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님이시네요.” “뉘신가요?” “여기 중구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회장님의 지금 연세는 어떻게 되셨어요?” “남의 나이는 알아 뭐하려고 물어?” “매우 건강하게 보여서 물었지요.” “올해 일흔넷이 되었네.” 이때 롯데호텔 로비 이곳저곳에서 비서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5~6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나를 붙잡아 일으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정회장을 모시고 승강기로 갔다. 복음전도도 못하고 어떨결에 갖고 있던 전도지마저 주지 못했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크고 작거나 검고 옅은 색깔의 검버섯 열 개 정도의 정 회장 얼굴이 가끔 떠오르는 것은 30초 가까운 구령의 기회를 놓친 나의 잘못을 후회하고 또 천국에서 그 싱긋이 웃으시던 정주영씨를 다시 만나지 못할 때의 나의 뉘우침이랴! 올해 내 나이 84세가 되니 옛날 만나서 전도를 못한 정회장이 별세하셨다고 전해 들은 그 나이가 됐구나! ‘오늘은 구정 설 명절이니 가족들과 시간 보내며 쉬어보자’하고 비스듬히 침대에 눕는데 10여년전에 쓴 ‘기적을 믿는가’라는 제목의 책 결론 부분에서 게으르고 가련한 미국 산골 농부가 “아예 편히 놀아요(Just play'd it safe!)”라는 해학적 얘기가 떠올랐다. 무너진 오
나무교회는 몇 그루 나무들이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하늘을 치솟고 있는 모습의 교회다. 그 교회에는 유명한 재벌이 있어 헌금도 놀랄만큼하고 또 기도대장이 있어 기도 왕이란 칭호를 지닌 권사도 있고 해마다 선교여행을 떠나는 선교대왕 장로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연합체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자기의 위치와 임무가 다른 이와는 별개의 특별한 것이라고 자만한다. 수많은 달란트(Talent) 수재들이 모였건만 제각기 흔들리고 또 쓰러진다. 나무교회는 나무개개의 교회다. 이쯤 설명하면 숲교회의 모습은 알만할 것이다. 숲교회의 특징은 각양각생의 나무들의 연합 그리고 동등체력 무리를 이루었나니 그것을 우리는 숲이라 한다. 숲은 나무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자기의 나무됨을 잃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결국은 하나의 나무나 또는 그냥 나무들의 복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멋진 숲을 이룬다. 숲에 관한 어떤 시인의 명시가 생각난다. 숲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라고 바울 사도는 질책했다. 사울 왕이나 엘리 제사장의 최후 그리고 가료 유다의 종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려고 힘썼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다(민12:3). 그러나 그는 므리바 물가에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쳐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20:10~12, 시106:33, 신32:51).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서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미20:8)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민20:10)고 말하면서 반석을 두 번 두드렸다. 우리는 무슨 능력이 있어 기적을 일으키겠는가? 하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이름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에 능력이 있거늘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의 존전에 그림자를 드리우겠는가? 한때 하나님의 권능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어야 할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있으나마나 그저 그런 사람이고,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반드시 꼭 있어 줘야만 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반드시 있어 주어야만 할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공익적(公益的) 사람이다. 나라를 위안 애국자와 여러 사람을 위한 의료문화 발전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신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반드시 계셔 주셔야 만할 구세주시다. 예수는 인류를 위한 공인(公人)이시다.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 부활 승천 승귀 재림은 온 인류의 소망 아이템들이다. 두 번째 있으나 마나한 사람은 무해무익(無害無益) 인물이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간 사인(私人)이요 공인(公人)은 못된다. 그래도 이런 사람을 그냥 두고 보는 이유는 적어도 타인에게 해는 끼치지 아니했다는 정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은 거미 인생이다. 거미는 자기 입으로 그물을 쳐놓고 먹이 사냥하면서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곤충이다. 처음에 언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야기다. 살아 있어서 백해무익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
나의 20대 청소년시절은 키에르케고르(1813~1855) 실존주의 철학에 매료됐다. 그래서 김형석 연세대 철학교수의 강연과 저서를 좋아했다. 20대 중반나이에 점촌에서 처녀목회를 시작했을 때 숙명여대 철학교수이며 학생처장을 역임하고 침례교단의 목사로 계셨던 고 차광석 철학박사를 초청해 집회도 가졌다. 차광석 교수의 철학적 신학강의는 거의 환상적이었다. 나는 청소년시절에 철학의 동산에서 즐기는 기쁨을 가졌다. 그런데 철학을 즐기면서도 일찍 본교단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의 복음사상이 나의 체질이 돼있었다. 그리스도인 강연자와 설교자는 너무나 가까워보이면서도 너무나 먼 자리가 있음을 정리하기에 지금 이르렀다. 그것은 김형석 교수의 글에서 발견케 됐다. 이 어른의 글은 나무랄데 없는 단순 간결용 문체라서 누구나 받아들이기에 쉽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글이 내 마음에 와 닿질 않아서 늘 아쉽고 답답하고 우울해 했다. 어째서 그런건가. “먼저 소수는 강연 내용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정치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는 사람들과 종교적 선입견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스님들 중 많은 사람이 내 책의 독자이고 신부님들 중에서도 성당의 강사로 나를 초청하는 경우가
