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마라아는 누구누구란 말인가? 그 첫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마리아이고 그 다음 둘째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이 섬기는 마리아다. 전자는 진짜이고 후자는 가짜이다. 성경의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했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온통 의아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보충 설명이 따른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리라”(눅1:35) 마리아는 즉각 순종했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8) 성경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단순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다. 그 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호칭됐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에 대해 ‘주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그 어머니’ ‘네 어머니’ 또는 ”내 주의 모친” “그 모친” “예수의 모친”이라고 불리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실은 없다. 성육
전 국민이 코로나19로 대구가 생지옥 같았던 지난해 3월, 직접 트럭에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마스크를 나눠준 영화배우가 있었다. 바로 김보성씨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또 다시 대구로 달려갔던 김보성씨는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난 배우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의리 신드롬’에 빠질 정도였다. ‘의리’ 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즉 인간의 기본 인성 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기본적 인성인 최소한의 의리마저 다 무너진 듯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이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다. 형제국과의 전쟁 요단강 동쪽 나라 암몬은 요단강 서쪽 해안가의 블레셋과는 달리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 세웠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웠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23:7)고 했고,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신2:19)고 했다. 서로 미워 하거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형제가 어릴 때는
마지노선은 1934년 프랑스가 독일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要塞地)으로 근대 축성(築城)의 획기적인 축성인데 전쟁 중 독일 공군에 의해 파괴됐다. 독일군이 이 마지 노선만 넘으면 프랑스에 큰 타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노선은 넘어서는 안 될 절대경계선이다. 이것을 빗대어 우리 생활에도 마지노선을 넘었으니 어쩌니 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나? 그 선은 지켜야 할 생명선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마지노선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마지노선을 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마지노선을 범한 것이다. 일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일찍이 마지노선을 범했다. 마지노선 이전에 있어 야할 그가 그만 선을 넘었다. 그게 타락이요 범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 니라”(창 2:17) 이게 하나님의 마지 노선이다. 그런데 여자가 범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마지노선을 범한 후 그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도하심을 구합니다…우리는 영적 균형을 잃고, 절대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1996년 1월 23일 미국 캔자스 주 상원 의회 개회식때 기도하신 조 라이트(Joe Wright) 목사의 기도 내용이다. 그는 ‘다원주의’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진리를 타협하는 것과 ‘또 다른 라이프-스타일’이라며 성적 타락을 인정해 주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착취하는 '로또 당첨', 게으름을 보상하는 ‘복지’, 태아를 죽이며 ‘부모의 선택’이라고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것 등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또 권력을 남용하며 ‘정치’라 하고, 공금을 횡령하며 ‘필수경비’라 하는 것, ‘야망’이란 이름으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고, ‘표현의 자유’라는 그럴듯한 말로 경건치 않은 삶과 포르노로 공기를 더럽히는 것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존중받은 가치들을 농락하는 것에 대해 눈물로 기도했다.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사람들은 강퍅해지며 나라가 어지럽다. 이런 때에 우리의 발목을 잡은 코로나19는 진실로 눈물로 매달릴 때가 되었다는 표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인이다. 왕으로 등극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며 조 라이트 목사처럼
단순히 불신세계의 남성 탈선 문제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혹 어떤 남성이 이래저래 탈선해놓고 늘어지는 변명을 뇌 깔이고 있기에 “그건 아니올시다. 오해하시는군요.”라고 신약 성경이 답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목적은 일부일처제가 하나님 본성의 제도라는 것을 알자고 한 것이다. 구약세계는 하나님 계시의 여명(黎命) 시대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천하를 환하게 비추는 것은 신약세계이다. 그런즉 구약 여명 시대 것을 신약 계명 시대의 그대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구약 계시의 여명시대에 일부다처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구약세 계에서 일부다처제 곧 축첩은 다반사로 있었고 아무런 윤리적 개념도 없었 다.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갈이란 첩을 두었고(창16장) 야곱이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아내로 뒀고(창29, 30장) 사사기 기드온도 그랬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 멜렉이라 하였더라”(삿 8:30~31) 솔로 몬도 부하 장군의 아내들 강제로 취해 왔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신다(8:10~19). 끝없는 사랑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통 큰 양보가 돋보이지만 그 허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이기도 했다. 