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게임이 몇 칠 후 열리지만 축구예선은 이미 시작됐다. 인천시민은 한 경기 이상 관람하자는 현수막을 보고 인천시민인 나는 경기일정을 찾아보았다. 여자축구 북한과 베트남의 경기가 열린다. 딸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 열심히 주먹밥과 간식을 만들어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간다. “통일이 언제 되면 좋겠니?” “우리나라가 아직 북한을 받아들일 만큼 여력이 없다고 보이기에 천천히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산가족이 되어 북쪽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거라” “우리는 이산가족이 없잖아요” “몇 단계 거치면 다 친척이고 가족이기에 한 민족이란다. 만약 우리가 북한에서 고통 받고 있고 충분히 남한 사람이 잘 살고 있기에 도움을 바랄 때 남쪽에서 자신들의 불편으로 통일이 늦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니?” “……”드디어 경기장에 도착했다. 스탠드 한 쪽에는 빨간색을 입은 북한응원단과 반대편에는 흰색을 입은 베트남응원단이 있었다. 조직위원에서 조직한 응원단들이었기에 응원에 열의가 없었다. 그래도 한민족이기에 북한 응원단이 간간히 목소리를 높이며 응원을 했고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생각되는 100명 정도의 베트남사람들이 시종일관 큰소리로 베트
꽃밭을 망가뜨리기 가장 쉬운 방법은 가만 내버려두는 거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밭도 가꾸고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가나고 망가져버리는 것은 금방이다. 행복도 가꾸지 않으면 점점 멀리 도망가고 원망과 불평의 잡초가자라고 마음도 덤덤해져서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일상을 살게 된다. 그러나 가꾸면 가꿀수록 행복의 꽃은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의미를 부여 하지 않으면 일 년 365일 똑 같은 날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한 날이 된다.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평범한 날이지만 의미를 부여 하니까 명절 이라는 특별한 날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날이 되는 것이다. 기념일에는 이벤트를 하라.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가끔은 이벤트가 필요하다. 생일은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날이지만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생일날은 생일을 맞은 가족을 위해 이벤트를 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남편의 생일이나 아내의 생일, 자녀들의 생일을 그냥 넘기지 말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고 선물을 주며 축하하는 것은 당신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을 너무나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자녀들에게 생일을 축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연합(창 2:24)’의 과정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거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친해지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며 함께 평생을 살아가기로 맹세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친구를 만나고 친해지고 서로 익숙해지며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누는 우정의 기반이 다져지기까지도 꼭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다.인간관계에서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단계를 지나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단계가 반드시 온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왠지 서로 맞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함께 어울리는 것이 신이 나고 재미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 싫은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은, 어느 관계에서나 부정적인 감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배우자가 정말 보기 싫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에게도 진짜 짜증이 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 관계가 어긋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는, 관계의 당연하고 필수적인 한 과정을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정해진 윈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 같아도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까지 정해진 원리를 따라 삽니다. 교통법규 원리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고, 사업도 삶의 행동 원리를 벗어나면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도 영적 행동 원리가 잇습니다. 영적 원리를 바로 깨닫고 영적 원리를 따라 살 때, 시간마다 사건마다 그 원리를 따라 한걸음씩 주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도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하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땅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아무리 큰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지체를 죽이지 못하고 생각이 다른 곳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지체를 죽이고 내 생각, 감정, 의지, 지성 모두를 하나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눈과 우리의 눈이 마주쳐야(eye contact)합니다. 성경은 명백한 행동 원리들을 제시합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당황하게 됩니다. ‘이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창 2:24)” 시작한 결혼은 ‘Happily ever after’라는 디즈니 만화의 결론으로 끝나리라는 기대감과 시작한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온갖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한다. 기대대로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때로는 복수극이 되기도 하고, 액션물로 변하기도 하며, 그러다가 스릴러까지 가는 수도 있다.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복병들을 만나면서 가정이 전쟁터로 변하는 것이다. 결혼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만 할 수도 없다. 파티장일 줄 알았던 가정이 전쟁통으로 변하면서 문득 부부들은 묻는다. “왜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자녀들과도 마찬가지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옛말은 나의 아이가 ‘No!’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현실로 변한다. 미운 짓은 이미 4살에, 미국으로 치면 ‘terrible2’의 시작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 착하고 고분고분하던 자녀가 ‘나 좀 내버려 둬! 엄마, 아빠는 이해 못해!’라며 방문을 닫아걸기 시작하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로서 스스로 자신에게 자문하기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내 아이와 말이 안 통하기 시작했을까?”대화가
