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카톨릭교회는 교황의 말을 성서의 권위와 동일시하였고 교회는 의식화 되었고 성자들의 유물까지 숭배하는 미신 및 우상화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위한 방법으로 속죄부 판매를 질타하면서 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6개조의 항의문을 부착한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장을 받고도 불태우고, 그 후 브름스에서 열린 교황청의 협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사생결단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교직자들의 귀족화에 대해 “백성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사는데 성직자들이 비단옷을 입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꾸짖었던 죤 위크리프는 결국 이단자로 정죄되었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주장한 죤 후쓰도 결국 화형을 당했다.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7화(마24)를 경고하셨던 예수님께서 오늘의 현실을 보시고 무엇이라 책망하실까? 교권투쟁을 위해 감투야합을 마다하지 않고, 불의와 불법, 부정부패에 세속적 방법을 감행하는 중세교회의 실상을 마치 답습하기라도 하는듯한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시대의 종교개혁을 외칠
내 출생지는 아니지만 나의 어린 시절 대부분은 충남 예산면 오가면에서 자랐다. 집 앞에는 20여 그루의 감나무가 있어서 감에 얽힌 사연이 많다. 봄철 감꽃이 노랗게 피면 그 감꽃도 먹었고 감꽃을 실로 꿰어 목걸이를 하면 감꽃 향기가 온 몸에 배였다. 끔찍한 기억은 소금물에 우린 땡감을 너무 많이 먹어 진땀을 흘리며 아무리 힘을 주어도 변이 나오질 않아 엄마 엄마 소릴 지르면 어머님은 들기름 바른 나뭇가지로 항문을 후벼 배변의 문제를 해결 주신 것이다. 가을철 감을 딸 때면 높은 가지는 내가 다람쥐처럼 이리 저리 넘나들며 감을 따 밑으로 던지면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어른들이 내 발밑에서 내려다 보여 으쓱했던 추억도 있다. 긴 대나무 끝을 V자로 파서 감가지를 꺾어 따는데 어떤 감은 대나무가 비틀려도 꺾이지 않는 감이 있는가 하면 어떤 감은 건드리기만 하면 툭 떨어지는 홍시감도 있었다. 박살난 홍시감은 잘만 하면 윗부분은 먹을 수 있어서 안타까워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영혼구원이 감 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영혼은 5년 10년이 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를 전도하다 내가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영혼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 앞으로 나온다. 스펀지
요즘 세상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보다는 어느 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느냐가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아무리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남들이 다 그러는데….’라는 단서를 붙이기도 한다.여론(與論)은 태풍과 같아서 거세게 밀어 올 땐 큰 힘을 갖지만 지나고 나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는 속성이 있다.안철수 씨는 그 여론의 기세를 몰아 이 나라 대통령 후보로까지 물망에 올랐지만 여론이 꺾이자 후보사퇴를 선언하고 지금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어 시골로 내려갔다. 각 언론사마다 여론조사를 발표한다. 어느 지역에서 어느 만큼의 지지를 얻고 있는지를 예측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무엇으로 (전화, 편지, sns 등) 몇 시에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문항이 어떤 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문재인과 안철수씨는 지지도냐 적합도냐를 갖고 피 말리는 논쟁을 펼쳤다. 온 국민이 무얼 묻고 있는지 다 아는 판에 문재인? 안철수? 그렇게만 물어도 될 일인데…. 인류 역사에 여론의 최대 피해자는 나사렛 예수
서해안 괭이 갈매기들은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알을 낳고 오랜 기간 그 알을 품으려면 경사면이 아닌 평평하고 아늑한 자리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국 광저우 지하철에서 자리다툼으로 60대 노인과 20대 청년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힘이 달린 노인이 청년의 귀를 물어뜯는 사진이 인터넷에 화제다.수많은 직장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출근 전쟁을 벌이며 바쁘게 뛰는 것도 한 자리 높게 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것, 결국 자기 한계점에 머물면 그 자리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다가 씁쓸히 퇴직한다. 언제나 자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므로 북한의 인민 대회장에 누가 몇 번째 자리에 앉았는가는 중요한 관심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누가 크냐?’고 자리다툼을 벌였다. 어떤 제자는 잽싸게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자기 아들을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치맛바람을 일으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은 제자들은 분을 내었다. 예배당의 앞자리는 어떨까?열심히 공부하려는 학생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말씀을 집중하듯 앞자리는 은혜가 쏟아지는 명당자리요 금자리다. 대부분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뒷좌석
내 바둑 실력은 40년 전 5급, 지금은 손 뗀지 오래니 감각이 많이 둔해졌을 것이다. 바둑에 큰 대마(大馬)가 몰릴 때 하수(下手)의 눈에는 아무리 오래 고민해도 그 묘수가 보이질 않아도 고수의 눈엔 금방 보인다. 설령 그 싸움에서 진다해도 하수는 그 사석(死石)을 이용해 반대편 싸움에서 더 많은 집을 차지하는 큰 판을 볼 줄 모르니 하수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인생에 고수들을 멘토로 삼고 그들의 풍부한 인생 경험들을 전수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 아쉬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나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온 나는 인생에 멘토가 있는 사람이 참으로 부러웠다. 넉살이 없어 그런 분들을 스스로 찾아가지도 못한 채 시골 냇가에서 개헤엄 치듯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어언 60이 넘어서니 젊은 목회자들의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어떤 전문가를 배출하는데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기관이 연수원이다. 사법연수원, 기업연수원, 교사연수원, 공무원연수원….영혼을 포함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전반을 상담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을
