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역동성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과 치유와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역동적 권능의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 사역을 통해 그에게 있는 치유의 권능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권능은 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의 문제 곧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는 죄사함의 권능을 통해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 치유 사건에서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온 중풍병자를 향해 먼저 “사람아 네 죄들이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다음에 그를 향해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 하신 대로 이뤄진 것을 통해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여기서 ‘인자’(직역하면, “사람의 아들”)라는 단어가 중풍병자 치유 사역에서 공통으로 사용됐다. ‘인자’는 예수님이 공생애 시절에 자기 자신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호칭이다. ‘인자’는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인데, 그 호칭은 기본적으로
코로나를 바라보는 2가지 관점이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보건기구 WHO와 선진국들의 싱크탱크 및 글로벌기업 CEO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쉽게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과학을 믿으니까요!’라는 말은 지난 12월 14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받은 여성 간호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매일 코로나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 뉴욕 병원 간호사로서 제법 두려울 법도 한데,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강력한 신념의 근거가 과학이었다. 과학과 의술을 믿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학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전진한다는 매우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은 최소한 신앙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신앙이나 믿음보다는 과학이나 정보가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이 많이 죽을수록 신앙이 성장한 것이
필요하면 자신이 교회에 찾아가겠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거나 방문하는 것은 부담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다고 보아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인들은 저마다 내면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힘든 삶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의미 상실, 그로 인한 불안, 우울과 자살충동을 경험하며, 사회에서 단절되는 개인들이 늘어간다. 스스로 자기문제를 포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된 개인들과 가정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기관들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돌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찾아가는 방문사업들을 확장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방문사역은 그 기능이 약화 내지는 외면되고 있는 가운데, 현대인의 각종 문제현실과 어려운 상황 들은 이웃의 관심과 방문 등을 통한 지원과 도움이 더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목회신학자 브리스터(C. W. Brister)는 빠른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는 교회 사역의 위협 요인들을 언급하며 ‘행위와 성찰’(action and reflection)을 강조한 바 있다. 교회의 전통적 유산이 상실 되어가는 위기를 언급하며, ‘일상의 사건과 갈등, 믿음과 영성의 문제들’에 대한 점검과 갱신의 필요성을
2020년 한해는 참 어두운 한해였습니다. 1월 중국 우한에서 날아온 코로나19는 제3차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에서 2.5단계로 격상시키면서 음식점, 호텔, 극장 등의 영업시간이 제한되고 교회도 예배를 비대면 또는 제한된 인원으로 드려야합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멈추게 했지만 세월은 멈추게 하지 못했는지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크리스마스의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영어로는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답니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지만 신약성서에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임신해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로 정해진 것은 교황 율리우스 1세 때였습니다. 1세기 말부터는 그리스도교 국가 전체에서 이 날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지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기독교 역사상 유래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가령 아래의 뉴스가 울려 나왔다 하자. “온 세계의 식물(植物)이 자리를 떠나 움직이고 온 세계의 동물(動物)이 꼼작 못하고 제자리에 박혀있다.” 이것은 이변이 아니라 재앙(災殃)이다. 모든 식물들이 뿌리를 지닌 채 뜰로 거실로 침입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왜 이런 현상이 재앙인가? 그것은 아름다운 질서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식물이란 심어놓은 물건이라서 언제나그 자리에 박혀있어야 아름답고 질서적인 것이다. 동물이란 움직이는 물건 이니 물건은 소용되어지는 대로 사용 되어졌는데 그냥 한곳에 말뚝 박히듯 박혀있으면 이것 또한 꼴사나운 것이다. 밭갈이 갈 소를 보고 “이랴, 밭갈이 가자”고 농사 주인이 아무리 사정해도 그 자리에 박혀있는 소라면 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어떤 산장 커피숍에 후배 동역자와 함께 가서 커피를 즐기다가 우연히 벽에 쓰인 영문을 보았다. “He has made everytime beautiful in its time.” 우리말로 옮기니 이런 말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있을때 아름답게 만들어 오셨다.” 이 자리에서 모두가 그게 진리라고 이구동성 했다. 성경에 분수(分數)를 알라고 했었다. 분수란
