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은사님 한 분으로부터 “이 목사 종교인 과세에 관한 글을 써볼 생각이 없나?”고 전화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많이 망설였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재산을 몰수당하시면서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시고 짐승처럼 울부짖으셨다던 조부와 또 공직에 계시면서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 때문에 파산했던 선친의 아픈 추억과 조부의 유언으로 목사가 되셨던 선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보니 세금을 내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세금을 내지 않는 다는 것이 무슨 특혜 같지만 성장과정에서 정상적인 국민의 권리를 별로 누리지 못한 절반만의 국민이었다. 대부분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두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다. 첫째, 국가가 관습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던 것이고 둘째, 개척교회나 농어촌 교회의 열악한 현실은 세금 낼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목회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과세를 면제해 준다는 법적 제도적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우리민족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이래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 다만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쓰면서 불교에 조세를 부과한 예는 있지만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
맥스 루카토의 ‘너는 특별 하단다’(고슴도치)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웸믹”이라고 불리는 “작은 나무 마을 사람들” 이 모여 사는 어느 마을 이야기다. 이 마을 웸믹들은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금빛 별표가 든 상자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이들마다 서로 별표나 점표를 붙이며 하루를 보낸다. 재주가 뛰어나거나 잘 생긴 웸믹들은 항상 별표를 받았고, 보잘 것 없고 내 놓을 것이 없는 웸믹들은 잿빛 점표를 받았다. 온몸이 별표로 가득해서 번쩍거리는 웸믹들도 있었다. 별표를 받을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으니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애를 쓰게 됐다. 하지만 웸믹들 중에는 재주가 없는 이들도 있어서 그들은 언제나 잿빛 점표를 받았다. 그 중에 펀치 넬로라는 웸믹이 있었는데 그는 남들처럼 재주가 있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남들처럼 높이 뛰어 보려고 해도 넘어지기만 하고 그럴 때면 웸믹들은 너도 나도 달려들어 잿빛 점표를 붙여 줬다. 넘어져 상처라도 나면 더 많은 점표를 붙였고, 왜 넘어졌는지 설명이라도 하면 “말투가 우스꽝스럽다”고 또 다시 점표를 붙였다. 점표가 많이 붙어 있다고 덤으로 점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명시 황무지의 프롤로그 속에 한 비극적인 노파가 등장한다. 쿠마의 무녀라고만 알려진 이 여자의 전설은 1세기 로마 시대 네로황제의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곤 48장 트리말키오의 향연”에서 인용된 노파이다. 희랍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 쿠마의 이 무녀는 신비한 예언력을 지닌 아주 유명한 여자였다. 이 여자의 예언력은 그녀가 섬기는 아폴로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어느 날 아폴로 신이 자신을 극진히 섬기는 이 여인에게 ‘네가 가장 원하는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쿠마의 무녀는 자신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많은 햇수의 장수를 달라고 간청해 아폴로 신으로부터 장수를 허락 받았다. 그런데 무녀는 장수를 구할 때, 그 장수만큼의 젊음도 함께 달라는 간청을 잊어버렸으므로 나중엔 너무 늙고 메마르다 못해 결국 곤충처럼 쪼그라들어 조롱(鳥籠)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새장 속에 갇혀있는 곤충이 되어버린 이 비참한 노파를 구경하러 온 아이들이 노파에게 물었다. “무녀야! 네 소원이 무엇이니?” 이 때 이 늙은 노파는 절규하듯 대답했다. “난 죽고 싶을 뿐이야!” 작가는 편파적인 생각으로 사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지천인 현대인들에게 이 질문은 웰빙에 관한 질문으로 들리겠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부분을 발취한 말씀이다. 처음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내게는 안정되고 또 동기들이 가고 싶어 하는 교회에 부사역자로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사역지가 없는 친구가 너는 집안에 어른들이 다 목사님이니까 자기가 갈만한 교회를 추천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그 교회를 양보하고 내 손에 단돈 일원도 없이 대한민국 지도를 펴놓고 오직 이 말씀만 의지하고 인구 십만이 넘는 도시로 침례교회가 없는 도시를 찾아 간 것이 내 첫 목회지였다. 내가 침례교회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약 120년 전 반가의 여인었던 한 여인이 침례교도가 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던 분이 나의 증조모셨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잠자리에 누워 내가 침례교도의 후손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침례교정신에 사로잡혀서 산다. 내 처음 목회지, 목회지라고 해봐야 아무것도 없는 삯 월세 달랑 단칸방 하나가 신혼부부 방이고 또 교회였지만 두렵지 않았던 것은 고인이 되신 선친께서 아무연고도 없는 곳으로 목회를 떠나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얻
금년 성탄절에는 호박꽂이를 넣은 시루떡을 만들어서 교우들과 함께 나눴다. 올해는 특별히 떡 한 가지를 더 했는데 무설기 시루떡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시골에서 싸레기 쌀가루에 무를 듬뿍 넣어서 시루에 쪄서 온 가족이 먹던 생각이 나서 연세가 드신 어르신 교우 들게 향취를 느끼게 해드리면 좋겠다 싶은 뜻에서 한 일이다. 광고시간에 담임목사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성도들은 무설기를 드리고 그 외에는 찹쌀시루떡을 나눠 드린다고 했는데 막상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무설기떡을 보더니 너도나도 무설기파로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완전무설기 대박이 난 것이다. 사실 젊은이들은 무설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호기심에 몰려든 것 같다. 사실 무설기 떡이 가난했던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오늘은 지면을 빌려 어려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무설기떡에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어느 날 목사님은 지나는 길에 그 교회 연세가 지긋한 어느 집사님 댁을 예고도 없이 심방을 하시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심방을 미리 알리고 날자와 시간을 약속을 잡지만 통신 수단이 별로 없던 옛날에는 아무 때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성도님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기도해 드리