이기심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이다. 이 시대는 이기심,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위한 삶에 열중하며 남의 불행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옆집에서 노인이 죽은 지 수십 일이 지나도 알 수가 없다. 가까운 이웃이 큰 불행을 안고 있어도 지금 자신의 팔뚝이 모기에 물려 쓰리고 아픈 것에 더 분개하고 속상해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삶의 질도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사람이 상대적 빈곤 의식에 빠져 자신이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애착은 점점 더해지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래 전에 어떤 탈옥수가 이렇게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사회를 꼬집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구호는 가정과 교회, 학교에서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이기심 때문이다. 한 예로 도로변을 보자. 서울의 거리는 거의 주차장과 같다. 조그만 사고라도 나면 그 주
오늘이 일곱 번이면 일주일이 되고 일 년이 되려면 오늘이 삼백 육십 다섯 번이 지나야한다. 365일을 매일 즐겁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고 할 것이다. 365일을 날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삼백 육십 오일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고 까마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냥 되는대로 살자’ 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간단하고 만만하다. 참는 것도 오늘 하루는 참을 수 있다. 아내를 위해서 오늘 하루쯤은 살림도하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멀리 생각 하지 말고 단순하게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으면 된다. 행복을 말하며 시작하라.오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나의 행복을 위해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라. 식탁에서도 ‘맛있네.’ ‘고마워’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보자.’ 행복한 말을 하고 칭찬하며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한다. 직장에서도 가능하면 웃으며 좋은 말을 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하루 동안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행복을 만드는 말을 해주고 해어질 때는 “좋은 날 되세요.” 라고 축복하며 살다 보면 하루의 삶이 즐겁고 행복
사람들은 저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즐겁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무지개를 찾듯 행복을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길을 잃고 만다. 지난 3월, 학생들에게 자신의 가족경험을 써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줬다. 의외로 몇 학생들에게서 “이런 과제 정말 싫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연을 들으니 상처뿐인 자기 가족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은 정말 좋은 사람 만나 빨리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함께 웃었다. 당연하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행복 가정은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모든 면에서 더 풍요롭고 발전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왜 수많은 개인들과 가정은 불행하며, 흔들리고, 파괴되어 가는가? 오늘날 결혼과 가족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소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은 결혼이 ‘하나님에 의한 언약적 관계’라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첫 번째 단계가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는 언약’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필자의 책「홈 빌더스」(2013)에서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결혼이 언약관계’라는
모두가 시간을 쪼개가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느린 것이 아름답다며 느리게 살기 운동이 미국에서도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해야 하고 같은 시간 내에 가급적 많은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생산라인에서는 설비 자동화 시스템으로 쉴 새 없이 내 앞에 주어지는 일을 처리해야만 하므로 사람이 하나의 부속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격월간 퓨처리스트 는 ‘빨리빨리 증후군’으로 공동체가 붕괴되고 가정불화가 심화되며 작업 능률과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고 있다 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도 느리게 살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겼다고 한다. 너무 바쁘게 일과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니 삶에 피곤을 느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귀농 귀촌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복잡한 도시의 스피드 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몸은 좀 힘들지만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관광을 많이 가는 싱가포르에 갔을 때 관광지에서 물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연합’에 관한 첫 번째 논점은 ‘차이’를 인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서로의 차이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단순한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아내와 남편 간의 차이, 부모와 자녀의 차이,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의 차이는 수용(acceptance)과 변화(change)가 조화를 이룰 때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 차이가 있으면 그다음에는 적응과 조정의 단계가 이어져야 한다. 차이가 있음으로 해서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싸움으로 번진다. 서로의 차이가 어느 관계에서나 있는 당연한 현상이 라면 갈등과 싸움도 당연한 관계의 한 부분이다. 갈등이 많고 싸움을 많이 한다고 해서 건강하지 않은 관계는 아니다. 단 건강한 관계의 지표는 어떻게 갈등을 풀어가고 해결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 싸움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싸움의 기술 중의 하나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사전달(Making it clear)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사고의 과정을 상대방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잊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내가 머릿속으로 두세 단계를 거쳐서 생각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추위를 잘 타고 나는 더위를 잘 탄다.