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정치의 잘 잘못을 따지려 하거나 어떤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난할 의사가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보여준 치졸한 계파 갈등과 어지러운 20대 국회의원 선거로 인해 우리사회의 상식과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면서 한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은 공천방식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정부 여당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당 중심의 하향식 공천방식 대신 상향식 프라이머리 방식을 채택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동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가 당이 정한 새로운 방식을 거부하고 종전의 공천방식대로 공천 작업을 추진하겠다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에 대해 당 대표는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으나 선관위원장은 선관위는 독립기관이므로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고 당대표를 포함해서 모든 소속의원들을 면접까지 하면서 선관위 방식으로 공천을 밀어붙였다. 참으로 서슬이 퍼런 권세였다. 그러나 국민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선관위는 당이 정한 정책 안에서 공천과 선거를 수행 감독하는 한시적 기구이므로 당의 정책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업무수행 과정과 결과를 수
새벽이슬-15 충성된 종 ‘엘리에셀’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단연코 아브라함의 종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창15:2).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 가서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특명을 받은 종인 엘리에셀은 비록 늙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엘리에셀(도우시는 하나님)은 자그마치 아브라함 밑에서 최소한 60년 이상을 종으로서 충성을 다한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의 표본입니다(고전4:2). 예수님께서도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복이 있으리라”(마24:45~46)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3:10~11에는 집사를 세우는 기준으로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분을 인정상 주고, 시험든다고 주고, 대접상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엘리에셀같이 충성된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만 소망이 있으며 미래가 있습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엘리에셀같은 충성된 일꾼이 세워지게 하소서! 엘리에셀의 두 번째 특징은 그는 설득력있는 말
말과 언어에 대해서 여러 번 글을 올렸거니와 목회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조심해서 사용하며 계몽해야 할 표현 몇 개를 더 하고자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를 낳아준 육친의 어버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아버지와 다름없이 친근한 어르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근래, 속세를 떠나 홀로 사는 기인(奇人)들을 찾아가서 대화와 체험을 나누는 방송 프로그램 등에서 아버지 호칭이 오, 남용 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생면부지의 산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사회의 법도와 통념을 벗어난 일이며 듣기에도 민망하다. 아버지 대신 선배님, 어르신, 노인장, 또는 아버님 등으로 불러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을 나타낼 때 폭넓게 사용되는 호칭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려서 사용해야 한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어머님이라 하든지, [누구]어머니, 아주머니, 어르신, 여사(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 하겠다. “형님”은 친근한 선배에 대해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근래에는 남용이 심해 듣는 이를 식상하게 만든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공연히 형님 형님 할 것이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또 왔습니다!” 박종수 씨는 예사랑 교회에 부임이후 3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 예배보기보다는 돈 받으러 오는 단골손님이다. 구룡마을 무주택 지역에 모여 지내는데 주일만 찾아온다. 지난달에는 저가 미국 가고 없을 때에 왔다 갔다며 오늘은 말도 없이 내 사무실문을 밀어제치고 들어왔다. 예배시간이 남아있어 대화했다. “작년에 내 시킨 대로 요사이는 일을 하고 있느냐?” “예 파지 줍기를 열심히 하는데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수입이 됩니다. 그래도 동료들과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오늘 또 이렇게….” “그래 시킨 대로 놀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지!” 교회마다 주일에 돌아다니며 구호금을 받기보다는 지금 65세이고 건강할 때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살며 주일은 꼭 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엄중히 충고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언젠가 비오는 날 신당동에서 손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노모 아주머니가 힘들어 하기에 뒤를 밀어주며 따라 올라갔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쇠약한 할머니도 매달 50만원이나 수입이 된다고 했지. 가게들과 파지수집 예약을 하고 다만 1,000원이라도 나눠주면 가게 주인이 잘해 준다고 하던데, 자네도 그렇게 해서 앞으로 10
지난 수요예배를 드리며 내겐 다소 충격이었던 중요한 묵상 하나, 요한복음 6장15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는 표현. 그날 따라 그 말씀이 왜 그리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는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의 능력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를 ‘선지자’로 고백함을 넘어 ‘임금’으로까지 삼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시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자리를 떠나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내용이다. 왜일까? 주님은 이 땅의 선지자로도 오셨지만 왕이 되기 위해서도 오셨는데, 왜 그들의 원함을 뿌리치고 떠나버리셨을까? 