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연속 이기고 언약궤까지 빼앗은 기쁨은 잠깐, 블레셋은 언약궤를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뻘짓 때문에 다곤 신은 박살나고, 언약궤를 갖다 놓은 지역마다 독종 재앙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난을 면해보려고 이리저리 언약궤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지역마다 쑥대밭이 됐다. 옮길수록 환난은 더 커지고, 사망 자가 속출하기까지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것 같다. 그야말로 언약궤를 빼앗아 온이후 일곱 달은 공포의 7개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급기야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를 반환하는 블레셋 언약궤 반환을 결의한 블레셋 지도자 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6:2).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것을 제안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신을 달래려 한다. 유사한 것을 바침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주술적 행위인 동종요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금 쥐는 독종이 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 생
노인의 되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행위다. 나도 여러 번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내가 이제는 값싼 안경을 맞춰주는데 이유는 또 잃을 것이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 다. 안경을 잃고 귀가하는 날, 안경 없는 맨 얼굴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또 그 안경을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소?” 정말 코믹한 아내의 질문이다. 세상에 자기 물건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짐짓 일부로 잃어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그 물건과 함께 시간과 장소도 잃게 마련이다. 이것을 잃음의 삼중주(三重奏)라 할까. 더 나아가서 잃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물건을 잃을 땐 자기도 깜빡하는 순간의 자기상실이 따른다. 이때는 잃음의 4중주(四重奏)라할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내가 머문 곳을 다시 가보아도 역시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는 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알 턱도 없지만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그곳을 찾지만 역시나 역시이다. 물건상실보다 더 괴롭고 비참한 것은 자아상실(自我喪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를 잃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잃어버린 자아(lost ego)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원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주어왔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 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 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주었다고 꼭 팁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 보상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고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다. 성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고 (3:20), 본문 1절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 도시이다. 마치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은 표현인데 지금 같은 미디어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알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 아닐까?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선지자가 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은 갑자기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로 바뀐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진다. 너무 명암(明暗) 대비가 뚜렷한 전개라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만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바뀌는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엘리 시대의 결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엘리 가문의 영적 타락,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다. 은혜 상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국교회가 심하게 침체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그 침체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의 침체는 전혀 코로나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가속화됐을 뿐이다. 2020년 연말 미국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가 세계 선진국 중심 14개국을 대상으로 1만4000명을 설문 조사했다. 코로나19가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미국 같은 경우는 코로나19로 신앙생활이 오히려 크게 더욱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나머지 조사국들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약간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반면 조사국 중 유일하게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이, 그것도 심각하게 침체되었다고 답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50% 이상이 교회 안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청년부가 따로 없는 교회는 더욱 많다. 믿을만한 통계들에 의하면 현재 대학 생들의 경우에는 3% 남짓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 대