먼 훗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라고 하신다. 결국 이스라엘의 신정(神政) 정치는 막을 내리고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헤매던 사울 사울의 첫 등장은 좀 예상외다.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가문인 기스의 아들(1~2절), 그렇다면 남쪽을 대표하는 유다 지파도 아니고 북쪽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지파 출신이라 시기와 질투도 별로 없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 등장이 근사할 만도 하건만 아니다. 첫 등장은 ‘헤매는 모습’이다. 베냐민이라는 종족적 배경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준수한 소년’, 이스라엘 중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의 준수함과 그 위풍이 화려해서(9:2,24)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9:20)가 됐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사모하는 자’를 ‘가장 훌륭한 자’라고 번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에벤에셀의 영웅 사무엘도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된다. 너무 빨리 늙었다. 어머니 한나에 의해 잉태됐다는 것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분량에 비해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분량이 너무 짧다. 미스바 집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했다는 말씀을 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준비한다. 물론 이후에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사역은 여기가 끝이다. 앞으로는 사울과 다윗으로의 왕정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무엘의 사명(使命)이다. 왕을 세우고 왕정의 기초를 닦는 일 외에 다른 인생 이야기는 없다. 왕 세우는 일도 사무엘 입장에서는 기쁨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백성들의 요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런 게 사명이다. 사명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고, 싫어도 하는 것, 사무엘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성했고, 위대한 다윗 왕조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년의 사역이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였던 “왕을 세워 달라”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대로 할 때가 더
침례교 특히 미국 침례교회는 설교 뒤에 영적초청을 한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해 주세요.” 이에 손을 든 사람은 담대하다. 결단성이 강하다. 그러나 손을 못든 사람은 “어떡하지?”하며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하게 되면 영영 예수영접의 결단신앙이 사라진다. 불행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하면 “사랑해요”라고 말하라. 예수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영접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갈라져 있다고 하였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이 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0~12) 짐을 지고 무거워 괴로움 당한 자를 초청하고 있지 않는가? 초청에 그냥 응할걸 그랬지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이 바로 때는 때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후 6:2) 우리는 부
이해인 시인은 ‘봄의 연가’라는 시에서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겨울에도 봄/ 여름에도 봄/ 가을에도 봄, 어디에나 봄이 있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플수록/ 봄이 그리워서 봄이 좋아서, 나는 너를 봄이라고 불렀고/ 너는 내게 와서 봄이 되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언제라도 봄”이라고 봄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했다. 다윗도 드디어 그리워하던 봄을 맞았다. 인생의 봄이자 영혼의 봄이랄까? 그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에벤에셀 하나님”을 노래한다. 에벤에셀! 원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돌 하나를 세우고 불렀던 이름이다. 원어 그대로는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까지 빼앗겼지만(삼상4:1, 5:1) 결국 패배는 승리로 바뀌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물론 이 승리는 그저 한 번의 승리가 아니다. 그래서 불렀던 에벤에셀 하나님,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면 좋겠다. 회개하며 부를 이름 ‘회개’는 사무엘 사역의 첫 선포였다. 마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친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의 첫 선
천국행 길에 가장 심하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율법적 안식일과 십일조다. 예수 피 공로로 사죄받아 칭의얻고 성화과정을 거치며 재림의 구주님을 기다리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고속도로에 안식일과 십일조라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장애물은 구원사역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이었는데 누가 다시 갖다 놓았던가? 단적으로 이단들의 소행이다. 그 이단이란 누구를 가리키냐? 안식일을 고수하고, 또 십일조를 법으로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언필칭 십일 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라고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다. 십일조를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나의 불신친구는 끝내 십일조 헌금 문제로 아직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있다. 고정수입에 십일조가 첨가되어도 빠듯한 살림인데 거기서 1/10을 빼간다는 것은 경제 논리상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가 경제학 정공학도이지만. 엄격한 안식일만 하더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4시간을 무위무동(無爲無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안식교 의사는 아예 토요 안식일에 대어 놓고 의료행위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안식일 준수 못한 죄책감으로 안식교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