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을 입은 멋진 사람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엇인가 집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보여주었다. 500원짜리 은전 모양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뜯겨나 가고 찢겨진 것으로 못 쓰는 돈이었다. 그를 쳐다보니 고쳐서 사용하라는 뜻으로 보여주고 떠나가는 꿈을 꾼 후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조금 이상한 꿈을 꾸어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은화로 데나리 온과 그리스의 드라크마 은화가 떠올랐 다(마 22:19). 예수께서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후 연보궤를 향해 앉으셨다. 부자는 많이 넣는데 어떤 가난한 과부는 와서 연보궤에 두 렙톤 곧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3) 라고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드렸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두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이고 한 고드란트는 로마의 은전으로 같은 값어치의 호리로 번역되어 있다(눅 12:59). 무게는 1.7g으로 앗사리온의 8분의 1이고 고드란트의 절반에 해당된다(막 12:42).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톤의 헌금은 당시 유대에서 통용되고 있던 청동화로 가장 작은 값어치의 동전인데 오늘 우리의 동전과 같
코로나 사태로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한 분노로 거리로 나왔다. 과잉진압으로 인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죽음은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이슈를 건드렸고 쌓여왔던 분노의 뇌관이 됐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평화시위로 모이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이들은 폭동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인사회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듯 폭동에 희생이 되기도 한다. 성도님의 가게가 부서지고 도난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 불안한 현실은 뉴스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코 앞까지 훅 침범해 들어왔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와 파워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힘은 영향력이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며 산다. 우리가 선 자리는 그 위치에 따르는 권위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리더로서, 직장의 일원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로서 힘을 갖는다. 심지어 아주 어린아이들도 어떻게 해야 부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자녀들이 가진 파워가 부모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가
어느 날 밤 뉴스를 보니 코로나19 의 세계적인 확진자 수가 지난달보다 1,000만 명이 증가 되어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그날 이탈리아 에선 1만 1000명이 발생했다고 했으며, 각 나라에선 수천 명 내지 수백 명이 늘어나다보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전염 병이 전세계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팬데믹이 됐다. 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의료진은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두기, 손 씻기, 환기시키기 같은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확실한 백신이나 치료약이 좀 더 빨리 개발되길 모두가 안타까움과 조급함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다면 심각한 현재의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거나 근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지인이 건강이 좋질 않아서 혹시 코로나19에 전염된 것이 아닌가 염려하며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 다. 진단 결과 코로나19가 아닌 폐렴 증세이니 다행이라고 의사가 말해주었다. 그 이유는 폐렴이나 결핵 같은 세균성 질병은 항생제가 있어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사스, 메르스, 에볼라, 에이즈 등과 같은 바이러스 질병으로 확실하게 효능성 있는 백신이나 치료약이 아직 없어서 치료에 어려움이 많다고
어느 날 아침에 아내가 주방 에서 큰 주전자에 물을 넣었다 뺐다를 여러 번을 반복했다. 콩나물을 기른다는 것이었다. 시루나 콩나물 기르는 그릇이 아닌 주전자에 콩을 넣고 아침 저녁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한 결과 주전자 속에는 수북한 콩나물이 담겨있었다. 신기하듯 콩 담음 그릇에 물을 부으면 다 빠져 나간 것 같은데 어느새 콩나물이 자란 것이다. 진도에서 목회를 하며 시작했던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학교가 이제 초등학력 인정 문해학교가 됐고, 이제 올해만 마치면 정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벌써 삼 년이 지난 것이다. 삼 년 전 처음 문해학교를 시작한다고 하니 “우리가 언제 삼 년을 공부한데요? 이제 공부해서 뭐에 쓴데요?”라고 하던 분들이 벌써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도 “해도 소용없어요, 문만 나가면 다 잊어 부러요, 선상님만 헛수고 하는 거라요.”고 하셨던 분들이다. 그때마다 “콩나물 기를 때 물주면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날 뚜껑 열어보면 콩나물이 자라있는 것 아시잖아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 같지 않고 배우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쉽고 빠른 연세에 있는 문해학교 학생들에게 콩나물에 물 주
물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무엇이나 잡아들이는 본능이 발동한다. 구제하러 들어갔던 사람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기에 함께 익사하는 경우도 있기에 구제자는 뒤늦게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일찍 절망하고 죽음의 물속으로 들어가자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익사하기엔 아직 빠르다. 익사하려 하지 말라. 살기를 포기하지 말라. 그냥 기다리다 보면 안전한 구원자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일찍 포기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자기가 자기에게도 너무 일찍 포기하지 말고 그 측근자도 상대에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도 지인을 모처럼 거리에서 만났다. 반가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지인의 딸을 문안했다. 그 지인의 딸은 30이 넘었는데 어린 시절 부터 뇌성마비로 인해 완전히 신체장애 자였다. 딸을 휠체어 태워 부모님이 교회에 들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은 그 딸의 아버님의 말씀이었다. “딸을 데리고 이번 추석에 설악산관광을 갔더니 내 딸이 너무 좋아하지 뭡니까” 나는 이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아주 감동적이었다. 부정(父情)의 발로! 건강한 남의 집 딸이라면 가정을 꾸리고 손자를 뵈어드릴 테지만 이 집 딸은 그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나 이
1960년 3월 대학교에 입학하니 교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1학년은 신입생 풋내기로 “Freshman”, 2학년은 조금 배웠다고 “Sophomore”, 3학년은 아직 손아래 미숙 “Junior”, 사가독서학년은 손위의 잘난 고참 “Senior”라고 했다. 인상 깊은 말이었는데 2학년에서 3학 년에 걸쳐 시건방진 나는 별도의 사전 없이 읽을 수 없는 미국인 최초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 의 걸작 “사랑과 법“(Love and Law)이란 책을 읽고 학보에 논문을 기고했는데 뒤돌아보면 정말 나의 인생과 목회에 가장큰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의 글이 됐다. 지난번에 기고한 글에 이어 “사랑과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먼저 칼 바르트(Karl Bart)는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로 그의 교의학(Dogmaitc)에서 뜻깊은 문구를 인용하면 “다만 믿음”(Sola Fide)으로 “다만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우리의 응답인데 “유한은 무한을 포함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ax infiniti)였다. 신대원에 들어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몇 마디 단순한 신학사상의 표현이 오늘에 이르는 감명이겠다.
