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에 조문객이 모였다. 땅에서는 “이래 살다 갈 걸… 하고 하늘에서는 “그래 살다 올 걸… 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린다. 땅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유감스러웠다는 것을 한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이래 살다 갈 것”하는 유감스러운 마지막 작별인사는 어이된 셈인가? 어째서 이래 살다간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한평생을 찢어지게 가난에 시달리다가 떠나가는 고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는 것이다. 바가지 고생만 하다가 가누나. 둘째로 이래 살다 갈 것 쯧쯧하는 이유는 만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생전에 남에게 좀 베풀고 갈 것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인색했더냐는 것이다. 호주머니 풀지 않고 있다가 어디 가서 풀려나. 셋째로 자기에게도 좀 여유 있게 베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너무도 자기에게 인색했던 그의 삶이 가련하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 한번 못하고 입맛 따라 밥 한 그릇 사먹기를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그의 무신론적 생활이다. 그토록 영원 구원 전도를 했건만 고개 짓더니만 그냥 가는구나. 차차 믿는다고 미루더니만 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의 국교도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에 비국교도 기도회 모임에 출석해 말씀을 듣고 중생을 체험했다. 그간 떠돌이 구두 수선공으로 일한 청소년이었으나 1787년 8월 숫크립스교회(Sutcluffs Church)에서 26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을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있는 주님의 최후명령에서 접할 때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해외 이방인들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연민으로 깊은 도전을 받았다. 캐리는 ‘쿡 선장의 항해’라는 책을 읽고 선교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1791년 크립톤(Clinton)에서 부활절 연합 예배 때 해외 선교에 대한 설교를 했다. 영국 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이듬해 노팅햄(Nottingham)에서 모인 연합 예배 때는 이사야 50장 23절을 가지고 “죽지 않는 설교”로 불리는 유명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시도하고 하나님으로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해서 “보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송아지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양이나 송아지 같은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며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보배로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맥아더 장군이 참호 속에서 어린 병사와 나눈 대화가 6월이면 더욱 생각이 난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없어 포탄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이 어린 병사에게 “집에 가고 싶지 않느냐?”,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다른 소원은 없고, 우리는 지금 맨 주먹으로 싸우고 있는데,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는 대답을 듣고 인천상륙작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 많이 교회들이 미국인 교회 건물을 빌려 예배를 시작한다. 임대를 하던 무상으로 사용을 하던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이 현지 미국인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된다. 요사이는 빌려주지 않는 교회들도 있고 또 임대로도 내야 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쾌히 건물을 내어주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 해마다 6월이면,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인교회목회를 할 때 함께 했던 미국인 교회들이 더욱 생각이 난다. 피부색도 인종도 다르고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 때문에 좋은 교제를 나눴던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은 많은 미국인 교회들 안에 한국전이나 월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페르소나, 자아, 그림자라는 개념으로 구분 지어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하던 가면을 뜻하는데 ‘외적 인격’, 즉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을 말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이고 행동규범이다. 목사, 사모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대치이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보이는 그 페르소나 뒤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우리 안에 있는 부도덕하고, 부정적이고, 가리고 싶은 더러운 면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당연히 목회자나 사모에게도 이 그림자는 존재한다. 말씀을 들고 강단에 호기 있게 서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이나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일의 나와 주중의 내가 다르다.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 허물들이 셀 수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지, 찌질한지, 뒤끝이 작렬하는지, 얌체인지, 비겁한지 절대 들킬 수 없다. 하지만 그림자는 잠시 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언제나 은혜만 끼치며 살 수 없고, 맞는 말만 하고 살 수 없다. 안타깝게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존 스티븐 아쿠와리란 탄자니아 마라토너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선수들이 이미 다 결승선을 들어선 지 한 시간이 지난 후 경기장에 힘없이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는 경기장을 뛰어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피투성이의 다리에 붕대를 맨 상태로 다리를 질질 끌며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결승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이 꼬이면서 옆 사람과 부딪혀 쓰러지면서 부상을 입었고, 의료진들은 더 이상 달리기에는 무리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취재기자의 보도기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관중석엔 불과 수천의 관중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엔 호루라기와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비상등의 불빛이 어둡고 차가운 멕시코시티의 저녁에 스산한 기운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자들이 다시 몰리면서 ‘이제 이번 마라톤 경기의 마지막 주자가 오고 있습니다’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발표가 있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아쿠와리 선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리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 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쉿!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떠들어 댈 테니까 말이에요. - 잘 아시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탄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무명인’입니다. 시인은 박수받는 Somebody 유명인이 되고자 쉼 없이 제 이름을 개골거리기 보다, 무명인 Nobody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자고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승리한 믿음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악한 왕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달아나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낙심합니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한탄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b). 그 때 하나님은 7000명의 무명 의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엘리야 홀로 의인인 줄 알았
먼저 마소라 본문의 각 4절을 살펴보자. 사무엘상 31:4 .h;yl,[; lPoYIw" br<j,h' Ata, l~Wav; jQ'YIw" daom] arEy: yKi wyl;ke acenO h~b;a; alw] ybi AWlL]['t]hiw] ynIrU~q;d]W hL,aeh; !ylirE[}h ;Wa/by: A@P, Hb;% ynIrEq]d:w] *B]r]j' #lv] wyl;ke acenOl] lWav; rm,aYow" 역대상 10장 4절 .h;yl,[; lPoYIw" br<j,h 'Ata, l~Wav; jQ'YIw" daom] arEy: yKi wyl;ke acenO h~b;a; alw] ybi AWlL]['t]hiw] h~L,ae~h; !ylirE[}h; Waboy: A@P, Hb;% ynIrEq]d:w] *B]r]j' #lv] wyl;ke acenO Ala, lWav; rm,aYow" 두 평행 본문에서 3절 마지막에 사울이 ‘떨었다’는 표현은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존중한 것이다. 사울이 떨었지만, 사무엘상 구절에서는 아직 사울이 생명을 위협할만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반면 역대상의 기록에 의하면 사울은 이미 3절에서 활에 쏘여 중상을 입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는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많이 사용됐으며 또한 요한은 인자 칭호를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과 그 유일한 분이 주시는 구원의 유일성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인자’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존재로써 유대인들이 보기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닌데 기적적 일들을 행하시며 감동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자’는 근원적으로는 영원한 권능의 인격의 하나님이신 로고스이시며 화육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 사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존재로 복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인자 말씀(요 13:31)을 통해 화육의 사명을 완수하신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로 돌아가심에 관하여 알아본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가룟 유다와의 대화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반의 마음을 간직한 채 만
2년 전 즈음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이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해임됐다. 미국에서도 규모로 치면 다섯 손가락에 꼽히도록 큰 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목회자였다. 알코올 남용과 정신적 문제들, 그리고 가정불화가 원인이 됐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소신을 대외적으로 강하게 피력하던 또 다른 목사가 동성애자 파트너에 의해 마약 복용 및 동성애의 전력이 폭로되기도 했다. 미성년자와의 성매매가 발각되어 목을 매 자살한 목회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든 한국이든 잊을 만하면 교계에서 목회자의 외도나 성추행, 설교 표절 등의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주위 교회들과 사역자들의 귀감이 되고 선망이 됐던 목회자들의 불명예스러운 사임은 교회와 동역자들에겐 큰 충격과 실망이 된다. 사역하던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폭풍이 된다. 외부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더욱 거센 공격과 비아냥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그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던 목회자들을 보며 돌을 던지기보다는 같은 목회자나 사모로서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유혹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 연약함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