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 에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화내는 것은 건강에 해롭지만 웃음은 건강에 좋다는 말이다.요즘에 와서 웃음의 효과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고 웃음을 치료방법으로 활용하고 기업경영에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솔로몬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17장22절)고 했다. 마음의 즐거움이 어떤 보약을 먹는 것보다도 더 좋은 보약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기뻐하는 것은 마음이 즐거울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것은 곧 웃음이다. 마음의 즐거움 즉 항상 기뻐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보약은 없다. 즐거운 생각을 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웃고 또 웃으면 웬만한 질병은 저절로 치료가 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웃음의 효과에 대해 실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웃을 때 면력기능이 상승한다.중증의 암환자와 당뇨병환자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재미있는 만담과 개그를 통해 한 시간 실컷 웃게 하고 나서 그 전후를 검사해서 비교했더니 웃고 난 후에 면역기능 수치가 현저하게 높아지고 엔도르핀의 분비가 왕성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20년 전 교내 채플시간에 설교하시는 연로한 노 교수님의 목소리만큼은 마이크가 없어도 될 정도로 크고 카랑카랑하다. 내용인즉 요즘 목사들은 종놈이 아닌 종님으로 살려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종일 뿐 인데 저 스스로 종님이 되려 한다는 말이다. 목사가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대접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그 이면에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라든가 또는 하나님의 사자로 받들란 말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가르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가 적은데 문제가 있다. 가족의 역기능도 이와 같다. 상처 입은 아버지가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세우는 권위는 아들에게는 상처가 된다. 그러므로 순기능의 권위는 아버지가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사랑을 받은 아들이 성숙해가며 아들 스스로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다. 근처에 개신교에서 이단이라 부르는 교회가 개 교회 건물을 여럿 사들였다. 자신들의 교회는 가정을 파탄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고 가정을 소중히 여긴다는 광고문을 교회 정문 앞에 게시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어느 대륙에 도착 해보니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모두 옷을 입지 않고 있는데 사람도 원숭이도 다 털이 나서 사람인지 원숭인지 분별이 잘 안됐다. 그래서 선교사는 본국에 전보를 치기를 원숭인지 사람인지 구별을 못하겠으니 원숭이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속히 알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얼마 후 답장이 오기를, “간지럼을 피워서 웃는 것은 사람이고 안 웃는 것은 원숭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웃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사람만 웃을 줄을 안다.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이착 프리드 박사는 간질환자의 뇌를 연구하다가 뇌의 좌측 앞에 어떤 부위를 자극하면 사람이 웃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람의 뇌에 웃음을 유발하는 신경회로가 있는데 뇌를 다쳐 웃음을 유발하는 신경회로가 손상되면 웃음을 잃어버리고 창조적 활동에도 제약을 받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신경회로에 이상이 생기면 시도 때도 없이 웃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을 보고 웃음보가 터졌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웃음보를 주셨다. 개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 교회는 설교 표절(剽竊)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설교 표절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다만 예전에는 교인들의 의식 수준이 높지 않았고, 언론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었다고 한다.그뿐인가? 몇 년 전 뉴스를 한참 뜨겁게 했던 젊은 국회의원 당선자의 논문표절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워 진때도 있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던 젊은이가 남의 논문을 표절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대학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올림픽위원까지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 표절이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렇게 표절이라는 것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으로 나타내는 거짓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자기가 그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합리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사회에 이슈가 되고 문제가 되지만 그에 반해 그 뿌리는 더욱 깊숙이 내려갈 수가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열거한 표절들보다 더욱 조심할 것이 있는데 바로 감정적(感情的) 표절(剽竊)이다. 자기
오늘날 우리는 가치관의 혼돈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부터 온 국민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오직 경제발전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일하고 달리다 보니 50년의 짧은 기간에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게 됐다. 세계무역규모 12위 국가로 성장했고 전 세계로 선박에서부터 자동차 스마트폰 의류 문화까지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따라서 국제 사회로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각 분야 개방요구가 거세지면서 외국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우리도 세계 각국을 여행 할 수 있는 여행자유화가 이뤄졌다. 우리는 밖에서 안에서 세계의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이면서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서방국가들은 2~300년 동안 서서히 개방되고 변화되고 발전한 반면에 우리는 불과 50년 동안에 산업화와 민주화와 국제화 세계화로 개방과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으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상태에서 빠른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이 높아지고 한꺼번에 서구문화가 들어오고 IT발전과 전 국민 스마트폰 시대를 맞
