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1~2절에는 시종들 앞에서 체면을 가리지 않고 방성대곡하는 요셉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도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에트 콜로 삐브키). 왜 요셉은 그렇게 울었습니까? 지나날 형들에게 당했던 기억에 억울해서도 아니고 과거를 회상하며 서러워서 운 것도 아닙니다. 식량을 구하러 온 자기 형들이 자기가 요셉인줄은 상상도 못하고 자기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 때문에 감사와 용서하는 마음이 같이 어우러져 울었던 것입니다. 대암학자로 잘 알려진 이병욱 박사는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항암제”라고 하면서 눈물 예찬론을 펼쳤습니다. 미국의 생화학자 빌 프레이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 속에서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다량 분비가 되는데 몸을 해롭게 하는 독소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나 용서나 사랑 등의 감정을 담아 진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 몸 안에 나쁜 물질이 빠져 나감으로 독소가 제거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리내어 운다면 아마도 웬만한 병들은 다 고침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베냐민을 자기 곁에다 두고 싶어서 방법을 고안했는데 여기에 형들이 모르고 당했습니
기원과 목적 프리메이슨은 free(자유)+mason(석공)의 합성어로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위스에서 조직된 석공 기술자들의 조합, 즉 ‘길드(gild)’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체는 회원들끼리만 기술을 공유하고 조합회원 밖에 사람들에게는 폐쇄적이었던 일종의 비밀 결사였다. 2. 활동과 회원 이 조직은 집회 장소를 뜻하는 ‘롯지(lodge)’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롯지는 1717년 런던에서 처음 설립되었고, 1773년 프랑스에서는 그랑 토리앙(Grand Orient)이 결성되어 유럽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인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에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부터 이 단체의 성격이 단순한 석공기술자들의 결사에서 종교와 정치 및 문화 예술 분야에서 사회개혁과 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화된 것 같다. 프리메이슨이 계몽주의에 호응하여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자 교권수호를 위해 계몽주의 탄압의 선봉에 서있던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은 교회의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예수회의 일원이 되어 개신교와의 전략적 싸움에 알맞도록 재조직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난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존재론의 측면에서 알아보았다. 바울은 성령을 존재론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혹은 “주의 영”으로 표현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표현한다. 바울은 성령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밀접하게 연결시켜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독자적이면서도 동시에 연합적인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교훈들이 토대가 되어 고대 교회사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발전되었다. 이번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할 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직접적으로 오시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표현하다. 먼저 성령은 “생명의 영”(롬 8:2) 혹은 “살려주는 영”(고전 15:45)으로 표현된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준다: “
결혼하기 전까지는 메마른 체구에 남들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최강 노안의 소유자로 신학생과 전도사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몸이 좀 불면서 체격이 커지고 표정이 딱딱한 외양에 몇몇 사람이 소위 “조직”같아 보인다는 얘길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목으로 임관을 해서는 짧은 머리에 큰 체격, 위협적인 표정과 검은 양복 탓에 더욱 “조직”스러워졌고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면서 한동안 “모 월드” 홈피 제목도 “조직 목사의 미니 홈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외양은 제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무섭고 기대하기 힘든 인상을 강렬하게 주고는, 능력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목회와 서툴러도 지속적인 섬김의 노력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상쇄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임기가 끝나서 교회를 옮길 때면 그래도 헤어지기 섭섭한 관계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잘 하던 말이 “배 목사를 목자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대표기도를 할 때나 대화 중에 “우리 교회의 목자이신 배 목사님”이라는 말을 간혹 하는데, 이게 듣기가 굉장히 송구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솔직히 그 수준
성경은 우리의 대적 마귀의 공격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강한지 이 사실을 알고 경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와 또 개인의 삶과 경험에서 영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마귀와 싸우는 영적전투의 전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장의 결론 부분에 와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과 내면의 삶에서 마귀의 도전을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갈등이란 삶이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강력한 힘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영적 삶의 경험이 마귀를 대적하며 승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사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영적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가르침은 허공을 가르는 메아리에 불과하며 청각장애인이 “베토벤의 교향곡
