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회(오늘의 총회) 풍경 매년 개최되는 대화회는 교단의 큰 행사였다. 전도인 직분을 받은 교인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도활동에 대한 체험담을 듣게 되고 또한 세워진 교회들에 대해서도 서로 간증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대화회는 지금의 정기총회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화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더구나 대화회 기간에는 사경회도 함께 실시함으로 인해 모든 참석자들이 교회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며칠 동안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임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아름다운 친목의 시간도 됐으며, 개회 예배시 성만찬 예배를 드릴 때는 거룩하고 엄숙하며 감사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많았다. 임원선거를 통해 새로운 임원들을 선출했는데 정말 모든 참가자들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임원을 선출했다. 이때는 임원이 되는 것은 일제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만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었으므로 임원에 선출된 직분자들은 숙연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이덕여 목사의 인품 매년 한차례씩 개최되는 대화회(총회)에는 전도인 이상이면 모두 참석하는 교단의 큰 행사였는데 이덕
1938년까지 예산과 당진 그리고 천안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 그 해 9월 원산에서 열린 대화회에서 감노(監老) 직분을 받았다. 교회로 돌아온 이 감노는 구역 내의 모든 교회를 돌며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교인들은 이 감노의 말에 순종하여 열심히 전도했다. 이러한 전도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로 들어왔다. 전도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농기구를 앞세우고 달려들면 빨리 피해야만 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유대인들에게 쫓겨 데살로니가로 도망을 갔지만 그곳에서도 꿋꿋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이 감노가 이끄는 전도대들은 쫓겨나는 일도 많았고, 두들겨 맞을 때도 많았지만 그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세운 교회들이기에 더없이 보람이 넘치고 감사가 넘쳤으며, 전도대원들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전도대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국에 흩어진 교회에 다니며 간증을 함으로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전도에 힘을 얻고, 열심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됐다. 1942년 9월 4일 일제 탄압으
이덕여 성도는 역대에 부임한 교역자들을 잘 섬겨 끝까지 교회의 부흥과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930년 10월에 이덕근 전도인은 통장 직분을 받고, 예산 구역에서 사무를 관장하였다. 제11대 노재천 목사가 1930년 9월에 사임을 하게 되자 다음 달인 10월에 제 12대 광시교회 교역자로 부임하게 됐다. 이미 사역을 하고 있었던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로 사역하게 된 이덕여 통장은 1934년 9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길 12)에 자력으로 목조예배당 14평을 건축했다. 194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예배당은 폐쇄를 당했다. 일제가 패망해 조국이 해방되자 다시 1949년 10월, 현 소재지(2018년 7월 현재) 교육관 위치에 목조 14평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1950년 12월 이덕여 전도사가 예산 구역 통장 직을 사임하고 전주 덕성교회로 부임했다. 108년 교회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성장, 부흥하는 광시교회 광시교회는 제13대 유철주 전도사, 제14대 박경배 전도사, 제15대 이태진 집사, 제16대 이덕흥 목사, 제17대 방효태 전도사, 제18대 우제창 목사, 제19대 전석일 목사, 제20대 김상학 목사, 제21대
출생과 성장 그리고 신앙 이덕여(李德汝) 목사는 1899년 9월 7일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116번지에서 부친 이정회(개국開國466년<1857년> 4월 8일~대정12년<1923년> 8월 25일)와 모친 김정봉의 장남 이덕근(李德根)으로 태어났다. 본명인 이덕근 보다 이덕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덕근의 품성이 덕德을 베푸는 분으로 여겨져서 교단에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덕근이라는 이름보다는 이덕여 목사로 부르게 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공부했으며, 부모는 그가 한학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1912년부터 7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한문 공부를 끝내기 일 년 전인 1910년 마을을 방문한 전도인인 이후로 전도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다. 그때가 1910년 6월이었다. 이덕근은 이후로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1910년 6월에 전 가족이 동시에 믿기로 작정한 후 이 전도사의 자택에서 처음 모여 예배를 드리고 광시교회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 계속 이 전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도에 충
신학교 학부도 졸업하기 전에 담임 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33년의 세월에 접어들었다. 한 가지 일에 30년의 세월을 걸어왔으면 달인이 되든가 프로가 됐어야 할 텐데 아직도 목회는 여전히 미숙하고 설교는 날이 갈수록 힘이 든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 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써달라고 했다지만 나 역시 어영부영 하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을 한 참 지나서 내리막 언덕 에 와 있다. 젊은 날에는 야심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참 많았다. 때론 나침판을 잊어버려 방향을 놓치고 헤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께는 잠간 쉬시라고 하고 나 혼자 나서서 무얼 해 보려다 실수도 했다. 목회 30년 동안 마당만한 터 위에 원두막 같은 예배당 건물을 짓고 수년 동안 빚 갚느라 헤매다가 몇 해 전 다시 손바닥만 한 주차장 하나 사놓고 또 다시 빚 갚느라고 허덕이고 있다. 사실 나의 목회 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강원도 산촌 두메산골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이 여러 분 계셨다. 그 중에 어떤 부모님들은 아들 이 군대를 가면 편지를 읽어드리는 일. 