예수님께서는 하나, 한사람, 한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마 5:19), 한 므나 (눅 19:16), 그 중에 하나(눅 17:15), 예복을 입지 않은(마 22:12) 한 사람 ,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0),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렘 5:1)을 언급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각각 만나 주신 사람들이 나온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요 4장),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요 8장),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요 12장),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요 3장), 삼십팔 년 된 병자(요 5장),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요 9장)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요 11장),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주셨다. 미네소타(Minesota) 주의 스카치맨 (Scotchman)의 보고서를 보면, 1881년한 알의 밀을 심었더니, 가을에 560알이 됐으며, 1882년 그 560개의 밀알을 심어 1/5부쉘(3되)을 거뒀고, 이듬해 그 1/5부쉘을 심었더니 17부쉘(85되)을 수확했으며, 1884년에는 17부쉘을 17에어커(약 2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입에서 나온 첫소리가 “나의 주님이시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보는 순간 “나의 주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의 첫 고백이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실질적으 로는 너무나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처럼 우리도 진정한 믿음의 바탕에서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 되어진 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와 쉼과 평안”의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면상 짧지만, 최근에 있었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두 달 전부터 우리 집 마당에 산란계 암 닭 열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첫날부터 이 녀석들은 달걀을 낳기 시작했는데, 저희 부부는 닭장 안에 갓 낳은 달걀을 난생처음 보는 순간 신기하고도 놀라워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웃들도 우리 집에서 닭을 키우며 달걀을 생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FAMILY는 FA+M+I+L+Y의 결합으로 각각 FAther, Mother, I, Love, You를 말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가족이다. 아담이 하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한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사랑은 서로에게서 한 몸 됨의 관계를 말한다. 이처럼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가족에 있어서 아이들은 부모가 한 몸 됨의 관계를 보게 되는데 이것을 ‘동일메시지’(同一 Massage)라고 부르고 싶다. 아빠와 엄마가 한 몸이고 부모와 자녀가 한 몸이라는 의미의 동일메시지다. ‘세상은 남녀평등이다, 여성상위다, 역차별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수평관계도 아니고 수직관계도 아닌 그저 한 몸일 뿐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주시니라”(엡 5:22~23)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누가 위냐 아래냐가 아니라 머리와 몸이 한 몸이 될 때 온전한 인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자식을 앞세워 천국행으로 보내놓고 왜 슬픔이 없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감사로 숙성시키는 목사가 있다. ‘별세한 부모는 발밑에 묻고 죽어간 자신은 부모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떠나간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서 보화인양 변모시킨다는 것은 범상(凡 常) 초월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뭇사람의 위로를 받아야할 장본인 같은데 도리어 뭇사람을 위로하고 있으니 삶의 도치법(倒置法)치고는 과연 희귀한 일이로다. 그 장본인은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목회자이며 더욱 명설교 목사로 인정 받는 이름 있는 목사였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목사의 41세 청춘아들이 암투병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부모와 처자식 곁을 떠나게 됐을까! 세상적인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불행일 것 같기만한데 왜 하나님은 그목사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인간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하늘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때문에 악고론이라는 신학이 나왔던 것이다. 아비 목사는 아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가을이 오는 산책길에서 “코로나의 안개가 아직도 자욱하여 걷는 이 길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걷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방언으로 설교함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행2:13)고 비방했다. 바울 사도는 옥중서신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15개국 이상의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제자들의 성령충만의 모습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자들로 보였다. 세상 술에 취하여 살아온 저들이 주예수님의 유언대로 과연 성령의 새술에 잔뜩 취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전혀 다른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세상과 짝하며 살았으나 오순절 후에 변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세상이 보기에 성령충만으로 새 술에 취한 자로 주님의 복음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모두를 자기가 더욱 잘난 사람으로 말에나 일에나 모두가 교만한 자들이었고 반목질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으나, 성령충만받은 저들은 보다 높은 자리나 좋은 자리, 보다 인기있고 유익한 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 생활의 변화에서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어 역동적 대담성과 성령의 은사로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