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자스퍼 국립공원에는 에디트 카벨이라는 영국 간호사의 이름을 기념하는 아름다운 산이 있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부상병을 간호해서 탈주시켰다는 죄로 독일군에게 총살됐다. 그녀의 동상에 새겨진 유언은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무에게도 미움과 쓰라림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 역사상 링컨처럼 비난과 미움과 배신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핸더슨이 쓴 전기에는 그는 어떤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의 정적들도 다른 사람들만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지위에 적합하면 친구에게 주듯이 그 자리를 선뜻 주었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든가 그의 정적이라는 이유로 누구든 면직시킨 일은 없었던 것 같다”고 써 있다. 우리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특성을 우리가 타고났다면, 그리고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받은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을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가 남의 신을 신고 보름 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삼가게 하소서라는 수우족 인디언의 기도문을 우리도 외울 만큼 너그러워야 할 것이다. 적을 미워하는 대신에,
나는 요즘 글을 쓰고 싶다. 특별한 경험이나 의미 있는 삶의 흔적을 글로 남기고 싶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쉽지 않다. 현대는 지식 기반 사회로 말과 글이 넘치는 사회라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많은 글들이 이미 쓰여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필요한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굳이 내가 또 글을 써야 하는가? 라고 자문하면서 글 쓰지 않는 것을 합리화했다. 또한 글을 잘 쓰고 싶은 바람이 글 쓰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쓰는 것도 의외로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쓸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은 있는데 앉아서 글 쓸 시간은 없다. 글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목사는 글을 쓰면서 살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글을 써 주셨다. 그게 바로 십계명의 돌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신약성경을 기록하진 않았지만 제자들을 통해 신약성경을 쓰게 하셨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말주변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글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유력한
내가 한국인으로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말은 우리 역사와 문화, 관습, 그리고 우리 전통들을 송두리째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민족의 의식세계에 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그 민족들이 수천 년을 그 땅에서 살아오면서 민초들이 만들어낸 속담들이야말로 그 민족성의 일부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 한민족이 사용해온 속담가운데는 아름다운 속담들도 많이 있지만 내가 인생의 여정을 살다 느낀 것은 어떤 속담들은 이것들은 우리 속담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우리 사회 곳곳에는 오늘도 아니 땐 굴뚝에서 시커먼 거짓 프로파간다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워 올라서 무수한 생사람들을 잡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옷깃 한번 스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요란한 소리들이 도처에서 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종류들의 어처구니없는 속담들을 오늘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 가운데서 내게 가장 공감되지 않는 속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모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유세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는 미국에도 공공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개 선거 유세는 큰 교회에서 했다고 한다. 링컨이 상대방 경쟁자와 함께 합동연설을 하기로 했는데 먼저 다른 당 입후보자 가 연설을 하게 됐다. 마침 날씨가 덥고 해서 연설을 하다 보니까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고, 입후보자의 연설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상대방 입후보자는 화가 났고 그래서 그는 청중들과 호흡을 맞추고 공감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는 연설 도중 참석자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연설의 테마를 바꿨고 그리고 청중을 향하여 물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은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조느라고 몇 명밖에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입후보자는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그러면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분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청중이 모두가 손을 들었는데 링컨만을 손을 들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 입후보자는 ‘잘 됐다. 이제야 링컨을 곤경에 처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링컨씨, 그럼 당신은 천국은 안 가고
철없던 시절 엉뚱한 생각을 했던 날들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웃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 4~5학년으로 기억된다. 어느 따듯한 봄날 우리 대문에서 건너다보이는 친구네 형한테 새색시가 시집을 왔다. 호기심 많던 나는 친구네 집에 새색시 보러 자주 놀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활짝 열려있는 방 문안으로 예쁘게 꾸며진 새색시 방안을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예쁘고 좋아보였다. 무엇보다도 벽에 걸려있는 ‘횃대보’가 얼마나 예쁘던지…. 하얀 천에 예쁘게 수놓아진 ‘횃대보’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찾아온 엉뚱한 생각, ‘장가가고 싶다!’ ‘빨리 장가가서 내 방에도 횃대보가 걸려있는 방을 갖고 싶다’는 없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집에서 키우는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던 날, 아버지는 뜬금없이 “이 송아지는 네 장가밑천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잘 키우라고 하셨다. 물론 아버지는 웃으시며 하신 말씀이었지만 어린마음에도 ‘장가밑천’이라는 말씀이 싫지 않았다. 그날부터 학교에서 오면 언제나 송아지를 관심 있게 돌봤고 여름이면 들에 나가 열심히 소먹이를 베어다 주곤 했다. 송아지는 잘 자라서 어미 소만큼 컸고 살찌워서 등에서 윤기
