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어느 늦은 밤. 오스트리아 잘차흐(Salzach) 강변에 위치한 오베른드르프(Oberndorf)란 작은 마을 성니콜라스 교회에 시무하는 모올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간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오르간은 잘차흐강의 습기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에 놓고 갑자기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수리를 위한 기술자의 방문은 봄이나 돼야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때 성탄절 행사도 해야 하고, 연극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한 대밖에 없는 오르간이 고장이 났으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시골 마을이라 기술자는 봄이나 오게 되어있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형편도 안되었기 때문에 모올 신부는 벌써 며칠째 오르간을 뜯어서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르간도 없이 어떻게 성탄절 행사를 할까?” 몹시 상심한 모올 신부는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 꿇어앉은 채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환한 달빛이 비치는 마을의 풍경이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구나!” 그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감동받은 순간, 모올 신부는 아름다운 시 한 편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비대면(un contact)과 사회적 거리두기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는 말한다. 세계대전 후에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팬데믹 (pandemic) 후에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미국 전염병 연구소 파우치 소장은 2021년 말에는 종식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지금 우리는 변종 바아러스로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빌게이츠는 2022년에나 종식될 수 있다고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일상의 복귀가 아니다. 언제든지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팬데믹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백신은 유효기간이 3~4 개월이다. 코로나는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어주셔야만 끝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비(非)인간화와 기계화로 결국에는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되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며 인간의 무한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죽고 죽이는 정글 구조를 만들고 있다. 지구화·도시
코로나19 사태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 목회는 대면 중심의 현장 예배를 지향하던 한국교 회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초연결사회, 접속 패러다임의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예배당의 빈자리에 성도를 채우는 것이 부흥이라고 배워온 목회자들로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텅 빈예배당에서 새로운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가상공간 혹은 사적인 공간의 공적 공간화”이다. 다시 말해 예배와 신앙교육의 공간이 교회당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니 급진적으로 가상의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 누가 주일 예배를 자기 집 거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드리는 성도들의 믿음이 선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이미 세상은 코로나로 앞당겨진 4차 산업 시대의 변화에 직면하여, 누구나 손쉽게 스마트폰 안에 디지털 공간과 접속해 가장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예배가 가능한 초연결사회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코로나19 사태는 4차 산업 시대의 변화를 실험하는 도전과 모험의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감염병 전문가뿐 아니라 사회의 패러다임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코로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변화를 요구했다. 너무나 안일했던 초기 대응과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어리석음이 화를 키웠다고도 말한다. 또한 교회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코로나를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일명 지혜롭게 하라는 말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믿음뿐이다. 언제든 조건은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이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이 정의처럼 주장하고 동조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린 단순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신정 민주주의자이다. 조건과 상황에 적응하여 변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비대면 신앙은 없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전투다. 싸우는 것이다. 져도 괜챦은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소개하는 글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결론 부터 말하면 특별히 코로나 이전의 교회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다. 주일이면 예배드리고, 주중엔 수요예배, 구역 예배, 금요예배로, 매일
코로나19는 팬데믹이다. 11월 7일 현재 240개 국가에서 확진자 수 약 2억 5000만명, 사망자 수약 530만명으로 전 세계 인구 79억명 중 3.2%가 코로나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전염병과 인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 인간은 미생물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을 대책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창과 말라리아는 고대 로마를 멸망시켰으며 장티푸스와 세균성 이질, 괴혈병은 십자군 원정을 실패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은 페스트는 중세를 몰락시켰고, 두창은 이후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사라지게 했다. 전쟁광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것은 발진티푸스였으며, 오늘날의 미국 영토를 완성 시킨 것도 황열이었다. 20세기 초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세배가 넘는 5000만명의 목숨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대책 없이 전염병에게 당하고만 있던 인간도 반격하기 시작했다. 백신과 항생제를 발견했고 두창과 페스트를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더불어 위생의 중요성도 부각되어 도시 계획, 공공보건 정책, 법적 환경 개선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손씻기의 생활화와 식생활의 개선 그리고 일회용 주