답장을 써 보내는 일을 어린 내게 시키시곤 했다. 아예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가장 각광 받는 사람은 웅변가였습니다. 이 웅변가들은 대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이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민회나 심지어 엄숙한 법정에서까지 이 웅변가들은 유창한 웅변술로 광장에 모여 열광하는 군중들을 설득시키기도 하고, 통치자들의 국정의 중차대한 정책을 전달하기도 하고, 법정에서의 첨예한 송사를 유리하게 판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 웅변술은 출세의 필수적인 요건과 지름길로 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웅변가들은 대부분 아테네를 중심으로 종교처럼 널리 확산됐는데 이 웅변술의 이론과 체계를 정립한 화법연구가 바로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섬에서부터 시작된 수사학(修辭學)입니다. 이 웅변과 수사학은 그 시대 고등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채택되어 세속적인 출세의 야망을 가진 귀족들과 상류층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유아기부터 이 수사학과 웅변술을 가르치려고 앞 다투어 수사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웅변과 수사학에 대한 시대적이며 사회적 열정의 열매로 후에 플라톤의 서정적 대화인 “향연”이나, 이론철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고전문학이 세상에 존재하
신사도 논쟁을 벌이는 분들과 건강한 기도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에 대한 구분과 이해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어려서부터 제자훈련과 양육을 받으며 침례교신학을 하기까지 침례교 신앙을 배경으로 자라온 저는 복음주의의 한계를 고민하게 되면서, 내 신앙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의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2년 더콜 운동을 시작으로 소위 신사도 운동이라는 모임과 만났고 10년이 넘게 이 운동에 리더로 투신하며 이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신학적, 신앙적 갈등 끝에 그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십자가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자로서 책임이 있어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 먼저 은사 종지론이나 은사 중단론을 믿는 분들은 이 논쟁에 참여할 조건과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아예 다른 신학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지켜나갈 성숙의 요구와 과제가 주어졌다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분열이… 주님의 몸을 찢음이… 다름과 틀림의 경계를 벗어난, 아집과 교만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나와 ‘다름’이 다
30년 전 내가 군목으로 사역하던 부대는 1개 대대가 대략 6개월씩 교대하면서 인천 해안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여러 부두와 해안을 따라 아홉 개의 소초와 3개의 중대본부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 부대 병사들 주일예배를 인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신자인 병사들은 지휘관의 재량으로 소초 근처 민간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맡은 대대로 부대가 교체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이 내게 이런 요청을 했다. 병사들이 주일마다 부대를 떠나 자기들끼리 민간인 교회를 오고가는 것이 지휘관으로서 너무 부담이 되니 나보고 와서 예배를 인도해달라는 것이었다. 항구 여러 부두에 흩어져 있는 소초의 신자들을 자기가 주일마다 차를 보내서 한 곳으로 모아줄 테니 수고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때 나는 이미 주일 아침 9시 부평에 있는 부대에서 첫 예배를 드리면 부천, 김포공항, 송도를 거쳐 다시 부평으로 100km가 넘는 길을 돌며 저녁때까지 하루 다섯 번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대대장이 부탁을 하는데다가 병사들을 모아준다는 중대본부는 내 이동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시간도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그러마고 했다. 주
인간이 한 평생 세상을 산다는 삶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그 일생의 삶에서 겪는 희노애락과, 형통과 불통, 행복과 불행의 사연들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의 한 평생에 겪고 누리는 모든 삶이 나에게 남기는 보람과 소망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생동안의 삶과 그 삶을 담아내는 동안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나님과 함께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데 대한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을 신앙으로 산 삶에 대한 보람으로 여겨야 하는가? 옛날 어릴 때 이발소나 식당, 사람들이 붐비는 버스 대합실, 그리고 웬만한 가정 현관 등에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림을 배경으로 제작된 액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시가 생각난다. 바로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글귀다. 이 유명한 시인의 풀 네임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이 유명한 시의 주인공 푸시킨은 러시아에서도 뼈대
종교인 소득 과세가 시행된 지 3개월이 지났다. 사전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안이 확정된 관계로 교회 안팎에서 행정적인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민법과 소득세법 관련 법안 정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내 정관제정 및 개정이 가장 시급한 일로 부각되고 있다. 정부가 소득세법 시행령에 교회의 최고 의결기구 즉 교인총회(공동의회)에서 제정된 교회정관(교회자치규정)에 목회활동비에 대한 지급기준 등의 규정이 있으면 비과세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정관 제·개정의 목적과 취지는 물론 어떤 절차에 의해 제·개정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채 종교인과세에 따른 비과세 혜택을 받고자 하는 세금문제 중심으로 정관을 제·개정 하려고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분위기여서 이에 따른 법적문제가 심각하게 우려된다. 문제는 이와 같이 효력 없는 임의적 정관 때문에 한국 교회가 심각한 분쟁을 겪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등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관을 민법이나 소득세법보다 우선한 교회 운영 취지에 맞게 적법한 절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