아내 할멈은 기침약을 먹고 대낮에 잠에 떨어져 버렸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복음송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잠 깨우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고요의 방 분위기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던 아내가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싱크대로 달려가면서 또 외친다. “어쩌면 좋아 솥이 까맣게 다 타버렸네” 나도 달려가 보니 아들이 선물한 독일제 솥이 검게 타 버렸다. 기침에 좋다는 무슨 열매를 끊이려고 올려놓은 솥이었는데 아내의 곤한 잠 때문에 시간을 놓쳐 솥이 타 버린 것이다. 연기도 났다. 나도 코가 막혀 그 냄새를 잃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여기 있다간 아내로부터 불똥을 맞을 테니 도망치자. 주섬주섬 대강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허겁지겁 아파트 문을 열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뭘 내가 잘못한 것이나 있나 생각해 봤다. 그 솥이 타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범인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함께 있으면서 왜 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 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구리지구촌교회 목양실로 피난처를 정했다. 후유, 잘 도망쳐왔지. 계속 미련스럽게 집에 있었더라면 아내 할멈으로부터 무슨 책임추궁에 꾸지람을 받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은 현대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양대주류로 해석된다. 그 하나는 사랑의 본래 어의가 자기희생으로 보는데 이것을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입장으로 보면 그는 “인간의 모든 양상이 상호 간의 이해타산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사실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상호관계가 희생적인 사랑과 모든 양상의 상호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는 논증에 있어서 니부어는 “상호간의 사랑 개념이란 상호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라고 비평했다. 다니엘 윌리암스(Daniel Williams)의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소망’(God’s Grace and Man’s Hope)에서 “현재 인간의 상태가 악독과 곤궁이 그리스도의 영역 내의 선과 혼합해 진치고 있다. 사실적으로 모든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과 혼합하는 것이다. 욕망은 가능한 무의식을 포함하는데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을 위한 자기의 욕망으로 나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에 의하여 찾아진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는 우리가 진정한 상호애의 생활을 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따르면 “모
1953년 1월 5일 그땐 한국전쟁 중이었는데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이 공연됐다. 무대에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있는 황량한 무대였고 특별한 줄거리나 극적인 사건도 없는 작품이라서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놈의 고도(Godot)가 한국에서는“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가 임영우 83세 선생께서 한평생을 바쳤으며 한국 초연 50돌을 맞아 공연하기도 했었다. 무엇을 기다릴지는 자유라고 했다. 무엇인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리는 자이다”라는 교훈이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란 기다리는 인간과 기다림이 없는 동물이었다. 저자가 어떤 질문에 답한 것을 보면 고도(Godot)의 정체를 알만하다. 사람들이 고도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같은 소동은 베케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의 질문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도는 고도라는 이름뿐 텅 빈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기다림의 대상은
어릴 적에 동생과 싸우면 어머니는 소리 질러 꾸짖고 말린 후 저녁에 일터에서 귀가하신 아버지께 이야기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께 사실 경위를 아뢰고 백양나무 회초리를 꺾어오게 해서 동생이 다섯 번 맞으면 나는 열 번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생이 까불고 소리치며 달려들더라도 형으로서 동생을 사랑하고 참고 용납하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철이 든 뒤에 깨달았고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체험하게 됐다. 수많은 얘기가 우리 형제들이 자라면서 있었지만 아들 다섯, 딸 다섯 10남매를 낳아 가난한 농촌 개울가에 힘들게 논을 만들어 자식들을 양육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오른다. 우리들이 어려서 만만한 게 엄마로 투정 부리고 애먹일 때 “야 이놈의 손들아! 너희들이 자라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키워보면 그때야 내 심정 알 거다!" 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울려와 있다. 한국전쟁이 예고도 없이 일어난 것이나 일본이 미국과 전쟁 때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침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전쟁은 법 없이 감행됐다. 성경을 배울 때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사랑이라 배웠다. 율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율법이 분노한다고 배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