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애용하던 성경책이 너무 낡아지거나 취급부주의로 망가져서 영 볼품없이 되어 버린 마치 폐지처럼 되었을 때, 이 성경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이따금씩 받을 때가 있다. 이런 난처한 듯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구 다룰 수 없지 않느냐는 경건심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 대답도 안하고 있는 나를 향해 소각 처리하는 것이 차라리 성경책에 대한 예우가 아니냐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성경책도 오래 지나다보면 형편없이 되어 버릴 때도 있는데 혹자는 그럴수록 그것을 가보(家寶)로 여겨 대물림하려고도 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성경책에 대한 이런 처리곤란을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90세 노모님께서 생전에 지혜롭고도(?) 경건하며(?) 신앙적으로(?) 해결하시던 현장을 나는 목격했었다. 마침 어머님 곁에 정말 폐지 처리장에 넣어야할 만큼 너덜너덜 갈기갈기 여기저기 찢기고 떨어져나간 못쓰게 된 성경책이 있었다. 많은 손자들 등살에 성경책이 수난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성경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곧 능력이라는 등식(等式)의 신앙을 갖고 계셨다. 무식한 유식(有識)신앙의 소
1. 우리도 주님께 드려야 한다. 한 농부의 젖소가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다. 한 마리는 갈색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흰색이었다. 농부는 너무 기뻐서 아내의 손을 잡으며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축복하셔서 두 마리의 송아지를 주셨소. 우리가 다 갖지 말고 한 마리는 잘 키워서 하나님께 드립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두 마리 중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소”라고 물었지만 남편은 나중에 결정하자며 미뤄 두었다. 1년의 세월이 흘러서 그중 한 마리가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농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지! 하나님의 송아지가 그만 죽고 말았어!” 여기서 왜 죽어버린 송아지가 하나님의 것이어야 할까? 어쩌면 우리도 이 농부와 같이 산 송아지는 우리가 취하고 죽은 송아지를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요? 좋은 것은 우리가 취하고 못한 것으로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에게 드리지 않는지요! 주는 자가 복이 있다면 우리도 최우선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연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속의 은총을 그냥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율
전혀 오염되지 않고 소식(小食)만으로도 고 영양을 섭취하면서 암, 당뇨, 비만 등 각종 불·난치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식품!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찾는 이상적인 먹을거리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먹을거리에 대한 말씀이 분명히 나와 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질병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회복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창1:29). ‘생식(生食)’이란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먹는다’는 뜻이다. 열을 가하거나 인공 첨가물을 넣지 않고 일체의 가공이 없는 순수한 상태의 자연식 자체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 대표적인 생식인 대체식(alternative)은 식품의 생명력을 최대한 지니고 있으며 몸의 자연 치유력(Homeostasis)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하우(knowhow) 에너지가 들어 있다. 대체식은 최고의 생명식이다. 생명력이 부족한 식품을 주로 먹게 되면 인간의 장기는 피곤함을 느끼게 되고 원기도 부족해져 허약체질이 되기 쉽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아무리 영양을 강화해도 이것은 생명력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인체의 세포까지 생명력을 보내줄 수는 없다. 대체식(alternative)은 장기의 기능을 빠르게
6·25전쟁이 3년을 끌고 마침 휴전이 된 1950년도 중후반 시절, 나는 그때 중학생시절을 보냈다. 극심한 가난과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나의 용궁침례교 모교회만 해도 3개월간 인민군의 임시 지휘소로 징용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3년 전쟁을 치르고 휴전이 된 그땐 목회자가 귀했다. 한 목회자님이 두 교회를 담임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목회자님이 오전엔 이곳 교회에서 예배인도하고, 오후에는 저곳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때 교통수단은 자전거가 유일했다. 만약 비라도 와서 강물이 넘치면 교량이 없는 시절이라 목회자는 한곳 예배만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모교회만 해도 목회자님이 못 올 때가 많았다. 그때 목회자님이라 해도 학문을 겸비한 것이 아니라 일찍 예수를 믿고 오직 성경과 믿음 그리고 사명 하나로 원시목회를 했었다. 그나마 목회자님이 못 오실 경우 대체 안은 무엇인가? 전화도 없는 시절이라 오고 못 오고 간에 통소식이 없다.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목화지가 저곳에서 이곳에 도착 안하면 그냥 못 오시는 가 보다 하고 그때 나이 드신 집사님이 날 보고 “혁봉아, 네가 오늘 말씀증참(證參)해라” 하신다. 즉 설교하라는 것인데 그땐 설교를 말씀증참이라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해방이 되고 요사이는 ‘야소교’라는 서양종교가 극성을 부린다고 하는데 너희들 지붕 모서리나 종각대 꼭대기에 십자가 막대기 달아놓은 교회당에 가지말라!”고 배 선생은 성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배 선생은 지금 명선교회 배성태 목사의 할아버지로 생각된다. 듣고 있던 국민학생들은 소곤소곤 거렸는데 누군가가 예배당에 나가는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부친의 가르침 따라 공자를 제일 높은 분으로 믿었다가 어머니를 따라 절간에 가서 큰 부처상외에 칠성단에까지 28번의 절을 하고 절에 팔린 불자가 됐다고 으스대는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친구들이 여기에 예수쟁이가 있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나뭇가지를 찍어서 두들겨 패니 박만규 학생은 산 숲으로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런데 그 때 처음으로 야소교와 “십자가 나무 막대기”란 말을 들었고 그 후 다른 동리를 지나다 보면 나무 막대기 십자가를 달아놓은 집을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10세쯤 되었을 때까지 공부에 취미를 못 붙이고 있었다. 여름에는 수영과 다이빙, 우럭잡이, 봄과 가을에는 산에 올라 과