기독교 신앙에서 죄인 된 우리에게 ‘용서’ 라는 말 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말이 있을까? 이 ‘용서’라는 말을 ‘죄 사함’이라는 말로 변환시키면 ‘칭의’와 ‘구원’과 직결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되며, 모든 기독론의 근간이 될 정도로 신앙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시대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며, 이 하나님의 인격이 의(義)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의 최종적 결과가 용서임을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의 용서의 극치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 하셨다. 문학에서 ‘테네시 윌리암스’의 “올페”는 이 ‘용서’의 가치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이디’는 비운의 여인으로 소개된다. 여주인공 ‘레이디’의 부친은 가난한 이태리인으로서 만돌린이라는 악기와 푸른색 옷을 입힌 원숭이를 데리고 어린 딸 ‘레이디’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 남부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리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는 술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원숭이의 재롱을 보여주며 술 취한 주객들로부터 동전을 구걸하는 남루한 악사로 삶을 연명
지난 9월 기독교한국침례회 107차 총회에 3박 4일을 참석하면서 올해 총회는 나에게 있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 총회로 기억된다.특히 교단에 산적해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작금의 현실들을 보면서 가슴 아프기도 하고 또 깊이 생각하게 하는 동기도 됐다. 현대인들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현상은 목회자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들은 깊이가 없고 대화라고 나누는 것들이 고작 가십거리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소크라테스의 인생 명언가운데서 한 문장이 생각난다. “숙고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침례교회는 개교회주의라는 명분아래 숨겨진 미묘한 이기주의에 익숙해 있어서 교단의 현재와 미래에 별 관심 없이 살아온 나날들을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면서 우리 교단을 느낀 것은 작금의 우리 교단의 상태가 아포리아(혼란, 난제)의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지 심히 염려가 된다. 총회를 참석할 때마다 늘 놀라는 것은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잘 전달하며 말을 잘할 수 있을까 감탄과 부러움,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의장은 내가 손을 들면 발언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는 내가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기 전 4학년 말에 세워진지 11년 된 교회에 12번째 전임 전도사로 부임해 올해로 33년째 시무하고 있는 사역지이다. 목회자가 자주 바뀌어서 어떤 분은 부임 5개월만에도 사임하고 가시던 참으로 어려운 교회에 부임해 오늘까지 섬기고 있다고 하면 다들 “위대하다”고 이야기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네, 제가 위가 좀 커서 밥을 많이 먹습니다”고 대답을 하곤 한다. 지난 세월 목회를 회고해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전적인 주님의 은혜가 첫째요, 둘째는 주변머리 없는 내 목회 스타일을 꼽을 수 있다. 앞에 다녀가신 목사님들 대부분은 국내외에서 나름대로 활발하게 목회하시는 분들이고 나름 성공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당시에 몇 분 안 되는 교우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정착해서 계속 사역하는 일을 접고 사임을 하고 떠나갔다. 목회자가 자주 바뀌니 허니문 같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교회 사정을 전혀 그러하지를 못했다. 나라고 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목회초기에는 금식도 여러 차례 했고 머리를 삭발하면서까지 장기 금식기도를 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대학원을 두 곳이나 졸업했고
침례신문 2017년 9월 9일(토) 7면에 “세인의 의혹 받는 동아기독교의 정체”를 풀이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1930년 8월 7일(목) 중외일보이며, 기사를 쓴 단체는 ‘호서기자동맹 서구지부’이다. 전문의 일부를 인용하여도 이 기사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첫째, 이 기사를 작성한 호서기자동맹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초한 운동을 하였으며, 미신타파 활동의 일환으로 동아기독교를 매도하기 위한 인터뷰를 한 것이다. 1925년 9월에 호서기자동맹이 결성되고, 여기에 공주의 신문기자들이 참여하면서부터 더욱 가속화됐다. 공주지역의 신문기자들은 호서기자동맹을 매개로 당시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사회운동의 방향 전환 논의했다. 예를 들면 청년운동 조직내부에서 나이 많은 유지들이나 면협의원 등은 축출하고, 운동의 주도권을 이른바 혁신청년들이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기초한 노동자, 농민운동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주장했다. 1927년 4월에 개최됐던 공주기자협회의 총회에서는 소년 운동에 관한 건, 노동운동에 관한 건, 소년소녀회 원조에 관한 건, 문맹퇴치에 관한 건, 여성운동에 관한 건, 계급운동에 관한 건, 풍기문란에 관한 건, 미신타파에 관한 건 등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세 암흑기 시대에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훨씬 전인 서기 418년, 아프리카 총 공의회인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00여명의 교회의 감독들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학사상의 논쟁에 대하여 교회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진로를 선택했다. 박해의 터널에서 벗어난 당시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원죄로 타락한 불완전한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시하며, 자신의 의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여 의에 대하여 무책임하고 방종하고 태만했으며, 교회는 그들의 죄에 대한 죄책을 고해성사로 면하게 해줘 사실상 도덕적 해이와 위선을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의 약점과 모순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하게 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요구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학적 소견으로 강력하게 경고하며, ‘죄란 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저버리고 스스로 불경건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는 원죄에 대한 당시 교회의 교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