아시안 게임이 몇 칠 후 열리지만 축구예선은 이미 시작됐다. 인천시민은 한 경기 이상 관람하자는 현수막을 보고 인천시민인 나는 경기일정을 찾아보았다. 여자축구 북한과 베트남의 경기가 열린다. 딸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 열심히 주먹밥과 간식을 만들어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간다. “통일이 언제 되면 좋겠니?” “우리나라가 아직 북한을 받아들일 만큼 여력이 없다고 보이기에 천천히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산가족이 되어 북쪽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거라” “우리는 이산가족이 없잖아요” “몇 단계 거치면 다 친척이고 가족이기에 한 민족이란다. 만약 우리가 북한에서 고통 받고 있고 충분히 남한 사람이 잘 살고 있기에 도움을 바랄 때 남쪽에서 자신들의 불편으로 통일이 늦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니?” “……”드디어 경기장에 도착했다. 스탠드 한 쪽에는 빨간색을 입은 북한응원단과 반대편에는 흰색을 입은 베트남응원단이 있었다. 조직위원에서 조직한 응원단들이었기에 응원에 열의가 없었다. 그래도 한민족이기에 북한 응원단이 간간히 목소리를 높이며 응원을 했고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100명 정도의 베트남사람들이 시종일관 큰소리로 베트
꽃밭을 망가뜨리기 가장 쉬운 방법은 가만 내버려두는 거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밭도 가꾸고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가나고 망가져버리는 것은 금방이다. 행복도 가꾸지 않으면 점점 멀리 도망가고 원망과 불평의 잡초가자라고 마음도 덤덤해져서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일상을 살게 된다. 그러나 가꾸면 가꿀수록 행복의 꽃은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의미를 부여 하지 않으면 일 년 365일 똑 같은 날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한 날이 된다.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평범한 날이지만 의미를 부여 하니까 명절 이라는 특별한 날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날이 되는 것이다. 기념일에는 이벤트를 하라.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가끔은 이벤트가 필요하다. 생일은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날이지만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생일날은 생일을 맞은 가족을 위해 이벤트를 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남편의 생일이나 아내의 생일, 자녀들의 생일을 그냥 넘기지 말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고 선물을 주며 축하하는 것은 당신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을 너무나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자녀들에게 생일을 축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연합(창 2:24)’의 과정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거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친해지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며 함께 평생을 살아가기로 맹세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친구를 만나고 친해지고 서로 익숙해지며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누는 우정의 기반이 다져지기까지도 꼭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다.인간관계에서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단계를 지나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단계가 반드시 온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왠지 서로 맞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함께 어울리는 것이 신이 나고 재미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 싫은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은, 어느 관계에서나 부정적인 감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배우자가 정말 보기 싫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에게도 진짜 짜증이 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 관계가 어긋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는, 관계의 당연하고 필수적인 한 과정을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정해진 윈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 같아도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까지 정해진 원리를 따라 삽니다. 교통법규 원리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고, 사업도 삶의 행동 원리를 벗어나면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도 영적 행동 원리가 잇습니다. 영적 원리를 바로 깨닫고 영적 원리를 따라 살 때, 시간마다 사건마다 그 원리를 따라 한걸음씩 주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도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하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아무리 큰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지체를 죽이지 못하고 생각이 다른 곳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지체를 죽이고 내 생각, 감정, 의지, 지성 모두를 하나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눈과 우리의 눈이 마주쳐야(eye contact)합니다. 성경은 명백한 행동 원리들을 제시합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당황하게 됩니다. ‘이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창 2:24)” 시작한 결혼은 ‘Happily ever after’라는 디즈니 만화의 결론으로 끝나리라는 기대감과 시작한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온갖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한다. 기대대로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때로는 복수극이 되기도 하고, 액션물로 변하기도 하며, 그러다가 스릴러까지 가는 수도 있다.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복병들을 만나면서 가정이 전쟁터로 변하는 것이다. 결혼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만 할 수도 없다. 파티장일 줄 알았던 가정이 전쟁통으로 변하면서 문득 부부들은 묻는다. “왜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자녀들과도 마찬가지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옛말은 나의 아이가 ‘No!’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현실로 변한다. 미운 짓은 이미 4살에, 미국으로 치면 ‘terrible2’의 시작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 착하고 고분고분하던 자녀가 ‘나 좀 내버려 둬! 엄마, 아빠는 이해 못해!’라며 방문을 닫아걸기 시작하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로서 스스로 자신에게 자문하기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내 아이와 말이 안 통하기 시작했을까?”대화가
