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이 그렇게도 외치고 기다리던 세월호가 3년의 숨었던 시간을 이기듯 바다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진도 해변을 떠나 목포 신항 부둣가로 옮겨졌다. 목포역을 향해 지나다 보면 덩그러니 엉덩이만 내밀고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눈물과 통곡을 주고도 “몰라요” “생각 안나요” 요사이 유행어처럼 나오는 말을 하는 듯 누워있다. 그 모습을 보려고 수 많은 인파가 모여 들고 있다. 차창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도 괘씸하고 분통이 터져 쫓아가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다. 직접적인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과 함께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진도 안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가지고 지금도 아파하는 가족들이 있다. 늦게 진도 사람이 되어 그 아픔을 다 알 수 없지만, 함께 아파했던 사람들은 진도항(팽목항)에 분향소를 설치해 놓고 정작 배가 올라 왔다는 뉴스를 접하고도 “배 보기도 힘겹다”며 고개를 돌린다. 진도 어디든 필요한 곳이면 마을 회관이나 공공장소를 이용해 숙박을 하도록 배려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었다. 온 힘으로 봉사하고 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은 모르지만 사고 후부터 바닷가 양식 수확이
남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과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당시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외적들의 침략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했다. 특히 이사야는 외부로부터 오는 징계 외에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징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야 29장에 기록된 ‘봉한 책’과 ‘사람의 계명’은 패역한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내적인 징계의 기이한 방식이었다(사29:14). ‘사람의 계명’으로 인한 징계는,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이 가려지게 함으로써, 영적인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암흑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탄생 전까지 약 40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이른 바 ‘영적 암흑기’와, 지금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바라보지 못하는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아둔함의 징계 속에 이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고 있다. ‘사람의 계명’은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심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사야 29:13에 기록된 ‘사람의 계명’이 마태복음 15:2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의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말로
“장차 택함받을 자들”과 “장차 믿게 될 자들”도 (비가시적) 교회로 간주한다는 말인데,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예수 믿지 않는 자들, 즉 불신자들이고 교회방문자들이고 교회의 손님들이고, 그래서 전도대상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교회당 안에 들어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에 참여하고 함께 기독교적인 활동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는 회개하고 예수 믿어 영적인 출생(거듭남)을 경험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이 침례교인들의 교회관이다. 4.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 침례교인들은 교회에는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가 있다고 믿는다. 지역교회란 지상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모이는 예수 믿는 신자들의 교제요 공동체를 말한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죄사함받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신자가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받아 들어가는 공동체가 지역교회다. 지역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이다. 중생과 칭의는 예수 믿은 신자가 개인적으로 얻는 것이지만, 성화는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며 서로 격려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지역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너희(신자들)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
그런데 A.D. 400년경에 영국의 가장 초기의 신학자요 평신도로 간주됐던 펠라기우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의 타락함을 목격하고, 그 곳에서 그는 로마의 타락 원인을 어거스틴에 의한 “운명론적 결정론”에 있다고 비판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이 운명론적 결정론이 기독교인들을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고, 인간의 의지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고, 그 의지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는 A.D.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았고 그는 이단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이로써 펠라기우스주의는 곧 이단으로 통용됐고 기독교 역사에서 그 오명을 결코 씻지 못했다. 어거스틴과는 달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타락한 인간은 원죄에 매인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고 자연 이성의 빛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자질을 선물로 인간 영혼에 주입(inject)시킨다고 주장했
침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그리고 신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가장 잘 상징해 주는 침수례의 방식으로 뱁티즘을 베푼다. 만약 미래의 어느 날 재림하신 예수님이 한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세례와 세례를 보신다면 의아해 하지 않으시겠는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뱁티즘의 방식을 보시고 신기해 하지 않으실까? 침례교인들은 주의 만찬도 상징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자의 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의 떡과 잔이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루터교회에서는 “공재설의 입장에서 떡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임재해 있다고 믿는다. 개혁교회(장로교회)에서는 ”영적 임재설“의 입장에서 실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해 계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한 떡과 포도주는 거룩해져 있다고 생각해서 주의 만찬을 거룩할 성(聖) 자를 써서 성만찬이라고 부른다. 성만찬 후 남은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
