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소련의 크리스천 대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성도가 있었다.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일 내가 그대의 집을 방문할 것이다”는 말씀을 듣고 깨어나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아침 일찍부터 집 청소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예복을 갖춰놓고 예수님 영접할 준비를 마치고 종일 기다렸습니다. 해가 서산에 지는 황혼까지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짜증스런 마음과 실망으로 앉아있는데 사립문을 열고 웬 거지 하나가 나타났다. 구걸하면서 무엇이든 먹을 것이 있으면 달라는 것이다. 기다리는 예수님은 안오시고 왠 거지만 들어오는가 하고 화가 났다. 화난 김에 아무것도 안주고 호되게 쫓아 버렸다. 그날 밤 꿈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주님, 하루 종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아십니까?”하고 그 성도는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네 집에 갔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언제 오셨습니까?” “해질녁에 내가 네 집을 찾아 갔었느니라”
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생각과 변화를 주었다. 꿈속의 예수를 실상으로 보고 현실의 거지를 허상으로 보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읽는 성경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는 그림이다. 우리가 알고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움직이는 설교이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때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예수를 보고 알고 믿는다.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마5:16)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어제는 이사회가 일찍 열려 천안행 전철에 올랐다. 전철에 들어오는 분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앉게 했다.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복음을 전하니 그의 안색이 바뀌었다. 많은 대화중에 알게 된 것은 한때 교회당 헌금을 많이 한 교회의 중진이었는데 목사가 교인들과 작당하여 교인들을 흩어버리고 교회당을 팔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실망하여 이렇게 되었고 엊저녁에 자기보다 세 살 많은 미용사와 밤샘 술을 마시며 외도를 하고 아내 모르게 일하러 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생존의 선물로 거저 주었지만 주신 것 중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다. 예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아래와 같이 증거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자신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십자가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오셨다. 이는 하나님께 드림이요, 우리에게 자기 몸과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예수의 일생은 희생과 드림과 베푼 삶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친구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자기 자신까지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 대신 희생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전적으로 주시는 삶을 사셨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고, 귀신들린 자를 축사하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과 소외되고 무시된 사람들과 사귀며 영접해 주셨다. 갈릴리 가나 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주셨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또 4,000명을 먹여주셨고 자신의 몸과 피를 성만찬으로 주셨다. 예수님은 그의 속성대로 사랑의 동기에서 주는 삶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은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으며, 주님의 삶은 전적으로 주는 삶, 하나님께 드리는 삼이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까지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옷 한 벌마저 로마병정에 의해 벗겨졌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모습과 똑같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온전히 주셨다. 예수님께선 한 번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셨고 전적으로 필요한 이웃 사람을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주려고만 오셨고, 주시며 사셨으며 마지막까지 주는 삶을 사셨다. 전적 희생과 드림의 삶이셨다.
예수님은 드림에 대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드림의 중요성과 드리는 일의 위대성을 호평하셨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을 드림으로 표현해 주셨다. 바울 사도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놓고 송별의 말씀을 마친 다음 결론으로 하신 말씀으로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28)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 자연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속의 은총을 그냥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율법적인 뜻으로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드린다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우리는 은혜 안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자연을 주심에 대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게 주신 구속의 은총에 대해서 감사하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없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인류 최대의 선물로 받았으니, 우리도 감사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신과 시간, 재능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 렙돈을 성전 연보궤에 넣는 것을 보시고는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44)고 극구 칭찬하셨다. 이 칭찬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드림의 칭찬 중 최고의 극찬이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했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 예수님은 극찬하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로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