이기심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이다. 이 시대는 이기심,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위한 삶에 열중하며 남의 불행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옆집에서 노인이 죽은 지 수십 일이 지나도 알 수가 없다. 가까운 이웃이 큰 불행을 안고 있어도 지금 자신의 팔뚝이 모기에 물려 쓰리고 아픈 것에 더 분개하고 속상해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삶의 질도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사람이 상대적 빈곤 의식에 빠져 자신이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애착은 점점 더해지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래 전에 어떤 탈옥수가 이렇게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사회를 꼬집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구호는 가정과 교회, 학교에서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이기심 때문이다. 한 예로 도로변을 보자. 서울의 거리는 거의 주차장과 같다. 조그만 사고라도 나면 그 주
오늘이 일곱 번이면 일주일이 되고 일 년이 되려면 오늘이 삼백 육십 다섯 번이 지나야한다. 365일을 매일 즐겁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고 할 것이다. 365일을 날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삼백 육십 오일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고 까마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냥 되는대로 살자’ 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간단하고 만만하다. 참는 것도 오늘 하루는 참을 수 있다. 아내를 위해서 오늘 하루쯤은 살림도하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멀리 생각 하지 말고 단순하게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으면 된다. 행복을 말하며 시작하라.오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나의 행복을 위해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라. 식탁에서도 ‘맛있네.’ ‘고마워’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보자.’ 행복한 말을 하고 칭찬하며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한다. 직장에서도 가능하면 웃으며 좋은 말을 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하루 동안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행복을 만드는 말을 해주고 해어질 때는 “좋은 날 되세요.” 라고 축복하며 살다 보면 하루의 삶이 즐겁고 행복
사람들은 저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즐겁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무지개를 찾듯 행복을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길을 잃고 만다. 지난 3월, 학생들에게 자신의 가족경험을 써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줬다. 의외로 몇 학생들에게서 “이런 과제 정말 싫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연을 들으니 상처뿐인 자기 가족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은 정말 좋은 사람 만나 빨리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함께 웃었다. 당연하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행복 가정은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모든 면에서 더 풍요롭고 발전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왜 수많은 개인들과 가정은 불행하며, 흔들리고, 파괴되어 가는가? 오늘날 결혼과 가족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소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은 결혼이 ‘하나님에 의한 언약적 관계’라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첫 번째 단계가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는 언약’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필자의 책「홈 빌더스」(2013)에서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결혼이 언약관계’라는
모두가 시간을 쪼개가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느린 것이 아름답다며 느리게 살기 운동이 미국에서도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해야 하고 같은 시간 내에 가급적 많은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생산라인에서는 설비 자동화 시스템으로 쉴 새 없이 내 앞에 주어지는 일을 처리해야만 하므로 사람이 하나의 부속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격월간 퓨처리스트 는 ‘빨리빨리 증후군’으로 공동체가 붕괴되고 가정불화가 심화되며 작업 능률과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고 있다 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도 느리게 살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너무 바쁘게 일과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니 삶에 피곤을 느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귀농 귀촌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복잡한 도시의 스피드 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몸은 좀 힘들지만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관광을 많이 가는 싱가포르에 갔을 때 관광지에서 물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연합’에 관한 첫 번째 논점은 ‘차이’를 인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서로의 차이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단순한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아내와 남편 간의 차이, 부모와 자녀의 차이,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의 차이는 수용(acceptance)과 변화(change)가 조화를 이룰 때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 차이가 있으면 그다음에는 적응과 조정의 단계가 이어져야 한다. 차이가 있음으로 해서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싸움으로 번진다. 서로의 차이가 어느 관계에서나 있는 당연한 현상이 라면 갈등과 싸움도 당연한 관계의 한 부분이다. 갈등이 많고 싸움을 많이 한다고 해서 건강하지 않은 관계는 아니다. 단 건강한 관계의 지표는 어떻게 갈등을 풀어가고 해결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 싸움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싸움의 기술 중의 하나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사전달(Making it clear)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사고의 과정을 상대방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잊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내가 머릿속으로 두세 단계를 거쳐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