인정(人情)은 사람이 지닌 정이다. 그것은 사람만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이다. 인정의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에 견정(犬情)이란 말은 없다. 돈정(豚情)이란 말도 물론 없다. 사람만이 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만이 인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주고받을 정(情)을 소유한 피조물은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은 없다. 문제는 사람만이 갖도록 부여된 이 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걱정이다. 지금 인정의 향방이 문제다. 우선 향방 자체가 없는 인정도 있다. 자기만이 소유하고 끝나버리는 메마른 인정이다. 이래서 정을 줄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모양도 여간 딱하다. 어떤 인정은 주기는 주되 그러니까 향방은 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 인정은 흐르긴 하지만 흐름의 대상은 물(物)이다. 돈에게 인정을 붓고 탐욕물에 인정을 쏟고 하는 등이다. 요사이 가장 쉬운 예는 반려견을 인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그 대상이 사람(人)이어야 하겠건만 동물(動物)이랴. 그 이유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정을 줘도 받지를 않는다? 정 받을 사람이 너무 없다. 예수 하늘에서 인정을 주려 왔건만 사람들은 마다하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축복의 통로였다. 은혜로 평화의 사도인 이삭(Isaac)을 얻었다. 이삭도 축복의 통로였다. 그 역시 은혜로 축복의 조상 야곱(Jacob)을 얻었다. 야곱도 대를 이은 축복의 통로였다. 그 또한 은혜로 예수의 형상인 요셉 (Joseph)을 얻었다. 축복의 물줄기가 대를 이어 흐르는 은혜로 인해 그 가문이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어느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막스 죽스(Max Jukes)라는 18세기의 두 가문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막스 죽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불신자였고 부도덕한 사람, 비슷한 처지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집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이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수 잘 믿는 은혜의 사람, 미국 초창기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 자였으며, 그 부인 역시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그 두 가정에서 나온 후손들을 보면 너무 달랐다. 막스 죽스의 506명 자손 중 310명이 거지였고, 150명은 범죄자, 그중 70명은 살인자였다. 사형당한 사
그 할아버지는 여러 명의 손자들을 두고 있었 다. 옛날 한 마을에 옹기종기 살 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사는 고로 자연히 그 할아버지 밑에 손에 닿는 손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손자들 중에 유난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손자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할아버지와 씨름을 하자고 조르는 여섯 살 박이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였다. 마루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놈은 한판 씨름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이길 경우, 손자 놈은 아주 절망적인 기분으로 되돌아갔다가 내일을 기약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이 조손(祖孫) 사이의 씨름의 승자는 거의 손자였다. 10번 씨름하면 한 두 번은 할아버지가 승자이고 나머지는 손자가 승자이다. 승리한 손자는 기고만장하다 힘센 할아버지로부터 자기의 씨름 솜씨를 인증받기 때문에 여러 손자 놈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기가 살아있다. “내가 할아버지를 이겼다” 그러나 사실은 할아버지가 져 준 것이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턱이 없다. 그것을 알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나는 이런 광경을 보노라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장면이 생각난다(창 32:13~32). 에서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가서 두 아내를 취해 자수성가한 동생 야곱이 금의환향
‘단장의 아픔’이란 말이 있다. 중국 진나라 때 ‘화온’이란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로 가던 중 장강 삼협을 지날 때 시종한 사람이 숲에 들어 갔다가 원숭이 새끼가 너무 귀여워 덥석 안고 배를 탔다. 그것을 본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 나섰지만 배가 떠나자 험한 강가를 울부짖으며 따라간다. 백 리를 넘게 가서 배가 강기슭에 닿자마자 어미 원숭이는 즉각 배로 뛰어들어 새끼 원숭이를 껴안지만 금세 죽고 만다.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궁금해서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여러 토막으로 끊겨 있었단다. 너무 기를 쓰고 애를 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단장(斷腸)의 아픔’이다. 이게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날마다 자식 걱정하며 사는 어머니, 본문에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한 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다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만 낳게 해주신다면 그 아들을 바치겠다고 서원했기에 젖을 뗀 후 성소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머니가 바로 한나 (Hannah)다. 그녀는 말만 번지르하게 한 게아니라 서원대로 행한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힘든 일이어도 약속이었고 또 은혜에 감사했기 때문이
설교 속에 성경이 묻혀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교리 속에 성경이 갇혀버리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졌다. 매끄러운 설교는 맛이 없다. 빛 좋은 개살구가 맛이 없듯이 너무 세련되게 조직된 설교에는 예수의 인격이 유기체도 남지 못하고 분산되어 보인다. 갈기갈기 설교 조직 속에 흩어져 버린 예수가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옛날부터 침례교회는 신조주의(信條 主義)가 아니라 고백주의라고 했는데 주변으로부터 침례교회는 신학 부재가 아니냐는 항의가 있었다. 마침 오래 전 게재된 침례신문에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가 “신앙고백과 신조(신경)”란 주제로 글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면서 너무나 속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의 호흡이 순해진 것 같다. 침례신문에 게재된 글을 간과할 사람도 있을것 같아서 여기에 전부를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메우고 싶었다. 이것은 표절이 아니잖는 가?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글귀인 사도신경 그 자체가 이단분별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까? 왜 꼭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