나의 생애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주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의 언약(covenant, 뻬리트)와 야고보서 1장 12절에서 말씀하신 약속하신 약속(God has promised, 에펭게일라토)이라는 말씀이다. 그 해 장마는 왜 그렇게 길고 오래 많은 비가 왔는지? 지금 추억해 보면 시인 김소월의 시 ‘왕십리’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열한 살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낮선 마을 고모네 집에서 장맛비가 그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기다려야만 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린 날이 아마 네 닷세는 족히 됐는데도 그 장맛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던 아버지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일아 오늘이 약속 된 날이라서 가야해” 그래서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 비 그치고 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일아 오늘 수요일 저녁 설교하기로 약속 된 날이란다. 가야지” 하신다. 비닐 우비를 입고 허리를 동이고 단봇짐을 지고 장대같이 내리는 빗길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오랜 장맛비로 계곡물은 불어나 다리라는 다리는 계곡의 범람으로 다 휩쓸려 떠내려가고 찻길에는 언제 차가 다녔는지 바퀴
지난 6월 6일 논산한빛교회(강신정 목사)에서 전국 17개 광역시도연합회가 주최하고 충청남도기독교총연합회가 주관한 10시간 기도회에 참석했다. 세계적 혼란과 국가의 총체적 위기, 북한의 핵공포 등, 안보와 민생 치안의 부재 속에 몸살과 홍역을 앓는 때에 하늘문도 닫혀버려 가물어 메마른 삭막한 대지에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때 이른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연일연야의 날씨, 정말 짜증과 불쾌지수가 신앙인들도 피해갈 수 없는 한계상황 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한 1일 10시간 기도회”는 성령의 열기 속에 뜨거운 찬양과 간절하게 애태우는 기도의 함성으로 온 예배당 안을 성령의 불로 채웠다. 휴일도 자진반납하고 주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울부짖음의 아름다운 몸부림들은 마치 하나님의 천사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어쩌면 이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들으시고 열납하시는건가? 때를 같이해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가 촉촉하게 내려 대지를 적셔주니 그야말로 기도하기 딱! 좋은 안성맞춤의 날씨였으니 말이다. 매 시간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역자 강사님들께서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셨고, 기도회에 참석한 온 성도들에게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세 암흑기 시대에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훨씬 전인 서기 418년, 아프리카 총 공의회인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00여명의 교회의 감독들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사상의 논쟁에 대하여 교회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진로를 선택했다. 박해의 터널에서 벗어난 당시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원죄로 타락한 불완전한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시하며, 자신의 의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해 의에 대하여 무책임하고 방종하고 태만했으며, 교회는 그들의 죄에 대한 죄책을 고해성사로 면하게 해주어 사실상 도덕적 해이와 위선을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의 약점과 모순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하게 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학적 소견으로 강력하게 경고하며, ‘죄란 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저버리고 스스로 불경건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는 원죄에 대한 당시 교회의 교리와
학창 시절 어느 주일에 담임 목사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설교를 하시던 중 이렇게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눈을 감고 아버지! 하고 조용히 불러보세요 어떤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육신의 아버지상이 내 마음에 확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아직 예수 믿기 전이셨는데 내게 떠오른 아버지상은 술 취해 주정하는 모습, 아픈 내게 폭언을 퍼붓는 모습,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밥상을 집어 던지던 모습 등이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를 떠올려야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방해했던 것이다. 훗날 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것은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원수도 사랑해야 할 판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지닌 채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전혀 합당치 않을진대 하물며 어떻게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혼자 괴로워하며 울며 기도하기도 많이 했다. 다행
열 살 때부터 선친의 손을 잡고 목회현장을 따라 다녔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목회가 곧 절대가난의 대명사였다. 선친과 단 둘이서 가족을 떠나 가난한 시골교회를 섬기면서 ‘목회란 이렇게 희생하는 삶을 사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현장에 나와서도 목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필자의 선친이 대단한 학자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안다. 그분은 일생 기도와 묵상 그리고 성경연구와 설교준비 노동이 삶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매주 주말만 되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마을에 수 년동안 지붕을 덮지 못해서 썩어 무너져 가는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의 초가지붕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엉을 엮고 용마름을 만드는 것을 할 줄 안다. 그리고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수동식 목장갑 기계를 사다가 사택 뒤 공간에 설치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또 주말이 되면 나는 장갑을 팔아 주는 일을 했는데 그것이 목회라고 생각했다. 선친은 어떤 바쁜 일도 기도하는 것, 말씀 묵상하는 일과 설교 준비하는 일을 게을리 하시는 것을 본적이 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