구주성탄의 축복을 안고 묵은 해를 울려보낸 후 대망의 2020년인 특별한 한 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과 충만으로 맡은 사역과 복음전도에 30배, 60배, 100배로 충성하고 놀라운 열매를 맺도록 침례신문사와 애독자들에게 놀라운 기적의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원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하반절)고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으로 들은 아시아 일곱교회중 두 번째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메시지 중에 결론의 말씀이었다. 한남대학교에서 문창권 교목에게 성경공부와 신대원에 들어와서 위락스 선교사에게 요한계시록을 배울 때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썩지 않을 면류관에서 금면류관, 의의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보다 첫째인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서머나교회는 환란과 핍박으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A.D. 313년까지의 교회를 말한다고 배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신대로 10일간 간절히 기도한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이은하 노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희미한 기억속에서도/ 그리움은 남는 것/나는 너를 사랑하네/ 아직도 너 하나 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언제 언제까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나는 너를 사랑하네/ 아직도 너 하나 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언제 언제까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옛 애인이자 첫 애인을 못 잊어 평생 홀로 사는 남녀누구라면 의당 위의 노랫말은 백번 읊어도 좋고 좋은 가사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노랫말을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남녀 그 누군가가 계속 읊조린다면 단연코 잘못된 행세일 것이다. 지금 자기 짝이 엄연히 있는데도 옛날의 이루지 못한 짝 생각을 지닌다면 지금의 짝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그대는 내 사랑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짝이 있는 그 누구든 남녀가 “아직도 너 하나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하면 못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부정(不淨)
한 사람이 빌려온 도끼머리가 물에 빠졌을 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도끼를 떠오르게 했다. (왕하6:5~7). 홀톤 박사(Dr. Holton)의 설교에 대학교 2학년을 넘는 시기의 나에게 기적에 대한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작은 의심의 불씨는 퍼져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지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바다 위를 걸어오심 등의 기적, 성령강림으로 사도행전의 기적 역사를 무조건 받아 믿은 나에게 성경 속의 기적을 믿지 못하게 되던 차에 하루는 선명한 꿈을 꿨다. 하늘로서 흰 보자기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보자기가 내려와 내 앞에 각양각색의 꿈틀거리는 그림들은 싸버리고 사라지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모든 성경의 의심은 사라지고 신학교에 입학해 1964년 3월 8일 도안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기적(奇蹟, Miracle) 또는 이적(異蹟)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거나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 종교적으로 신의 능력이 일어나며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기적, 이적, 표적, 기사와 같은 말은 많은 종류의 현상들을 포함한다. 기적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분명히 하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판”은 주로 난장판 할 때 쓰는 접미어이다. 모든 행사에 “판”이란 말이 붙지만 좀 난잡스럽고 소란스러운 행사에 “판”이란 접미어가 잘 붙는다. 싸움한판, 씨름한판, 윷놀이한판, 시장판 할 때 그 속에는 경쟁심과 투쟁심이 발동한다. “판”이라하면 좀 어지럽고 안정감이 없는 뉘앙스를 풍긴다. “폭”은 “판”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말해준다. 그림 한 “폭” 치마 “폭” “폭신폭신” “폭신하다”(be soft cushionary) 할 때의 “폭”이란 말은 안정감과 정서가 고요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엄마 품에 폭신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이 예쁘다. “판”과 “폭”에 대한 한국 고유적 언어 개념을 내가 정확하게 구별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단지 언어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원색적으로 말해본 것이다. 나는 어느 날 30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 주일예배에 참여했었다. 두 시간의 예배시간 중 고요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관한 예배였다. 장고, 징, 드럼 이름 모를 악기가 연주되고 고성으로 불러 재끼는 찬송가는 차라리 소음 같았다. 입당하는 순간 조용히 기도할 틈도 없다. 솥에 넣는 콩을 볶듯 박죽으로 돌려대는 데에는 그냥 견딜 콩알 낱알은 하나도 없었다. 설교단에
초등학교 4학년때 외사촌 전근술이 전해준 공자와 석가의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다음에 갖다 준 만화책을 읽었는데 예수 아기가 마리아 처녀에게서 탄생한 것과 십자가에 옷을 벗긴 채 죽은 예수가 어찌 3일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풍랑치는 바다 위를 걸어갔는가? 그 외의 많은 기적도 어린 나이에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지합과 부정모혈로 임신하고 출생하는데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한 사건은 생물학적 또는 신학적인 문제는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죄 없으신 구세주로 성육신(Incarnation)하셔야만 됐다. 이상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그의 제2의 창조인 인류 구속을 위해서, 그 자신이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오셨다는 경이롭고도 전무후무한 사건의 성격을 인정할 때, 그 방법으로서의 처녀 탄생은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당연한 것을 느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라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셨다.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