1) 역사적 맥락 성서 각권마다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은 몇 가지의 요소 즉, 저자와 수신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문화로서 당시 그들이 직면한 지리적, 종교적, 정치적 구성 요소이다. 이러한 설정 안에서 저자는 그의 메시지를 예언적 신탁, 서신, 나레이티브(인물 혹은 사건 중심의), 그리고 그외 다양한 문학형식을 빌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이러한 장르의 이해는 성서해석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가령,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또는 포로 이후에 속하는 학개의 배경을 전제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침례요한과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당시 사회의 농도 짙은 사회분위기였던 메시아 대망의 열기라든가,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가 피차 어떻게 차이가 있었는가의 전제적 지식은 성서해석에서 지대한 차이를 가져온다. 2) 문학적 맥락 낱말의 의미는 반드시 그 단어가 자리를 정한 그 구절(verses)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사진다. 문학적 맥락으로 말하면, 성서 본문의 의미 파악은 반드시 선행구절과 후속구절이 그 해당본문의 의미를 결정한다. 문학적 맥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저자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이
이집트왕 바로는 이상한 꿈을 연거푸 두 번이나 꾸었습니다(창41:1~7). 그러나 이집트의 박사들과 술객들 누구도 그의 꿈을 속시원히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명쾌하게 해몽했습니다(창41:24~25). 하나님께서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하신 것은 속히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뜻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봅니다(창41:32). 앞의 꿈은 암소를 등장시켰고 뒤의 꿈은 이삭을 소재로 했는데, 일곱 마리의 좋은 소와 충실한 일곱 이삭은 7년 간의 풍년을 상징하고 파리한 나쁜 암소와 세약하고 마른 이삭은 7년 흉년의 때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세에 흉년과 기근의 시대가 옵니다(마24:7). 그런데 말세의 시대는 식량만 흉년들고 기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 흉년과 말씀의 기근 시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암8:11~12). 이러한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입니다. 식량의 기근과 흉년도 무서운 것이지만 영적 흉년과 말씀의 기근은 더 두렵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우리를 마르게 하지만 영적 기갈은 영생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래 역사적으로 수많은 책이 국내외에서 금지도서로 지정되었다. 국내 금지도서의 내력을 찾아보았다. 1) 조선 초기에는 왕조체제를 위협하는 내용과 유교 외의 가르침을 담은 서책이 금서가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정(鄭)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암시한 ‘정감록’과 천주교 서적 ‘성찰긔략’, 동학사상을 소개한 ‘용담유사’, 김시습의 ‘금오신화’ 및 도교사상 관련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2) 해방 이후의 대표적 금서로는 이태준의 ‘쏘련기행’,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현채(번역)의 ‘월남망국사’(1960) 등이다. 월북문인 정지용, 백석, 이태준, 임화 등의 작품은 6·25를 전후해서 모두 금서 판정을 받았으나 그들이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88년 삼일절을 기해 모두 해제 되었다. 3) 군사정부는 국내외의 명망 있는 학자와 문화예술인 종교인 및 재야인사들의 작품을 대량 금지도서로 만들었다. 비록 금지도서 목록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완상의 ‘민중사회론’을 비롯해서 사회과학에 대한 도서 대부분이 금서 취급 받았다.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금서는 맨부커 상, 콩쿠르 상, 횔덜린
벌써 26년째, 안수(1990.5.26.) 받고 목사된 세월만큼이나 설교자로도 살아야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부족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 것 몇 가지가 있어 고백한다. 첫째, 설교자인 나를 위해 하나님은 늘 말씀해주시는 분이셨다는 점이다. 물론 그 분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말씀을 쏟아내는 분이시고,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말씀을 하고 계신 분이지만, 그와 더불어 그 분의 입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심이 설교자인 나로서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입을 굳게 다무시고 아무런 말씀도 안 해주신다면 우둔한 내가 어찌 그 뜻을 알며 어디서 참 지혜를 구할 수 있으리.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난관 또한 어찌 극복해낼 수 있으리. 다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히 말씀해주신 덕분이다. 모세를 생각해본다. 한두 명도 아닌 200만 넘는 백성을, 나흘도 아닌 40년간이나, 신작로도 아닌 광야 길을 걸어,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코앞에 둔 땅까지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결코 모세 그의 능력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신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들이 만난 하나님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들은 스스로들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형상을 말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계시해 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어느 여름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하나님은 바퀴위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타고 계신 거룩한 바퀴는 하나님의 규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좌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천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은 보좌가 있는 바퀴위에 계십니다. 바퀴가 의미는 땅과 하늘, 그리고 우주 전체에 가장 높이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에스겔은 15절 말씀에서 “내가 … 보니”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30년의 포로생활 가운데서 단 차례도 자기를 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