군 제대 후 KT에 입사하여 직장 예비군으로 편성되었을 때 첫 느낌은 민방위복 입은 40대들이 너무 늙어 보여 이상했고 지금은 반대로 군복 입은 젊은이들이 너무 애송이같이 보여 이상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이 달라 보이나 세상은 변할 리 없고 내가 변한 것이 분명하다.아내가 상의도 없이 내 환갑(還甲)잔치를 베풀고 교인들을 식당으로 초대했다. 내 생일을 축하하겠다는 마음일 터이니 뭐라할 순 없으나 솔직히 고마운 마음도 별로였다. 요즘 누가 60을 오래 살았다고 잔치하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초청장 없이 식사나 한번 하자하고 여행이나 다녀오는 것인데 굳이 이런 자리를 베푸는 것이 3년 후 본인의 회갑잔치를 기대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도 은빛대학이라 부르는 마당에 누가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까마는 그러나 늙음을 보톡스 주사로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늙은이가 청바지 입고 파마하여 고부라진 머릿결로 이마를 가리는 것도 추해 보인다.환갑(還甲)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합쳐서 60갑자(甲子)가 되므로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 왔다하여 회갑(回甲)이라하니 한마디로 한 바퀴 다 돌아온 인생이니 살만큼 살았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요즘은 ‘옆집 아저씨’란 말이 친근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하도 뒤숭숭한 일들이 많은 세상이다 보니 어린 초등학생 성폭행범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진 않나 하는 염려가 있는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신 성도님들에게 담임목사의 첫 인상을 물으면 ‘옆집 아저씨’같다고 한다. 여기서 ‘옆집 아저씨’는 그 만큼 격의 없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특별히 잘나지 않다는 의미이나 옆집에 사는 것만으로 나를 알아주고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는 정겨운 분이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목사에겐 어딘가 성도와는 다른 중세 수도사 같은 청빈함과 고결한 영적 권위와 감춰진 헌신을 기대하는데 만천하에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무엇을 감춘다고 감춰지는 세상도 아니지 않는가? 포장의 한계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 타의에 의해 강제로 벗겨진 포장보다는 스스로 지금 벗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되어 나는 강단에서 나의 허물을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으려 한다. 삶은 곧 내 신앙이다. 삶으로 증명된 것만 확신있게 증거 할 수 있다. 교회와 직장에서 교회와 가정에서 내 모습이 다르다면 그는 위선자다. 가운 입은 강단 위와 아래가 다르다면 그는 위선자다. 주님은 창녀와 세리를
“하나님, 능력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 주여, 내게 능력 부어주시옵소서오 능력, 능력, 능력을 충만하게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했다.“여러분, 이새벽에 저는 ‘능력 좋아하네!’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라고 했더니 모두들 웃었다. 그 당시 유행어가 “…좋아하네”였는데 저는 그 앞에 능력을 넣었기 때문이다.1964년 신입생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와 거의 모두의 부르짖는 기도가 능력달라는 것이었다. 저는 신태원(정파)에 입학했는데 교도부장을 시켰다. 처음엔 큰 감투인가 했더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을 치고 기숙사 복도를 두어번 왕래하며 신학생들의 새벽기도회 참석을 알려주는 힘든 심부름꾼이었다.“매일 능력달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는데 능력받아 뭐할겁니까?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했는데 조그마한 십자가도 안지고 어떻게 능력만 달라는거요? 내라도 능력 안 주겠구먼! 능력좋아하고 있네…!” 이런 시건방진 설교를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나를 두고 설교한 내용이었다. 한동안 신학생들이 절보고 ‘능력 좋아하네’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진정 십자가의 능력이 필요한 자는 저였다. 2. “멸망케할 이단”-박씨와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은 주일저녁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을 단위 영농문화에서 자연스런 형태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24시간을 다양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산업사회 구조 속에서 이제는 예배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교회를 오고가는 시간 낭비가 많고, 자녀들과 함께 식사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주일저녁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주일 저녁 유명한 강사님을 초대해 놓고 참석률이 너무 적어서 죄송한 마음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개선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주일 오후 2시로 변경하자는 의견이 61% 예전방식대로 저녁에 모이자는 의견이 31%로 변경하자는 의견이 배나 많았습니다. 오후 2시로 변경할 경우 어떤 형태로 모임을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는 예배 32%, 제자훈련 44%, 기도회 12%, 찬양예배 5%, 목장모임 2%, 기타 4%였습니다. 예배와 제자훈련의 혼합된 형태로 드려지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제자훈련은 1년에 봄, 가을을 학기제로 운영하고 한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다양한 예배 형태를 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시간과의 싸
중학교 음악시간 밖에 많은 비가 내리거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여느 선생님과는 달리 깔끔한 용모의 음악 선생님은 클래식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까까머리 중학생들을 눈 감으라 하시고 이 곡을 감상하게 하셨다. 시인과 농부 Poet Peasant (Dichter und Bauer)는 주페-Franz Von Suppe (1819~1895, 오스트리아, 작곡가. 지휘자)가 칼 엘머의 대본에 의해 1864년에 작곡, 초연한 오페라타의 제목이다. 지금은 서곡만 관현악의 명곡으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곡의 진행은 느리고 엄숙한 멜로디가 밝아오는 새벽을 깨우고 곧 이어 전원의 아침 햇살을 연상시키는 바이올린 곡이 잘 자고 일어난 이불 속의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갑자기 빠른 행진곡이 한 여름 밤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와 같이 격정적인 분위기로 급반전된다. 그리고 다시 잔잔한 호수의 수면 같은 왈츠가 전개되고 그 호수에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듯 행진곡의 빠른 템포는 듣는 이의 숨을 멈추게 하고 아쉬움으로 끝난다.어제 비전센터 3층 철근 공사장에 올라가 봤다. 아직은 어지러이 널려진 현장이지만 내 마음은 벌써 이 눈높이에서 앞산을 바라보며 이 곡을 감상하면 어떨까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