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누가는 무덤 속에서 청년의 등장에 관해서도 마가의 이야기를 변경한다. 마가가 흰 옷을 입은 청년의 등장을 먼저 제시하고 그녀들이 크게 당황하고 놀라는 반응을 묘사한 반면(막 16:5), 누가는 그 여인들이 주 예수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하여 근심하는 중에 갑자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섰다”고 묘사하며 그 두 사람의 갑작스런 나타남으로 인하여 그 여인들이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댔다”라고 상세하게 묘사한다(24:4).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등장은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에 관한 묘사와 동일하며(눅 9:30) 또한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 직후에 등장하는 “흰 옷 입은 두 사람”과 연결된다(행 1:10). 두 증인들의 갑 작스런 등장은 예수 이야기의 핵심적인 국면들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해설하기 위한 누가의 신학적 경향성을 보여준다. 두 증인의 등장은 두 증인의 증언을 강조하는 신명기의 말씀을 따라(신 19:15) 한 사람의 증언보다 더 확실하며 신뢰할만한 복음의 의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갑자기 등장한 두 사람의 증언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라는 부활의 선언을 중심으로 앞에서는 질문과 뒤에서는 해설로 진행된다. ‘살아나셨다’라는 동사는 신학적 수동태로 표현되었는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구원행동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선언에 사용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복음선포(케리그마)에 집중적으로 나온다(행 3:15; 4:10; 5:30; 10:40; 13:30, 37). 이러한 부활선언에 앞서 두 사람은 그 여인들의 알지못함을 책망하는 것으로 말을 시작한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25:5). 그 여인들은 예수께서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두 사람은 부활선언과 함께 그 부활에 관하여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이미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24:6~7).
여기서 누가의 이야기는 마가와 마태에 나오는 빈무덤 이야기와 상당히 달라진다. 마가와 마태에서는 그 여인들이 장차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만날 것에 관하여 들은 것으로 제시된다(막 16:7; 마 28:7). 그런데 누가는 두 사람이 그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이미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 변화는 누가가 전달하는 부활 이야기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도 상응하며 또한 누가는 여기서 마가와 마태와는 다른 국면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과도 관련된다. 두 사람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그 여인들에게 상기시킨 것은 앞으로 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들에게 중심적인 국면을 제공한다(24:19~27; 44:49).
복음으로서의 예수 사건에서 핵심적인 국면은 예수께서 가신 숙명의 길이 고난을 통과해서 영광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메시아(구원자)의 길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반드시 가야하는 이와 같은 숙명의 길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숙명성 혹은 필연성”을 나타내는 헬라어 조동사(dei/)의 사용에서도 표현되었다. 인자는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 후에는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숙명의 길이었다(눅 9:20). 이 조동사는 누가가 전달하는 부활 이야기들에서 하나님의 메시아가 가야했던 숙명의 길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의 성취와 함께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눅 24:26~27, 44).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