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창문에 붙여 놓은 침대에서 창가가 내 자리인데 그 이유는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솔솔 들어오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무의식중에 다리를 창문틀에 얹고 자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어깨에 불이 났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때렸던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무슨 일이야?’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씩씩대며 ‘사람이 몰인정하게 등을 지고 자?’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화장실에 볼일을 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내 다시 누워 잠을 잘 잔다. 아내가 남편 다리를 창문에 빼앗겨 질투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전 날에 아내를 서운하게 한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한 가지 내가 인식하는 것은 아내는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설령 내가 아내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잠자는 도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십분 양보해도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화가 나서 소리를 내거나 싸우게 되면 잠자는 어린 아이들까지 힘들어 질 수 있기에 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한동안 감정을 참고 있다가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몇 칠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이론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행복한 삶이 이론을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 ‘말로 표현하기와 작은 것을 누리며 감사하기’ 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번호에는 단순하고 즐겁게 살기 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한다. 단순하고 즐겁게 살기나는 복잡한 것을 싫어하지만 살다보면 자꾸만 복잡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책상 위를 정리 해놓고 나도 며칠만 지나면 책장에서 꺼내놓은 책과 매일 배달되는 우편물들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 복잡해진다. 결국은 버리면서도 혹시나 필요 할까? 혹시나 보게 될까? 해서 두다보면 복잡해진다. 그래서 한 번씩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를 하는데 정리한다면서도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게 되는데 정리를 하는 것도 일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씩 돌아보며 단순하도록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이사하지 않고 한집에서 오래 산 집은 집안이 복잡하고 살림살이가 많은데 몇 년마다 이사를 한집은 집안이 정리 돼있고 살림도 단촐 하다. 이사할 때 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버리자니 아
“행복하지 않아요” “나는 죽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를 성공했다고 부러워 하지만 아니요, 나는 불행해요”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벌써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가정 사역을 하다보면 소위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의 조건을 완벽하게 모두 갖췄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하다며 눈물짓는 사람들을 만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중 하나인 포드자동차의 창업주 헨리 포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많은 기자들이 몰려 마지막 인터뷰를 할 때였다. 어느 신문사 기자가 묻기를 “회장님은 평생을 자동차를 위해 일하셨고 자신의 자녀들만큼이나 자동차를 사랑하셨는데 혹시 다시 태어나신다면 또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시겠습니까?” 그때 당대의 재벌중 한사람이었던 헨리포드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기자양반,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서 지금의 아내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소.” 그 때 미국 국민들은 비로소 알았다. 헨리 포드가 돈이 많거나 재벌이라,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헨리 포드의 행복은 가장 가까운 아내와의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주례사 중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연합이다.“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떠남에 이어 연합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연합의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전제가 된다. 50%를 훌쩍 넘어선 이혼 중 소위 ‘성격차이’가 제일 많은 표면적 이유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성격차이’는 이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전제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개성과 자라난 환경의 차이 등으로 자신과 성격이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사람과는 더 많이 부딪치기 마련인데다 애초에 서로 끌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성격차이’를 운운하는 부부를 만났을 때 자신과 똑같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면 좋을 것 같은지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의례 ‘No’이기 마련이다.연합의 원리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배우자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정과 관계에 관한 많은 서적들이 남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연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어느새 남녀 차이에 관한 서적의 고전이 되어버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원하기는 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일수록 애정표현이 서툴고 마음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말로나 행동으로도 잘 표현하지 못했는데 조금씩 노력하다보니 많이 좋아졌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처음엔 서툴러도 자꾸 하면 좋아지고 실천할 때 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말로 표현하기우리는 표현하는데 서툴러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못한다. 나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한 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도 표현하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까지 알기는 어렵다. “여보 사랑해요” 라고 한마디만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고 그 말을 들음으로 얼굴에 미소가 피고 행복해 진다. 자녀들에게도 “아들아 사랑한다.” “우리 예쁜 딸 사랑해” 라고 하면 아빠 엄마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전달이 되고 사랑을 전달 받은 자녀들은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된다. 전문가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정서 표현’이 중요하기 때문에 표현을 자주 하라고 권한다. 가족뿐 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