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가 있다.조종하는 사람이 줄을 당겨서 끌어올리면 손을 번쩍 치켜들고, 줄을 늘어뜨리면 어깨가 축 늘어뜨려진다.이쪽 손 저쪽 손 왼발 오른발…. 구경하는 주변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뛸 듯이 좋아하기도 하고 머리를 숙이고 걷기도 하고 서기도 한다. 그의 존재 의미는 무대 위에서 뿐이다. 남들에 의해서 추켜세워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환호와 탄식을 쏟아내곤 한다. 그를 조종하는 것은 인기라는 끈, 돈이라는 끈, 권력이라는…. 이런 환경과 상황 학벌 계급장의 끈들에 의해서 웃고 울고 걷고 뛰고 거수기가 된다면, 슬픈 꼭두각시가 아닐까?이런 모습은 어디 세상사뿐이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삶은 어떨까? 목회자에게 교인 수, 교회당 건물 평수, 헌금액수가 우쭐하게 하거나 혹은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교인 중에 힘 있고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고급 승용차를 굴리고, 법인카드를 맘대로 긁어대고, 미자립교회나 선교사들에게 얼마간 선교비를 보내는 것으로 목이 굳어지고 자부심을 가진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일까? 또 교인 수가 적다는 이유로 지방회 안에서도 할 말을
TV를 보면서 긴장을 푼다? TV를 보면서 긴장을 느낄 수는 있어도 긴장이 풀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래 시청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에너지는 관심을 한 곳으로 모으거나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다시 충전되는 법이다.TV를 보고 있으면 주의력이 먼 곳으로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그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그러니 정신 에너지가 흩어져 정신이 산만해지고 집중력도 약해진다. 살기도 바쁜데 인생의 의미는 무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이런 질문들을 우리는 “나중”으로 미룬다. 이 것은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무조건 길을 떠난 여행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다 인생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정신이 번쩍든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든다. ‘나는 왜 살고 있을까?’ 죽을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퇴직을 하고 나서야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요즘 세상에 누가 도덕적 가치를 따져? 우리의 가치관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관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긍정적 사고가 상황을 악화시킨다? 긍정적
키즈 파워 인 지저스는 성경의 질기고 딱딱한 부분을 다지고, 매콤한 부분에 달콤한 소스를 가미하고 아이들의 입 크기에 맞게 정당히 나누어 놓아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잘 섭취하도록 돕는데 있습니다. 더 이상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말씀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도록 그들의 눈높이와 입맛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교육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3) 가르치는 교사를 위한 도구지원열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의 인생의 시기를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고르고 기초공사를 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인생 기초공사를 말씀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땅을 파더라도 맨손으로 팔 수는 없습니다. 좋은 삽을 더 나아가서는 포크레인을 제공해야 땅을 원하는 만큼 파고 든든히 기초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그 기초를 마무리 하는 데에 교회학교의 교사가 도와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학교의 교사는 무엇으로 도울 수 있습니까? 교회학교의 교사로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이와 균형이 잡힌, 손에 잡히고 익숙한 교육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열악하고 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를 지은 저자 다하라 요네꼬는 일본의 여성으로서 18세 소녀 때 열차에 뛰어 들어 자살을 기도하다 두 다리와 한 팔을 잃고 남은 한 손도 손가락이 셋만 남게 되었다. 그 후 주님 안에서 새 삶을 얻었고 사고 후 34년이 지난 지금 52세로 두 자녀를 두고 목사의 아내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나에게 남겨진 손가락! 오른손에 남은 세 개의 손가락으로 처음으로 한 개의 감자 껍질을 벗기려고 했을 때의 일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기분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데구르르 굴러가는가 하면 바닥에 떨어져서 멋대로 굴러가는 감자를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식칼을 들고 쫓아다니는 나의 마음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초조감과 무서운 힘으로 덮쳐오는 절망감이 있을 뿐이었다.그런 일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손에 들고 있던 식칼로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처절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손가락 세개로 식칼을 든 채,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처량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간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부르짖었다.‘아버지여! 당신은 나 같은 인생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것을 결혼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
새해가 되어 호스피스 센터에 초청받아 예배를 인도했다. 좀 특이한 예배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각각 병실에 있고 목사는 병실 밖에서 마이크 앞에서 설교한다. 병실에 설치된 스피커로 병상에서 환우들이 설교를 듣는다. 예배 후 병실을 돌아보며 기도를 해 드린다. 대부분이 임종을 바로 앞에 둔 환우들이다. 나이에 관계가 없다. 49살의 젊은 나이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입종을 앞둔 남자 환자의 “내가 인생을 잘못 살긴 잘못 살았는가봅니다.” 라는 고백은 차라리 나에게 절규로 들린다. 그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임종을 예견한 듯 이혼한 처와 딸, 형제를 보고자 며칠 동안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관계자에게 듣게 됐다. 지난날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모아 압축을 하면 두 개의 단어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감사” 또 하나는 “후회”라는 단어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한 일들, 측량할 수 없는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이면에는 후회할 일들이 더 많으니, 그러면서 또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대개의 환우들은 임종이 가까우면 지내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보편적으로 다음의 3가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의 한 목동에서 장군으로, 장군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40년을 다스린 다윗의 인생, 다윗은 가장 최악의 상황, 가장 복잡하고 힘든상황 속에서도 최상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의지한 사람이다.