병거 3만, 마병 6000, 군사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블레셋에 고작 600명의 병력으로 맞선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석류나무 아래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으로 믿었고, “여 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다.”고 확신하며(6절) 소년 병사 하나와 단 둘이 블레셋 진영으로 침입 한다. 큰 바위로 둘러쳐진 요새라 난공 불락(難攻不落)으로 보였지만 믿음으로 들어가 싸운다. 거룩한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먼저 어느 나라를 침략하며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아니다. 너무 약했기 때문에 누구를 공격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전쟁이 방어 전쟁, 이스라엘은 그때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에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 제사부터 드린 거룩한 전쟁이었다. 제사장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개입을 기원한 것이다. 또 이 전쟁은 법궤가 동원된 거룩한 전쟁이었다(18절). 사울 왕이 법궤 동원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전쟁은 금식하며 치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자는 사람과 이단은 아니라고 보는 자로 양분되어 있다. 이단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통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단 그룹에 끼어 넣기를 꺼리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누가 선뜻 그게 이단이요라고 말하기에는 대단한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본인은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강력히 외친다. 그런데 안식교를 정통으로 보는 사람은 그들의 부활 신앙과 현세 삶의 도덕성과 정결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단됨의 정체를 모호하게 말하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교의 지옥관리, 죽음교리 때문에 이단으로 본다. 안식교는 지옥이 없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없다. 죽음은 단치 부활 때까지 수면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생명의 중단기간이다. 안식교의 사관(死觀)은 인간 사후 무의 식의 흙으로의 복귀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모두 구약이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146:4)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됨이니라”(전9:5)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
해외 선교만큼이나 어려운 대한민 국의 목회 현실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지역사회와 영혼들을 섬기며 목회하 시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에게 존경의 마음과 함께,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절히 중보기도하고 있는 몇 가지 내용들이 있다. 첫째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시니어 사역들이 영혼 구원과 주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데(마 28:19~20)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즉 개척 또는 교회 부임 초기의 ‘영혼 구원의 열정’ 이 목회 현실과 사역의 분산 등으로 인해 식어졌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던 복지는, 오히려 교회 사역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담임목회자의 교회론에 관한 목회철학 재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더불어 교회와 교회 부설 복지기 관이 서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귀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는 교회에 집중하고, 복지기관의 기관장은 교회의 성도 중에 한 사람을 세워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협력하는 방안’을 선택해야 한다. 두 번째로, 대체적으로 노인 사역들은 교회의 모든 세대와 ‘단절된 사역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시니어 기관(부서) 안에서, 시니어들 하고만 함께하는’ 유형의 사역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노인 사역자들은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왜 이렇게 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럼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구절 중 하나가 호세아 4장 6절이라고 믿는다. 오늘날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리고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항을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돼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번에 이 중 첫 번째에 대해서 간단히 나눴고, 이번에는 두 번째에 대해서
초등학교 4학년 전시 4도 화상을 입고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기저귀를 착용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들고 외로운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혼자 스스로 이길 수 있었던 능력의 원동력은 바로 저를 위한 어머니의 낙타 무릎 기도와 또한 점심 도시락 안에 젓가락을 말아서 써 주신 성경구절들을 매일 읽으면서 친구들의 왕따와 괴롭힘을 피해 재래식 화장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눈몰로 기도하고 이겨냈습니다. 외롭고 힘든 학창시절이었지만 나를 사랑하고 나의 편이 되어 주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워 침례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을 졸업하고 침례교단이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소명을 길에 들어서면서 늘 꿈꾸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교회,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적인 진리만 선포되는 교회, 세상의 썩어져 가는 구습과 경건치 않는 이 세대의 모양에 요동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외하고 순종함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승리하는 교회, 그리하여 교회 안에 성도들은 각자가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되어 참 신앙 안에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세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