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됐다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부수적인 성질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의 교환이 이뤄진다면, 역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실체는 외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껍질(accidents)이 떡과 포도주의 껍질로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오류를 인정하게 된다. 칼빈은 화체설의 이런 철학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떡과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그 백색을 그 본질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가톨릭교회 역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체설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있다. 아퀴나스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단죄하고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길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점들에 대해 유의하지 않고 그들은
“바람 부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웃어주고/ 내 마음 쓸쓸한 날은/ 어느새 곁에 와서/ 기쁨의 불을 켜주는 꽃, 반세기를 동고동락한/ 동백꽃을 바라보 며/ 나도 이젠/ 한 송이 동백꽃이 되어/ 행복하다” 1976년에 ‘민들레 영토’를 첫 시집으로 엮었던 이해인 수녀는 38년 후인 2014년 나이 70에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녀는책 서문에서 “겨울 추위 타지 않고 밝고 환하게 꽃으로 웃어 줄 줄 아는 동백,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열매를 잘 익혀 멋진 기름을 짜게도 하기에 그 일생이 참 아름답다”며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답고 고운 동백꽃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사무엘서를 읽으며 사무엘도 ‘동백꽃을 닮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상 12장에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말을 세 번 쓰고 있다(8:1, 5, 12:2). 마치 등장하자마자 늙고 바로 퇴장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러고도 사울 왕과 다윗 왕을 기름 부어 세우고 왕을 가르치고 선지자를 육성하는 일을 계속한다. “이젠 늙었다”, 상투적인 거짓말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사무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핵심 사명은 세대교체, 즉 새 시대의 출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창조될 때 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발하셨는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지구를 보시면서“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실까? 하는 물음표가 붙는 것을 왜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는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공기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육식을 위해 나무숲을 베고 초지를 조성하면서 사막 화가 가속화되고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필자는 설 연휴를 지나고 난 뒤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울산제일일보에 쓰레기 줄이기 위한 범시민 운동이라도 벌이자는 글을 썼었다. 쓰레기 줄이기 운동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외식이나 매장방문은 줄고 인터넷 주문과 배달 주문이 증가하면서 택배와 배달 식품 포장용 스티로폼 박스나 포장용 비닐 쓰레기가 급증했다고 한다. 재활용 쓰레기로 분리해서 배출하지만 재활용 쓰레기 수출이 막히면서 전국에 120만 톤이상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보도
나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상담을 강의했다. 그중에는 하루, 몇 달, 또는 몇 년을 학위나 자격증 과정으로 만났다. 목회자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수치심은 상상 이상으로 크고 그 가족과 소속된 교회는 역기능적인 에너지가 많이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의 목적은 그 역기능의 구조에서 순기능의 구조로 바꾸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수치심은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나의 또 다른 내담자그룹인 가정폭력가해자(법원에서 치유프로그램 수강 명령이 내린 치료그룹)나 알코올중독자들의 수치심과 같은 것이었다. 수치심은 거짓 자기를 만들어 내는데 그 역할로 목회자나 봉사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역경과 고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소명을 무시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소명이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합리화이고, 목사라는 직분이 거짓 자기로서 실제의 참 자기가 아닌 그림자 역할만을 한다고 하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목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참과 거짓을 나누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역기능이든 순기능이든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거치며 모든 판단과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게 된다는 것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원고까지는 3번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위의 4번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 4:6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두 사람의 마라아는 누구누구란 말인가? 그 첫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마리아이고 그 다음 둘째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이 섬기는 마리아다. 전자는 진짜이고 후자는 가짜이다. 성경의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했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온통 의아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보충 설명이 따른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리라”(눅1:35) 마리아는 즉각 순종했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8) 성경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단순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다. 그 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호칭됐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에 대해 ‘주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그 어머니’ ‘네 어머니’ 또는 ”내 주의 모친” “그 모친” “예수의 모친”이라고 불리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실은 없다. 성육
전 국민이 코로나19로 대구가 생지옥 같았던 지난해 3월, 직접 트럭에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마스크를 나눠준 영화배우가 있었다. 바로 김보성씨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또 다시 대구로 달려갔던 김보성씨는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난 배우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의리 신드롬’에 빠질 정도였다. ‘의리’ 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즉 인간의 기본 인성 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기본적 인성인 최소한의 의리마저 다 무너진 듯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이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다. 형제국과의 전쟁 요단강 동쪽 나라 암몬은 요단강 서쪽 해안가의 블레셋과는 달리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 세웠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웠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23:7)고 했고,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신2:19)고 했다. 서로 미워 하거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형제가 어릴 때는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마지노선은 1934년 프랑스가 독일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要塞地)으로 근대 축성(築城)의 획기적인 축성인데 전쟁 중 독일 공군에 의해 파괴됐다. 독일군이 이 마지 노선만 넘으면 프랑스에 큰 타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노선은 넘어서는 안 될 절대경계선이다. 이것을 빗대어 우리 생활에도 마지노선을 넘었으니 어쩌니 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나? 그 선은 지켜야 할 생명선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마지노선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마지노선을 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마지노선을 범한 것이다. 일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일찍이 마지노선을 범했다. 마지노선 이전에 있어 야할 그가 그만 선을 넘었다. 그게 타락이요 범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 니라”(창 2:17) 이게 하나님의 마지 노선이다. 그런데 여자가 범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마지노선을 범한 후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