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집사’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교회 내 한 공간에서 기거하면서 교회 내 모든 잡무를 보는 분을 일컬어 ‘사찰’ 또는 ‘사찰집사’라고 한다. 집사라는 호칭도 따지고 보면 사찰이라고 부르기가 뭐해서 교회에서는 거의 일반명사나 다름없이 사찰집사라 부른다”라고 검색됩니다. 규모가 되는 교회는 예배당 청소, 건물관리, 운전 온갖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교회에서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사찰집사”라고 부르는 직원이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지만 우리 교회도 사찰집사도 없고 목사 혼자 목회하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경제활동하고 예배 때나 교회 오기 때문에 평일에 교회 와서 일을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잡다한 일들은 목사의 몫입니다. 교인들의 생각에 목사는 성경 읽고 공부하다가 일주일에 몇 번 예배 시간에 설교하고 성경공부 가르치고 기도하고 사례비 받는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연말이면 목사님 사례비를 가지고 ‘올리네’, ‘못 올리네’ 인색하게 따지며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는 성경과 책을 읽고 공부해 설교를 준비하며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게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심방하며 성도를
중세 기독교가 금욕적인 수도원적 기독교라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학문적 기독교다. 중세에는 모든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경건하거나 영적인 것을 원한다면 수도원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 수도원에 들락날락했던 사람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봤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다. 오늘날도 기도원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자격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기독교 역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기독교를 과학적 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혹은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어떤 연구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람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찬양한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 학문적 연구를 위해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학문적인 운동과 함께 학문적인 대중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일들은 특히 신학교에서 이뤄진다. 이 현장에서는 언제나 성서 해석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다. 성서 해석에 대한 ‘설’이 존재한다. 이 시대적인 배경이 맞는지, 한 시대 이후로 보아야 하는지, 이 성서 본문의 저자가 사도인지 아닌지 등 다양한 ‘
우리는 복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힘으로 복수할 만한 능력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어떤 인간의 복수보다 더 끔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복수의 금지된 달콤한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보면, 이른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 9시에 와서 일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중간에 와서 일을 한 사람이 있었고,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정도만 일을 하다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주인이 임금을 모두 똑같이 지급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마 아침 일찍 와서 일을 했던 사람이 가장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때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하며 뭐라 말했는지 들어봅시다. “저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취급하는군요.”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나는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그대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약속하지 않았소? 그대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나중 사람
인간이 규칙 지키기를 거부하고 에덴동산 밖 삶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인간에게 성장이라는 축복까지 준비해 주셨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6~17) 사람과 뱀은 처벌받아야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뱀에게는 사람과 달리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묻지도 않고 벌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유혹한 뱀의 행동이 구속사라는 거대한 계획 일부였기에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싶네요.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게 됐고 미래에 오실 여자의 후손 예수님으로 인해 심판받게 되는 벌을 받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받은 벌은 뱀이 받은 벌과는 결이 아주 다릅니다. 언뜻 형벌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축복이 함께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16절과 17절을 보면 여자와 남자가 출산과 노동을 범죄 대
다윗이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복수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다윗의 복수의 기도는 여러 편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더욱 강력합니다. 인간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를 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벌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에게 죄를 짓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삼대,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출 20:5, 새번역). 그렇다면, 다윗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한가요? 여러분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합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거름보다 더 심한 악취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복수보다 더 끔찍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요일 5:4).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상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는 다르게 그의 사랑은 변화와 변조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그의 원수를 미워하는 방법을 잘 압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나서도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뱀의 말이 일부는 맞은 셈이죠. 하지만 더 지혜로워지리라는 기대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눈이 밝아진 건 사실이지만 세상 이치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먼저 보였으니까요. 하나님 섭리를 벗어난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됐죠. 꿈꾸던 욕망 속 근사하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한심하고 신뢰 없는 열등함만 서로에게서 보고 말았던 겁니다. 2장 25절에서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벗은 모습이 이제는 감추고 싶은 실체가 되어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고요.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던 과거에는 완전한 연합이 가능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연합할 수 있었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나님 연합도 가능했죠. 에덴동산이 낙원이 될 수 있던 원인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가 부끄러움도 속임도 오만함도 없이 하나님 안에서 소통하고 연합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연합은 사라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몸을 감추며 자신을 숨겼고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이 연합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
전국, 아니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개척하고 1년이 못 되어 이 난리가 났으니 그야말로 코로나와 함께하는 개척이었다. 정부 방침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배를 반복적으로 전환하며 버티고 버틴다. 부활주일. 우리 교회 창립 주일이다. 상황이 조금 좋아져 기대하는 마음으로 현장예배를 준비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좋은나무교회 목사님이시죠? 내일 예배 현장에 잠시 방문하겠습니다.” 공무원 방문 사전 예고.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내게는 차갑게만 느껴진다. 공간이 좁아 ‘거리두기’가 어려워 온라인 예배에 늘 적극적이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지지가 있어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부활주일에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오랜만에 현장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공무원 전화 한 통에 마음이 무겁다. “전체 좌석이 얼마나 되나요? 20퍼센트, 아시죠?” 두 명의 방문 공무원 중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분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가 나를 곤란하게 한다. 있는 의자, 없는 의자 다 깔아 둔 내 꼴이 우스워 보인다. 꾸중을 면해보려는 엄마 앞의 아이 꼴이다. 하지만 선임으로 보이는 공무원이 몹시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고통입니다. 주변 세계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조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 때문에 고통당할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오, 그는 아무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아무런 도움 없이 있지 않았나요? 어차피 전능하신 분께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분은 극한의 상황에서 40일을 주리시면서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나 사도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과 관련해 고통당하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이 지상에서 주리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 분은 거지꼴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세상의 주인되신 분께서 말입니다. 그때 아마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 있습니다. 기적, 이것은 끔찍한 고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이것은 고문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
그리스도의 시험은 그냥 평범한 인간적인 시험이 아닙니다. 배가 고플 때, 기적을 행하는 것을 우리는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플 때, 단지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한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시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40일을 주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마귀는 40일을 굶으셨던 주님께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지 않나요? 하지만 그런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순간에 기적의 힘을 이용해 떡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얼마나 초인적인 고통입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왜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작은 떡덩이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믿지 않나요? 그런데도, 40일을 주리셨던 주님은 기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