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있는 분노의 뿌리를 이해하는 작업은 분노조절의 첫 걸음이기도 하다. 내가 별것도 아닌 일에 엄청나게 화가 날 때는 실수를 한 상대방의 잘못도 있겠지만, 내 안에 예전부터 숨겨진 화약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어야 분노 아래 숨겨진 진짜 이슈와 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다. 문제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 실제로는 한주먹 거리의 문제를 집채만 한 문제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한 달간 삐질 일과 5분간 섭섭할 일을 구분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덜, 조금 짧게 화낼 수 있다. W양은 상담소를 들어서면서도 씩씩거렸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집안을 다 뒤집어 놓고 왔단다. 몇 년째 졸업을 못하고 질질 끄는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빨리 학위만 마치면 얼마든지 좋은 직장에서 모셔갈 만도 한데,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간당 기본수당만 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자신도 일을 하건만, 옷가지를 정리하고 계산대에서 잔돈을 거슬러 주는, 그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순한 직업에 신물이 났다. 자기의 삶이 왜 맨날 이도 저도 아닌가 한숨만 났다. 자신의 삶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줄 것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감정이 변하므로 상황으로 인하여 행복을 잃어버리고 불행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항상 기뻐하며 행복을 잃지 않는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필자가 좋아하며 묵상하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은 현재 어렵고 힘든 고난을 당하여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붙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행복을 잃지 않으려한다. 필자는 시원한 동태국을 좋아하는데 동태국을 끓일 재료들을 하나하나 따로 보면 동태, 무, 마늘, 고춧가루 간장, 파, 조미료를 따로 따로 먹으라면 먹을 수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솥에 넣고 푹 끓여내면 시원하고 맛있는 동태국이 된다.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따로 보면 다 힘든 일
지금 이 시대는 분별력이 없어서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이나 선악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고, 전혀 반대로 선악에 대한 자기의 모든 지식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고…”(빌1:9~10; 롬2:18). “빛의 자녀답게 주를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라”(엡5:9). 이러한 관점들은 하나님의 의지의 단순한 인식이 모든 반성을 배제하는 직관의 형식 즉, 첫 번째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야 하며 또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의 단순성을 심리학적으로 의심하며 불순종하는 것도 근본적인 수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하나밖
나는 이 놀라운 고백적 선포 앞에서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학훈련을 마치고 교회 현장으로 돌아가 열심히 성도들을 섬기며 목회사역을 했다. 설교와 교육, 목회행정 등 부족함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잘 성장하였다. 적어도 주일에 만나는 성도들이나 교회 상황만 보면 그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성도들의 교회 밖 삶의 주중 생활 현장을 조금만 들춰보면 각양 갈등과 상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전략이 교회’라는 독일의 목회신학자 본회퍼의 선포가 나의 가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선포는 나를 ‘친구’로 대하며 기독교·목회상담의 멘토요 코치가 되어준 브리스터(C. W. Brister) 박사와의 만남과 대화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교회야말로 내부 성도들은 물론 지역사회 주민들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도록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해야 할 소명과 책임이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치유적 돌봄과 상담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교회였다. 이것은 한두 사역자나 훈련된
요즘 우리사회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이렇게 가다가 어디까지 가려나 싶어 탄식이 나오도록 사회 규범이나 윤리도덕적 가치기준이 흔들리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으로 이해하는 보편적인 가치마저 무너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SNS를 통해 성인들을 유혹하여 성매매를 하거나 성매매를 시키고 돈을 갈취하는가하면 주부들 가운데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성 매매를 하고도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동성애자들이 증가하고 동성애를 인정할 뿐 아니라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동성애를 세상에 알리고 확산시키려고 서울 한복판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며 동성 간의 성행위가 좋다며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행사를 문화 축제라는 이름으로 판을 벌리고 서울시는 허용하는 세상이다. 낙태는 불법이지만 인생을 엔조이하는데 불필요한 쓰레기를 정리하듯 가볍게 해치우며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할 지도층 인사들마저 앞으로는 명예를 중시하되 뒤로는 뇌물과 성 접대를 받고 성 매수를 하다가 세상에 알려지는 추한 모습들로 사회의 도덕적 가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다. 사람들이 세워놓은 사회규범이나 법은
