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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외과적 수술 환자들은 수술 후 회복실이란 곳으로 옮겨진다. 회복실은 위급한 일이 발생 했을 때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회복실에서는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통증이다. 통증이 두려워 마취를 깊게 한다거나 자주 마취를 해 통증을 피하려 한다면 회복하는데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회복단계에서는 환자가 통증을 직면해 이기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통증의 고통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또 수술을 선택했기에 꼭 만나야만 하는 회복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통증은 내 스스로 선택하여 감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암의 특징은 자각증상이 없는 것처럼 부정적 수치심의 특징도 자신과 타인에게 멋지고 건강하게 보이는 행동으로 위장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찾아내고 내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프고 힘들다. 나는 이것을 직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어느 정도 치유하는 데에도 이르렀으나 완벽하다거나 완전한 치유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완벽하거나 완전한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한, 또 내가 나 스스로 그렇게 여겨져서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완전히 통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독이기 때문이다. 중독의 종류에는 일, 음식, 약물, 알코올, 도박, 종교, 성 중독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중에서 종교중독은 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중독 형태로 자신을 신앙적인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주로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오염시켜 내면에 새기는 부정적 수치심의 원인이 된다. 수치심을 교류분석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어버이 자아 형태로 자리 잡아 자녀의 어린이자아에게 비판하고 나무라거나 지시하는 부정적인 교류를 하게 한다.

 

자녀는 다시 상처를 입고 그 역시도 적응적인 아이자아 형태를 띤 비판적인 어버이 자아 형태를 갖게 된다. 적응적인 아이 자아에는 순응적으로 적응한 모범생이 있을 수 있고 반항적으로 적응한 반항아가 있을 수 있다. 그것처럼 폭군인 아빠와 성직자인 아들이 될 수 있는데 성직자가 되었다고 아들이 심리적이고 영적인 상처가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 아빠는 폭군이란 가면, 아들은 성직자라는 가면을 통해 가려진 수치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직자가 수치심을 직면한다는 것은 엄청난 아픔과 통증이 수반되는 것이다.

 

설교와 예배, 그리고 기도 등 순기능적으로 행해야 할 일들이 오히려 종교에의 강박에 대한 행위로 표현됐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또 그것을 받아들여도 그 행위는 하루라도 멈추기 어려운 일 아닌가? 그 일을 하면서 내재된 수치심을 치유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인격적인 자아경계선이 무너진 가운데 자신의 자녀나 성도의 자아경계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게 됐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느끼거나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역기능적 강박이 증폭되면 드디어 자신을 신격화하도록 이르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타인 또한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상호의존중독이다.

 

나는 이런 강박이 하루아침에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럴 수도 없다. 나에게 자리 잡은 수치심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유에도 긴 과정이 필요하다. 누구나 수치심을 자각하면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을 두려워 말자. 암 덩어리도 자각증상이 없지만 조기 진단과 치료로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것처럼 수치심의 자각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

 

수치심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은 내가 나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심리적, 영적 통증은 회복의 첫 단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나의 수치심을 인정하는 일이요, 강박의 속도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일이다. 이제 하루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싸움은 긍정적으로 보이는 부정적인 나의 행동이나 강박적인 심리상태, 그리고 나와 남을 종교의 힘으로 통제하려던 것을 멈추게 하는 영적인 모든 싸움이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싸움은 매일 시작되고 매일 끝난다. 어느 날은 실패 할 수도 있다. 그날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맞으면 어제는 잊고 오늘을 이겨야만 한다. 이 과정을 먼저 거쳐 가고 있는 자를 후원자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혼자 이기려 들지 말고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상담자를 찾기 바란다. 그분이 먼저 완전히 거친 예수님이고 또 나보다 먼저 거쳐 가고 있는 후원자가 되는 누군가이다. 사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직면이요, 그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거울이 없다면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 혼자 수치심을 해결하려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부끄러운 통증을 두려워 말고 그 거울을 들여다보자. 눈이 많은 올 해 강추위를 녹여 주는 따뜻한 친구를 그 거울이라 부르고 싶다. ‘친구야 노올자’. 어느새 친구의 눈동자에 비추인 내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박종화 목사 / 빛과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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