지난 목요일, 이른 아침부터 일산으로 달려가 교우의 장례예배를 인도하고 내려오던 중, 부목사님의 운전에 의지해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문득 생각나는 이름 하나가 있어 얼른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열 번의 신호가 울리도록 받질 않아 그만 끊으려는데, “네~”하며 아주 힘없고 작은 목소리가 먼 곳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나 역시 조심스럽게 “여보세요? 000집사님. 김종훈 목사입니다”라고 했더니 그제야 기운을 차리시고 좀 더 친근한 목소리로 “아, 담임목사님이세요?”라고 응해주셨다. 그러시면서 그때부터 봇물 터지듯 당신의 마음이 요즘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내게 막 쏟아 붓기 시작하셨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맘 잡을 데 없었던 동생들을 누나로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돌봐왔는데, 올해 들어 그 남동생들을 둘씩이나 졸지에 병으로 잃고 하늘나라에 보내야만 했던 것에 대한 아픔이었다. 물론 나도 그 소식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지금까지도 아픔이 심하실 줄은 솔직히 몰랐었다. 게다가 그 둘을 위해 누나로서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셨단다. 잘 살게 해달라고….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둘을 다 데려가셨느냐”는 원망이 너무나 크셨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교회를 “(예정받고) 택함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데, 문제는 “누가 예정받고 택함받은 자인가”하는 점이다. 에베소서 1:3~7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곤 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어린 자녀들도 예정받고 택함받은 자들로 간주해 그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고, 일정한 연령에 이르렀을 때 입교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로 영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유아세례나 입교라는 말이 사용된 적이 없다. 개혁교회에서는 심지어 “장차 믿게 될 자들”도 예정받고 택함받은 자들로 여겨서 교회로 간주하기도 한다. 필자는 “한국크리스천신문”(제114호, 2015. 10. 29.)에 어느 칼빈주의자 논설위원장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Q&A 란에서 어떤 성도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가는데, 교회란 무엇인가요?” 논설위원장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는 ‘창세 전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기로 작정된 모든
갈라디아서의 기독론적 구원론에서 중요한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믿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됐다. 그 중에서 믿음(faith)과 신실(충성, faithfulness)이라는 두 개념은 아주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3장 22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믿음을 주어적 속격으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전통적인 방법대로 목적격 속격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할 것인지가 국내외 신약학 연구의 뜨거운 감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현재 듀크 대학의 헤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The Faith of Jesus Christ)이란 책에서 전통적인 다수설과 달리 목적어적설을 강력히 주장함으로 논쟁의 방향을 바꿔 버렸다. 헤이스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더 낫고 만족스러운 의미를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한 칭의를 주장함으로써 칭의론을 새로운 각도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칭의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신자의 ‘믿는 행위’가
성경 66권 가운데서 요나서만큼 영감성을 의심 받은 책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구 학자들 가운데는 요나서의 물고기 이야기를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해야 요나서 속에 든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지(kerygma)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성경은 창세기 첫 행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행까지 모든 내용이 직 간접적인 초자연적 역사(役事)로 점철된 책인데 굳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논리가 이상하다. 성경은 과학적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수용하는 책이므로 선택적으로 어떤 부분은 믿고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할 수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성령 잉태와 부활 승천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물론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66권의 책 중에서 한 권이라도 믿지 못하면 전체를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요나는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인 B.C. 800~750년경에 아모스와 동시대에 활약한 예언자이다. 여로보암2세(793~753)는 통치 초기에 앗수르와 시리아의 세력이 위축된 틈을 타
루터(M. Luther,1483-1546)와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은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선봉 주자들이다. 종교개혁은, 천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정권을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해 온 로마가톨릭교회와 맞서는 거사인 만큼 조직화 된 지지 세력 형성이 필요한 운동이었다. 16세기 초에는, 알다시피, 스위스 중심의 쯔빙글리(Urlich Zwingli,1484-1531)와 칼뱅(John Calvin,1509-1564)의 개혁교회와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와 멜랑히톤의 개혁세력이 양대 산맥을 이뤘다.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헤세 주의 제후 필립(Philip of Hesse)은 개혁 세력 간의 연대를 목적으로 1529년에 루터와 쯔빙글리 진영 간에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을 주선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회담은 슈바바흐 조항(Articles of Schwabach) 15개 중 마지막 조항인 성만찬에 합의를 보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 후, 1570년에는 루터파 개혁파 보헤미안형제단이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 “센도밀합의”(Consensus of Sendomir)를 발표했으나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