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도하심을 구합니다…우리는 영적 균형을 잃고, 절대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1996년 1월 23일 미국 캔자스 주 상원 의회 개회식때 기도하신 조 라이트(Joe Wright) 목사의 기도 내용이다. 그는 ‘다원주의’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진리를 타협하는 것과 ‘또 다른 라이프-스타일’이라며 성적 타락을 인정해 주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착취하는 '로또 당첨', 게으름을 보상하는 ‘복지’, 태아를 죽이며 ‘부모의 선택’이라고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것 등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또 권력을 남용하며 ‘정치’라 하고, 공금을 횡령하며 ‘필수경비’라 하는 것, ‘야망’이란 이름으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고, ‘표현의 자유’라는 그럴듯한 말로 경건치 않은 삶과 포르노로 공기를 더럽히는 것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존중받은 가치들을 농락하는 것에 대해 눈물로 기도했다.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사람들은 강퍅해지며 나라가 어지럽다. 이런 때에 우리의 발목을 잡은 코로나19는 진실로 눈물로 매달릴 때가 되었다는 표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인이다. 왕으로 등극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며 조 라이트 목사처럼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돼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 의 법을 버리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
단순히 불신세계의 남성 탈선 문제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혹 어떤 남성이 이래저래 탈선해놓고 늘어지는 변명을 뇌 깔이고 있기에 “그건 아니올시다. 오해하시는군요.”라고 신약 성경이 답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목적은 일부일처제가 하나님 본성의 제도라는 것을 알자고 한 것이다. 구약세계는 하나님 계시의 여명(黎命) 시대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천하를 환하게 비추는 것은 신약세계이다. 그런즉 구약 여명 시대 것을 신약 계명 시대의 그대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구약 계시의 여명시대에 일부다처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구약세 계에서 일부다처제 곧 축첩은 다반사로 있었고 아무런 윤리적 개념도 없었 다.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갈이란 첩을 두었고(창16장) 야곱이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아내로 뒀고(창29, 30장) 사사기 기드온도 그랬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 멜렉이라 하였더라”(삿 8:30~31) 솔로 몬도 부하 장군의 아내들 강제로 취해 왔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신다(8:10~19). 끝없는 사랑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통 큰 양보가 돋보이지만 그 허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이기도 했다. 먼 훗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라고 하신다. 결국 이스라엘의 신정(神政) 정치는 막을 내리고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헤매던 사울 사울의 첫 등장은 좀 예상외다.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가문인 기스의 아들(1~2절), 그렇다면 남쪽을 대표하는 유다 지파도 아니고 북쪽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지파 출신이라 시기와 질투도 별로 없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 등장이 근사할 만도 하건만 아니다. 첫 등장은 ‘헤매는 모습’이다. 베냐민이라는 종족적 배경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준수한 소년’, 이스라엘 중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의 준수함과 그 위풍이 화려해서(9:2,24)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9:20)가 됐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사모하는 자’를 ‘가장 훌륭한 자’라고 번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평생 자녀들 뒷바라지로 살았습니다. 학교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밤낮없이 밭에서, 논에서 해질 때까지 일하면서 80년 넘는 세월을 살며, 저에게는 밭이 학교였고, 호미자루가 연필이었답니다. 그런데 진도군에서 문해학교가 생겨 용기를 내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멋진 책상과 의자가 있는 교실이 좋았고, 내 책, 연필, 공책, 필통으로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재밌기도 했지만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 속상하기도 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이 되어 떳떳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날, 졸업생 대표로 낭독한 한 엄니 학생의 글이다.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 버리기가 쉬운 연세에 있는 분들이 학창시절에 못한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늦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장날 장에 갔다 시간을 맞춰 달려오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병원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날에는 빠질 수 없다며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받아
습관은 여러 번 반복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생긴 버릇이다. 이것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는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으며 좋은 습관은 범사에 유익과 성공이 있게 한다. 반면에 나쁜 습관은 개인의 삶을 피폐케하며 국가적으로는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B.C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패망케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시길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청종치 않는 나라의 백성 들은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정부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하게 패망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의 삶에서 습관이 있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셔서 늘 성경을 읽으셨고(눅4:16) 마을들을 찾아다니시며 전도하셨다(막1:38). 특히 밤이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쉬거나 기도하셨다 (눅22:39).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 기도하기, 복음전하기, 봉사하기 등이 예수님처
손을 의식적으로 불 속에 넣어 화상을 입었다면 생존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며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에 따른 반대 되는 행동이다. 외부 세계에 자연의 법칙이 있듯이, 감정과 사고의 영역에도 자연의 법칙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 세계만큼 내부 혹은 심리적 영역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정서적 본성을 어김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보지 못한다. 내가 화를 낸다면 그 화는 먼저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감정과 생각을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해를 미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화나게 한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화내기에 앞서 먼저 자신 안에서 만들 어진 화를 느끼고 화를 낸 이후의 결과에 후회하게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외부에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내부에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손을 불 속에 넣으면, 자신이 행한 실수를 바로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화를 내거나 증오 같은 격렬한 감정이 표출될 때는 외부의 사건들처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대부분 원인과 결과를 전혀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을 자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에벤에셀의 영웅 사무엘도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된다. 너무 빨리 늙었다. 어머니 한나에 의해 잉태됐다는 것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분량에 비해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분량이 너무 짧다. 미스바 집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했다는 말씀을 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준비한다. 물론 이후에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사역은 여기가 끝이다. 앞으로는 사울과 다윗으로의 왕정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무엘의 사명(使命)이다. 왕을 세우고 왕정의 기초를 닦는 일 외에 다른 인생 이야기는 없다. 왕 세우는 일도 사무엘 입장에서는 기쁨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백성들의 요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런 게 사명이다. 사명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고, 싫어도 하는 것, 사무엘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성했고, 위대한 다윗 왕조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년의 사역이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였던 “왕을 세워 달라”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대로 할 때가 더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불태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수많은 짐승이 죽었고 이런 제사를 끝도 없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장도 백성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드리며 제사를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를 계속 드리며 지쳐 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를 끝내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속죄’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