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에 담긴 부활의 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요소인 부활의 예수를 믿는 신앙이 부활현현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강조하면서 제자들이 받은 부활현현의 체험을 세 번 전달한다. 이것은 한 사건을 세 번씩이나 말함으로써 그 사건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유대교의 표현법에 따른 것이다.
요한에 따르면, 제자들은 세 번에 걸친 부활현현의 체험을 통해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누가 역시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건을 세 번씩이나 전달함을 통해(행 9, 22, 26장) 사울의 체험이 그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기독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제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두 번째 현현에 관한 이야기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와 관련하여 제시한다.
사복음서에서 도마와 관련된 사건은 요한복음서에만 나온다(11:16; 14:5; 21:26). 도마는 매사를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둔감하며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비록 그는 깨닫는 것이 느리지만, 그러나 예수에게 헌신한 사람으로 제시된다(11:16). 도마는 예수 자신에 의해서만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의 유형으로 등장한다.
도마가 등장하는 부활현현 사건은 기독교의 부활신앙과 관련하여 공생애 예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못에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지 못한 후대의 신자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부활현현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후대의 신자들은 어떻게 부활의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이 성령의 선물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부활현현에 관한 이 시작의 체험 이후 두 세대가 지난 후에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살고 있는 요한공동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먼저 예수의 첫 번째 현현의 경험에서 빠졌던 도마의 상황을 설명한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0:24). 도마는 “열둘 중 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요한복음서에서 “열둘”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열둘은 한편으로 예수와 가장 가까운 내부 집단을 가리키면서도(6:67~71),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배반자가 그들 중에 포함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6:71; 12:4; 13:21).
반면에 안드레(6:8)와 예수의 곁에 앉아 있던 제자(13:21)는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예수에게 가장 가까웠던 내부 집단의 열두 제자들조차 부활의 주님에 대한 의심과 주저함이 있었다는 것이 공관복음서 전승들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된다(막 16:11~14; 마 28:17; 눅 24:38ff.). 예수의 첫 번째 현현 때에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제자들의 결정적인 체험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디두모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는 ‘이중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도마는 예수를 따르면서도 항상 이중적 자세를 가졌다. 그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하는 유형의 제자였다. 저자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도마의 반응을 묘사한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0:25).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는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의 첫 번째 현현의 경험에 관한 요약적 진술이며 그 고백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다 포함된다.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개인적 고백의 형태로 선언한 반면(20:18), 제자들은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는 공동체적 고백의 형태로 선언한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다’는 동사가 미완료 시제로 된 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도마에게 말하며 설득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도마의 요구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의 모습에 집중한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실체를 보고 만질 수 있는 개인적 증거를 갖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도마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의 부활관에 기초한다. 그는 유대교적 부활관에 기초하여 특정 방식으로 죽었던 몸의 분명하고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증거를 요구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몸이 아닌 변형된 몸이라든지 혹은 영적인 몸에도 만족하지 않으려 했다. 부활의 주님은 반드시 가시적이며 또 신체적으로 만질 수 있는 점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도마의 그런 주장은 요한공동체의 상황에서 가현설의 견해와 싸우려는 목적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도마의 주저함은 예수의 존재 전체(영과 육신을 포함)의 부활에 대한 변증적 가치를 갖는다. 누가도 부활하신 예수는 그의 현현을 영적인 존재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구은 생선을 잡수심을 통하여 예수의 신체를 포함하여 그의 존재 전체가 부활한 것을 증명하는데 역점을 둔다(눅 24:39~43).
예수의 두 번째 현현은 팔 일이 지난 후에 있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0:26). 팔 일의 경과는 예수의 두 번째 현현도 안식 후 첫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제시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한의 시대에 안식 후 첫 날은 이미 주의 날로 확립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 의식이 그 날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cf. 행 20:7; 계 1:10).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라는 말이 그런 예배를 위한 모임의 때를 가리킨다. 제자들의 상황과 관련하여 두 번째 현현 때의 묘사는 첫 번째 현현 때의 묘사와 매우 다르다. 첫 번째 현현 때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이 닫혀 있었다고 묘사되었으며 그래서 예수는 닫힌 문들과 제자들의 두려움을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신 것이 된다.
그러나 두 번째 묘사에서는 제자들의 상황과 예수의 오심에 관한 순서가 바뀌었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오고 계신다, 문들이 닫힌 가운데. 그리고 그는 그들 가운데 서셨다.” 예수의 오심을 가리키는 동사가 20:19의 부정과거에서 현재 시제로 바뀌어 문장의 맨 앞에 위치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하나의 전체적인 완결된 사건으로부터 그 후에 계속하여 제자들에게 오시는 상황의 변화를 나타낸다.
또 예수의 오심이 먼저 언급되고 다음에 문들이 닫혀 있었다고 묘사된다. 여기서는 문들이 닫힌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제자들의 두려움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한 두려움보다는 예수의 현현을 이미 경험했고 그의 현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믿음이 연약한 상태 곧 예수의 복음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거부하는 세상을 직면해야 하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보다 더 일반화된 막연한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이번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평강을 주신다. 이 평강의 중요성은 첫 번째 현현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을 세 번 언급했다(20:19, 21, 26). 요한은 평강을 부활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생명으로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평강을 주시겠다는 예수의 교훈은 고별강화에서 부각되었다(14:27).
평안은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종말론적 구원을 묘사하기 위한 핵심 단어로 사용되었다(눅 2:14; 19:38, 42; 롬 1:7; 5:1; 14:17 등). 평안은 개인적으로는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평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평안은 예수 자신이 그의 공생애 사역동안에 누렸던 마음의 상태였다. 그래서 예수는 평안을 제자들에게 ‘끼친다’(남겨둔다)라고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이 평안은 “나(예수)의 평안”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의’라는 강조형 소유형용사가 사용된 것은 예수의 공생애에서 그의 모든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그의 사명을 완수하게 만들었던 그의 내적 생명력을 나타낸다. 세상에 남은 제자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가 누렸던 평안의 생명력이 필요했다.
평안은 어떤 고난과 위협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으며 담대하게 또 당당하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만드는 능력을 제공한다. 부활의 예수께서 주시는 이 평안은 예수의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며 박해하는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으며 담대하게 당당하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며 주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게 만드는 생명력이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