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실로 “아름다운 노을”로 물들였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뭔가를 앗아가시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훨씬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신다. 어렵고 힘든, 상황과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더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 절실히 의지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을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영혼은 더욱 커지고 아름다워 진다.우리는 다윗의 인생에서 바로 그것을 배운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권을 굳게 지켜 주셨고, 다윗은 이제 그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대상 18~29장을 보면 다윗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엄청난 프로젝트를 브리핑한다.바로 자신이 죽은 뒤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없으니 아들 솔로몬이 이 일을 시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이 기초 작업을 다 하고 죽으려는 것이다. 이미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자재들을 수십 년에걸쳐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1:25)“율법은 멍에”다 사람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닌 억압과 속박과 굴레다. 율법이 제공하는 자유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율법인 자유의 법과 비교할 때 그러하고 율법의 끝을 볼 때 심판과 저주와 형벌뿐인 결과를 생각 할 때 그러하다.(골2:14~15, 갈3:13)율법에는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므로 속죄와 희생의 피가 필요하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는 듣고 잊어버림이 아니라 실행 하게하는 법이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하고 깨끗한 경건이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피와 생명을 희생시키셨음을 자신의 은혜(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된 새 계명이요 자유의 율법인 것이다(히8:10, 10:16, 렘31:33). 옛 계명이 돌과 양피지에 기록되었다면 몰랐었다고 회피 할 수 있었겠으나 새 계명은 심비에 기록됐으니 핑계할 수 없다. 즉 어떤 면으로는 더욱 엄격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의 최고한 법“은 긍휼(사랑)을 행하는 법이다.(약2:8) 긍휼은 심판을 이기
3. 확대된 교사 네트워크주일학교 교사들의 네트워크를 넘어서는 확대된 교사 네트워크는 교사의 네트워크에 시너지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확대된 교사 네트워크란 교회학교 교사들의 범위를 확대한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확대된 교사란 교회학교 교사와 함께 사역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학생과 부모 그리고 담당 사역자를 포함한다. 확대된 교사 네트워크의 구조를 블랙(Black)은 청소년부의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청소년부서가 아닌 경우는 각 부서에 맞게 변형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학교의 교사와도 네트워클 제안하고 싶다.이런 모델의 사역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로 교사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학생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만나는 교사와 학생은 만나는 시간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교회에서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매주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만나고 특별행사나 수련회 기간 동안 며칠 마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닌가? 그렇게 만나서는 학생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학생의 신앙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서로 피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도 없다.
남을 배려하고 언행을 조심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치졸한 잘못이나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좋은 사람도 화를 낸다. 상사가 실적을 가로채거나 룸메이트가 설거지를 전부 떠맡기거나, 파티에 간 남편이 한 눈을 파는 등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좋은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허나 이웃에게 화를 내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사생활을 위협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직장생활과 건강까지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화는 꾹 참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속을 긁는 이웃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우선 화를 내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점부터 이해해야 한다.화를 내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착해야 한다는 선입견으로 분노를 보는 탓에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렇다고 분노를 억누르면 안 되는 것일까? 그건 위선자로 몰릴수도 있고, 증오가 싹트며, 복수심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답게 화를
죽어도 좋을 만큼 가슴 뛰게 하는 그 곳, 오랜만에 가도 시간의 거리를 금새 뛰어넘는 곳, 그 곳에서의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서 빙그레 미소 짓게 하고,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며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그 곳, 또는 가 볼 수 없어 꿈속에서만 상상의 나래에서만 들여다보는 그 곳,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꼭 가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그 곳,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가보고 싶은 곳 그곳을 일컫는 말이 ‘soul place(영혼의 안식처)’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 단어이고, 두렵기도 하고, 가장 기대가 되는, 설렘이 동반되는 단어이다. 나에게 ‘soul place’는 27년을 살던 나의 고향집과, 아내와 같이 갔고 지금도 가곤 하는 그 은밀한 곳 그리고 은혜로 들어갈 담대함을 얻은 아버지의 집이 생각난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지난해와는 다르게 살아보리라고 마음먹고 야심차게 하는 새해액션 중의 하나가 다이어리 정리였다. 가족의 생일은 안 적어도 친구들의 생일을 옮겨 적으면서 동그라미 해놓기도 하고, 하루에 할 일을 나름 알차게 적어놓고 보기만 해도 흐뭇해 하다가 작심삼일로 끝났던, 그러면서도 꼭 옮겨 적은 것 중에 ‘어른이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의 목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