최근에 복고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이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한 가정 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갈등을 다루었다. 갈등은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들만 남겨놓고 급히 친정에 다녀와야 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어머니가 부재한 잠시의 시간 동안 집안 전체는 쓰레기통으로 돌변한다. 집에 남겨진 남자들의 세상은 혼란과 자유의 공간이 된다. 과자 부스러기가 사방에 흩어져도, 팬티만 입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도, 아무렇게나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누구하나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어머니 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자 이제 맘대로의 편안한 세상에 비상이 걸린다. 남겨졌던 남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집안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어머니가 자기들을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들끼리도 잘 지냈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들을 대견해한다. 그런데 이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반응이다. 꽤 깨끗한 집안과 지시대로 비워진 냉장고를 둘러보던 어머니는 영 시큰둥하다. 어머니의 저기압을 눈치 챈 남편과 아들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한 이웃친구의 조언에 따라 막 내아들은 집안
어느 남편이 결혼생활 20년만에 아내가 사랑없이 자신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20년동안 아내는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고 숨소리조차 싫은 친정 아버지 곁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기 위해 도망치듯 당신과 결혼했다”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해 왔습니다. 남편은 그저 사랑스러운 아내의 투정으로 여겼습니다. 아내가 늘 남편의 일에 딴지를 걸을 때도 아내가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그러려니 이해하며 넘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지난 20여년 동안 아내와 함께 살아온 삶을 곰곰이 되돌아보니 비로소 아내의 지지나 인정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언제나 잘못하는 사람이요, 언제나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몇 번의 예외 외에는 아내가 이웃들에게 남편을 칭찬 한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아내는 언제나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였습니다. 남편에게 ‘잘했어요’나 ‘그렇게 하세요’를 해 본적이 별로 없는 아내입니다. 언제나 ‘안되요’ ‘하지 말아요’ ‘그래서 되겠어요?’ 입니다. 그래도 남편은 스스로 자존감이 높고 이웃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며 살았기에 아내의 이러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이라는 단어는 가족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고 가족의 달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정과 가족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먼저 가족(家族)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가까운 혈육들로 이루어지는 집단이며 가정(家庭)은 부부를 중심으로 그 부모나 자녀를 포함한 집단과 그들이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인 집을 포함한 생활 공동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가족에게 있어서 집이라는 공간과 생활 공동체란 관계와 체계가 포함되는 것이 ‘가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가족의 체계를 이루며 그 체계는 부부를 중심으로 자녀와 손자와 손녀로 이루어진다. 손자와 손녀가 있다는 것은 이미 부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다는 말이며 그 자녀들은 자신들과 동격인 부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면 조부모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자녀는 누구도 자신들이 부모를 선택해서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의 결과로 자녀는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처음부터 아들 딸 구별하여 낳을 수는 없다. 단지 초
갈등은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갈등한다. 갈등에서 오는 좌절감, 분노 또한 당연한 감정이다. 그런데 양파처럼 겹겹이 싸여있는 분노의 껍질을 까보면 꽤나 의외의 뒷모습이 숨어 있다. 상담을 오는 분들 중의 대부분은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지 구체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기에 바쁘다. 분노의 시초가 되는 일상의 작은 해프닝들에 대해 설명한다. 시간을 안 지키고 계속 늦는 목장 식구 때문에 짜증이 난다, 아무리 치우라고 해도 여전히 돼지 우리인 딸 방 때문에 폭발했다, 내 카카오톡에는 답글을 안달아주는 몇몇 그룹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다, 말이 안 통하는 배우자 때문에 열 받는다, 연중 평가서에 부정적인 코멘트를 날린 상사가 꼴도 보기 싫다 등등 내가 화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한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여러 갈등의 사건들을 가만히 들어다보면 비슷한 사건들이 자꾸 반복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돈 문제, 소통의 문제, 시댁이나 처가의 문제, 자녀교육 문제, 종교문제, 중독의 문제 등등 갈등과 분노는 늘 비슷한 문제로 터지기 마련이다. 자꾸 싸우는 문제 가지고 또 싸우고 전에 열 받았던 비슷한 일 때문에 또 화가
노란 유채꽃과 진달래가 만개하여 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계절에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도시 경주 보문호의 분수대는 하늘 높이 솟구치고 공원은 녹색 옷으로 갈아입은 보문단지에 있는 켄싱턴리조트에서 침례교단 목회자부부 영적성장 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모여오신 목사님 사모님들이 목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을 반기며 삼삼오오 모여 담소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찬양단의 인도를 따라 뜨겁게 찬양하며 스트레스의 실타래를 풀어 내리며 은혜와 감동의 시간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필자도 아내와 지방회 목사님 사모님들과 함께 참석하면서 다른 일이 있어 오후 시간은 울산으로 내려가 볼일을 볼 생각이었으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첫 시간부터 열 시간 연속기도회와 저녁 집회까지 다 참석하며 선후배 목사님들이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장대회에는 젊은 강사들이 대거 등장하여 매시간 성령 충만한 은혜와 신선함을 제공한 성장대회였다는 평가를 필자뿐만 아니라 주변 목사님들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초교파적으로 성령운동을 주도하며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침례교단 부흥사 목사님들이 한 분 두 분 은퇴하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