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후배 제자 동역자는 꾸준히 목회만 했으면 좋을 번 한 되 굳이 경쟁하여 총회장이 되었고 마침내 취임감사예배를 자기 교회에서 드렸다.
나는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목회지 지방에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하게 걸려 취임감사예배에 참여했었다. 꼭 그 자리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 있는 목회현장인가를 보고 싶었고, 다음엔 이 감사예배에는 어떤 인사들이 참여하는 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수직을 떠나 목회를 했고 지금도 프리랜스로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고 왠만한 모임에는 참석 못하지만 이번엔 꼭 가보고 싶었다. 몰론 정식초청을 받은 것은 아니다. 행사에 무슨 순서를 맡은 것도 아니다.
도착해서 순서지를 받아보니 소위 본 교단 증경총회장이 무려 10여 분이 사회하고 설교하고 축사하고 격려사하고 축도하고 식기도 하는 등 그들 색깔로 순서지가 꽉 차이었다.
눈을 닦아보니 다행스럽게도 당선 총회장의 입학동기 회장이란 목사가 어떤 순서를 맡은 것이 보여서 속으로 마음이 좀 편하긴 했다.
총회당선자 목사는 무엇 때문에 왜 총회장이란 정치세계에 들어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실하고 고마운 단순 목회자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사. 이거 어짼담. 그는 정치계(?)에 들어서고 말았다. 우선 감사예배 순서지에 무슨 증경총회장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있는가 말이다. 그 증경총회장들이 그로 하여금 총회장 당선되는 데에는 일조(一助) 했을런지는 몰라도, 그가 목회자로서 성장하는 데에는 과연 도움을 주었을지 의문스럽다.
내가 바라는 총회장취임감사예배에는 일단 그를 가르치고 키워준 신학교 교수님 한분 정도는 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은퇴한 동료 교수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많은 제자들을 키웠고 그들이 성공해서(?) 총회장 및 기타 장(長) 자리를 찾는 감사예배에 초청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누가 초청받느냐. 죽으나 사나 증경총회장님들이라구.
그것은 이미 목회가 정치의 옷자락에 쌓였다는 말이고, 목회자 인격자가 정치인의 울타리 속에 들어갔다는 말이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진정한 목회가 사라지고 진정한 인간 목회자가 변해지는 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정말 참신한 총회장의 취임감사예배의 순서에 들어갈 자가 있으면, 증경총회장 중에는 대표격으로 한 두 사람 끼이고, 그 다음엔 자기 친족 중 한 사람이 끼이고, 자기 동기 중 한 사람이 끼이고, 교회가 있는 지역의 타교단 어른이 끼이고, 그리고 반드시 자기를 가르쳐 주셨던 은퇴교수 한 사람 정도는 끼어 주었더라면 멋진 구색을 갖춘 예배가 되지 않겠나 싶었다. 물론 그날 그 자리에 내가 참여했기에 무슨 섭섭함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사에는 언제나 증경 총회장과 교수는 엄청난 구별을 당연시 하고 있으니까.
예식을 마치고 식사를 끝내고 버스터미널로 향하려고 TAXI를 타려하는데 어디선가 어느 제자가 쏜살같이 와서 자기 차에 타러하기에 탔고, 그 옆에 동승한 다른 제자목사가 봉투를 건네주면서 曰 “교수님, 사모님과 가을 단풍을 즐기세요.” 하기에, 내가 그들을 보고 曰 “그대들이 차기 총회장감이다” 하니 모두 대답 曰 “우린 그런 거 안 합니다.”
정치는 무릇 필요악이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간 정치하는 사람이 있어서 단체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니 희생되는 그의 삶과 인격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임무 아닐까. 꼭 기도해야 한다. 나 대신 희생해주는 그들이 고맙지 뭐야. 아무리 국회가 도적놈들의 모임이라고 혹평해도 국회는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저 순진한 목사를 총회장으로 만든 자는 교단정치인 곧 증경총회장들의 후광 탓이지 교수의 가르침 때문은 아닐 것이다. 번성하는 교단정치 속에 퇴화하는 목회 현장이 서글퍼 보인다. 교회가 長 자리를 좋아하면 진리는 뒤로 빠진다.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