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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의 덫-나, 그리고 분노

가정회복-1

최근 딸을 때려서 숨지게 하고 여러 달 동안 집에 미라 상태로 방치했던 한 가정의 뉴스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큰 이슈에 목마른 언론에서는 이 가정의 가장이 목사였다는 사실을 부각시켰고, 이 가정이 저지른 극악한 범죄와 맞물려 세상의 증오심과 뭇매가 이들을 향하고 있다. 이 일은 아버지가 목사이었든 한 회사의 샐러리맨이었든 가볍게 다루어져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과연 무엇이 이 한 사람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갔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또 어디에서 무서운 아동학대가 자행되고 있는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또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자신을 상처 입히고 주위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본 한 인터뷰에서 한 남자는 고백한다. “저는 상대를 때려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사랑과 극심한 매는 하나의 세트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심하고 때리고 온갖 욕을 쏟아내며 말하곤 했습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제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제가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랑의 표현은 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처럼 말했습니다.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미국에서는 아동학대(Child Abuse)를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크게 정신적 혹은 언어폭력(Emotional abuse or Verbal abuse), 육체적 학대(Physical Abuse), 성적학대(Sexual Abuse), 그리고 방치(Neglect) 등으로 나누어진다. 아이를 채벌하며 강하고 반듯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문화적, 경험적 분위기가 일상화되어 있는 한인가정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이 아동학 대의 범주를 넘나들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무심코 한 한두 마디 때문에 어느새 문 앞에 나타난 CPS(Child Protective Service)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속수무책이다. 아이들을 속절없이 빼앗기기도 하고 순식간에 감옥에 가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사례들이 종종 등장하는 한인교회에서 는 쉬쉬하고 침묵할 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상담을 금기시하는 한인사회에서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찾아오는 한인 내담자들은 바로 때 아닌 법정의 명령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상담소 문을 넘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을 도와야 할까? 어떻게 해야 우리의 가정들이 자식과 부모를 서로 죽이는 이 참담한 현실로 치닫지 않도록, 이웃으로서 교회공동체로서 그 깨어진 부분 을 막아설 수 있을까? 사실 자녀를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화가 절제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들은 누구나 육체적 피로감에 시달린다.


밤에 수시로 깨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마치 감옥에서 잠을 못자는 고문을 당한 사람들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수유가 끝나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먹는 것, 씻는 것, 입는 것, 어느 것 하나 부모의 손길이 필요 하지 않는 게 없다. 걷기 시작하면 잡아줘야 하고, 아이들이 앞뒤 없이 뛰면 그 뒤를 내처 달려 붙들어야 한다. 몸은 늘 피곤하다. 이러다 자녀양육이 조금 쉬워지는듯하면 어느새 아이들은 십대를 향해 치달아간다. 이때 부모들은 정신적인 피로감에 시달린다.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도전한다.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쳐놓은 안전한 울타리를 자꾸만 뛰어 넘어 새로운 세상, 위험한 세상을 갈망한다.


영어도 잘 못하고 미국 교육에 무지한 부모를 무시하고,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오죽하면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는 새끼를 죽이는 짐승을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 모든 부모는 아동학대의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 중 아무도 아이에게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처를 남길까 두려워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런 경우는 방치(neglect)라는 이름의 또 다른 학대가 되기도 한다.


자녀에게 화가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자녀로 인해 상처가 되는 것도 흔하디흔한 일이다. 자녀에게 한 번도 화 난 적이 없고 목소리가 높여진 적이 없다고 한다면, 필자는 그 가정을 상담해보고 싶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도 우리의 실수를 간과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죄를 차마 보실 수도 없으셨다. 우리의 수도 없는 잘못들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값을 치루지 않으셨다면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불가능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분노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연스러운 감정의 하나이다. 자녀의 잘못에 대한 분노와 이에 따른 적절한 처벌은 자녀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러나 부모로서 화를 표현하는 방법과 행동은 또 다른 이슈가 된다.


우리가 열광하는 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화가 나면 보이는 흔한 행동이 있다. 줄담배나 술로 풀던지, 탁자위에 있는 물건들은 확 쓸어 부순다.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든지, 상대방을 성이 풀릴 때까지 흠씬 두드려 패기도 한다. 종로에서 뺨 맞으면 한강 가서 화풀이하기도 일쑤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뺨맞아 화날 때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한강이 되기도 한다. 종로에서 교인한테 당하고 한강에 서있는 우리 가정이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무차별하게 쏟아내는 분노의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가장 가깝고도 가장 여린 존재가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잘 표현되면 약이 되지만, 절제가 되지 않으면 씻어낼 수 없는 독이 된다. 정서적으로든 육신적으로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살인 무기가 된다. 부모의 분노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지만, 미성숙한 분노의 행동은 아이들의 마음을 부러뜨리고 비뚤어지게 하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에 내보내졌을 때, 우리 부모들이 보여준 분노의 행위들을 반복하며 산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닮은 자녀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도 없다. 어떻게 하면 분노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것 한 가지는 요즘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분노 조절, 대화법, 상담기법, 자녀 양육법 등에서 강조하는 I-message이다. 너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체로 해서 대화하는 것이다. 나의 감정에 대해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너는 뭐가 되려고 이렇게 말을 안 듣냐?”가 아니라 “네가 엄마 말에 귀를 안귀울이는 것 같아 엄마가 속상하다.”이다. “네 방은 어떻게 맨날 돼지우리 같냐!”가 아니라 “네 방에 들어오면 아빠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짜증난다.”이다. “너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냐!”가 아니라 “성적이 좀 떨어져서 아빠가 걱정된다. 좋지 않은데 마음이 빼앗기는 것 같아 불안하다.”이다. “누구한테 배워 운전을 그 따위로 하냐!”가 아니라 “ 엄마가 네 차타니 무섭다. 너 다칠 까봐 잠도 못자겠다.”이다.


같은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전자는 전쟁을 불러오지만 후자는 공격받는 느낌 자체가 없다. 그냥 미안해진다. 공격받을 때는 변명해야 한다. 그런데 솔직한 상대의 감정을 들으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공격은 상대를 부러뜨리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I-message를 통한 나의 감정에 대한 진솔한 표현은 상대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또 다른 대화의 고리를 찾는 데에 목적이 있다. 우리는 화내면서 자녀의 고집을 꺾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고 싶어한다. 바꾸고 싶어 한다.


우리의 인생 경험상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녀를 올바르게 세워가고 성숙한 한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우리 분노의 목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자녀와의 전쟁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자녀가 결국에 잘 이길 수 있게, 멋지게 이길 수 있게, 져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화내는 방법부터 성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바뀌면 그 다음에 자녀가 변한다.


/심연희 사모 RTP지구촌교회(미주) Life Plus Family Center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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