내가 부자교회라 함은 재정이 넉넉한 교회를 이름하고 가난한 교회란 그렇지 못한 교회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부자교회는 자본주의적 교회이고 가난한 교회는 자본주의 바람을 못타고 뒤쳐진 교회라는 설명을 덧붙여 본다.내가 굳이 이런 구분을 하는 이유는 두 종류의 교회의 목사의 설교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르냐고?부자교회 자본주의적 투자 많은 교회의 설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데 비해 가난한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자교회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저 목사님이 어쩌면 저렇게 유식한 지성인일까 하는 생각이 들고, 가난한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어쩌면 저렇게 빈약한 설교를 하는 무식한 목사일까 하는 등의 대조가 되어 버린다.그도 그럴 것이 부자자본주의적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정치, 문화, 경제, 시사, 연예, 오락, 스포츠 등에 관한 지식이 물씬물씬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 담임 설교자 목사에게는 각 분야의 부목들이 즐비하다. 분야별 부목이 있다. 정치 분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전문 부목 곧 비서가 있고 하다못해 스포츠 분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비서 부목도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협
석가모니는 40여 년간 중생을 제도했으나 “자기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보응을 받아야지 용서받을 길은 없다.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 등 삼세를 구원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개인전도를 많이 하셨고, 12제자, 70문도, 다락방의 120명 제자, 승천시의 500문도, 4,000명과 5,000명에게 떡 먹이고 설교, 어떤 때는 무리 수만 명이 따라 다녀 밟힐 만큼 되기도 했으나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사도 요한만 십자가의 골고다 동산까지 따라왔었다. 오순절 후에 베드로의 설교에 한번은 3,000명 다음은 5,000명이 결신하는 열매를 보였다. 목회를 시작한지 53년에 접어드는데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전도했고 복음을 여러 가지로 전했는데 한 사람의 생명이 고귀한 것을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죽을 줄도 모르고 물에 빠진 초등학생을 구하려고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그 때가 일평생 뼈저리게 잊혀지지 않는 절박한 체험교훈을 되새겨 본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
내 방 옷장에는 수 십 개의 넥타이가 걸려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넥타이수가 그렇게 되었다. 준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해서 거의 한 번씩 매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애호하는 넥타이가 있다. 무슨 넥타이를 맬까하고 넥타이 걸이를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딱 하나의 넥타이에 손이 간다. 바로 그 넥타이를 늘 자주 맨다. 왜 그런가? 그냥 좋기 때문이다. 매고 나서 거울을 바라본 나의 행장이 그 넥타이 때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넥타이는 천이 부드럽고 칼라풀한데다가 무슨 그림인지 모르나 디자인이 잘되어 있고 목에 걸치고 내리면 내 배꼽 위를 살짝 덮는 길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내가 말 한다. : “또 그 넥타이요?”라고. 그런데 아뿔싸 어떻게 한담? 이 넥타이의 수명이 다 한 것 같다. 우선 천이 맥이 없이 늘어지고 목에 매어 봐도 반듯하지 못해서 마치 피다가 떨어지려는 장미꽃 마지막 모습 같았다. 나도 이젠 이 넥타이와 이별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버려야지! 그러나 어디에다 버린다냐? 이 넥타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설교할 때나 결혼식 주례할 때나 하여간 귀한 시간에 꼭 나의 목에 걸려 있어서 나도 좋
하나님과 함께라면 너무 늦은 법은 없다. 인생을 재건축하기에도 늦는 법은 없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열반에 입적하셨지만 모세는 왕궁에서 왕자로 40년 끝에 살인자가 되어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추방되었고,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로 40년이 지나 드디어 80세가 되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120세에 느보산에서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다. 유행어로 80세에 데리러온 저승사자에게 대답한 말이 무엇이든가?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갈데아 우르에서 떠나 100세에 이삭을 낳고 175세에 부름을 받을 때까지 가나안에 축복을 누렸으며 복의 근원이 되었고, 공자는 73세에,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여호수아는 70세에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영도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토지를 분배한 후 110세에 죽기까지 사명을 감당했다.30세경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 청년은 바울 사도로 67세 가까이 죽을 때까지 지상충성을 다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독일 라이프찌히 선교사로 간 54세의 목사 선교사아들이 이미 그곳간지도 15년 세월이 흘렀고 가끔 고국부모 찾아오길 그래도 여느 선교사보다는 잦은 셈이다. 부자간에 갖고 있는 목사 철학 때문이다 부모도 선교의 제1대상이라는 생각이 아들선교사 목사의 선교관이기 때문이다. 그 선교관에 아내도 동의해 준지가 아예 선교지 떠날 때였다. 독일에 무슨 선교사가 필요하냐면서 사람들은 선교 지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듣고 보면 동남아의 어떤 나라 못지않게 선교가 필요한 곳이 바로 유럽이요 그 중에도 유럽 선진국이라는 데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문화에 젖어 있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아들 목사 선교사는 그놈의 문화의 벽을 넘어 "알 예수님(Naked Jesus)"을 소개하는 복음사역지로 일하고 있지요.그런데 이름도 빛도 없이 아비목사인 내가 아들선교사의 후원회장(?)이 되어 15년을 돕고 있다. 모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럽선교의 필요성을 말하고 애써 모금한 선교헌금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는 마치 쪼들리는 사장님이 직원에게 봉급주는 기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선교사 목사아들이 한국에 한 달 체류하다가 그의 딸 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