백성들이 알아서 왕이 되게 해드리겠다는데도 왜 주님은 거절하신 걸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왕과 주님이 원하는 왕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고픔과 압제를 벗어나게 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지만, 주님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영적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원함’의 차이가 주님의 ‘떠남’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니 이는 왠지 우리의 모습도 비추는 것 같아 섬뜩하다. 아무리 우리의 원함이 간절하여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 성경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독 에녹만은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유념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만은 특별히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 때 당시 평균수명의 절반도 살지 않은 상태에서 더 좋은 곳으로 빨리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5:24절에 이렇게 에녹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동행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세상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한,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통과하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길 정도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일까요? 2012년 3월, 저희 집에 큰아들이 어느 날 아무런 한마디 예고도 없이 “아버지, 저 장가가고 싶습니다.”라고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예견치 못한 고백을 들
또한 이들의 “간접적인 신앙적 후예들”에는 침례교인들(Baptists), 퀘이커교도들(Quakers,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크리스천 교회(Christian Church),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 교회(Brethren in Christ Church) 그리고 제자들(Disciples)이라 불리우는 교회들 등이 있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Free Church) 혹은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III. 초창기 침례교운동과 그 성격 1. 초창기 침례교운동 영국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rists)의 교회였던 게인즈보로 교회(Gainsborough Church)의 담임목사 존 스마이드(John Smyth)와 그의 교우들은, 영국국교회와 왕실로부터의 핍박을 피해 1607년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집단이주를 하였다. 암스테르담에서 빵공장을 운영하던 메노나이트 교인인 얀 문터(Jan Munter)라는 사람이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자신의 빵공장에서 기거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몇 년 전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상영되었던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가슴 아퍼하며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적 이 있습니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울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함을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아직도 차가운 게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국의 5 만여 교회 중에 장애인 사역부가 있는 곳은 불과 300 여개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장애인 사역은 마치 미전도종족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거의 방치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선교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시설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을 배려한 것을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4월 20일은 국가가 정한 장애인의 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지난 4월 17일을 장애인 주일로 지정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장애인에 대한 설교나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교회들이 상당수가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한
장기臟器기증 무릇 생명체는 태어날 때 받은 몸으로 한 생애를 살다가 영혼이 떠난 육체는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거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죽음 후에도 자신의 몸의 일부를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장기기증이다. 장기기증은 생존자끼리도 가능하지만 대게는 우리 몸에서 영혼이 떠난 후, 즉 뇌사(腦死)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사후기증이다. 잠시 다른 나라의 장기기증 정책을 살펴보았다. 외국의 장기이식 현황 스페인은 국가적으로 국립병원을 통해 장기기증 관련 의료인을 양육해서 코디네이터로 활용하며, 프랑스는 매년 6월 22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정하고 장기 기증을 거부하지 않는 국민은 모두 기증 서약자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으며, 미국은 대부분의 주(州)에서 운전면허증을 교부 할 때 기증 여부를 물어서 기증동의자는 면허증에 기록한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48%가 장기기증 서약자이다. 국내 장기이식 현황 우리나라는 1991년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박진탁 이사장)가 결성되어 2014년 말까지 3,770건의 장기 이식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2015년 말 현재 대기자가 26,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합의된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구조가 다양해질수록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성공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안에서조차도 교회나 교단행사에서 누구누구는 성공하셨다고 침이 마르도록 축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가하고 부러워하는 그 성공이 참된 성공인가? 우리 속담에 관 뚜껑을 닫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논하지 말라는 말처럼 우리가 평가하는 성공이 진정성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감히 성공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성공이라는 결과물의 실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성공이란 한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받는 갈채인지 그 사람의 명예나 경제적인 풍요인지? 만일 이런 것의 성취가 성공이라면 이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니 모세야 말로 성공한 인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