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믿음의 사람은(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 앞에서 옷을 찢어 슬픔과 분노를 표시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마지막 한 번만 순종하면 되는데, 그 한 번의 믿음이 없어서 무너지는 이스라엘이 너무도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신다.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화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우리는 이스라엘의 원망하고 불평하는 음성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희망의 메시지를 비교하면서 선명한 차이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평은 늘 과거를 주제로 하고 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미래를 주제로 해서 소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끝마다 애굽을 말한다. 애굽에서의 생활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 기고는 지난 7월 1일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열린 (사)침례회 포럼(이사장 지덕 목사, 대표회장 이봉수 목사)에서 발제된 원고를 바탕으로 요약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주I. 서론현재 전 세계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양분되어 있다. 15개 국가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반면에, 2012년 보고서에 의하면 78개 국가는 동성애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한국에서도 동성애를 옹호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은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2013년 5월 미디어리서치에서 조사한 결과 73.8%가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답했고, 2013년 10월 동아일보에서 조사한 결과 78.5%가 동성애자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고 답했다. 동성애는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性)을 지닌 사람들 간의 성적 끌림 또는 성적행위를 뜻하며, 동성애자에게는 일반적으로 3가지 특징, 즉 동성을 향한 성적끌림, 동성과의 성관계,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이 있다. 동성애에 대한 대조용어로 남녀의 성관계를 이성애라 부르고, 동성애와 이성애를 함께 하면 양성애라고 부른다. 최근 학자들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를 총칭하여 성적지향이라고 부른다.동성애 유발
1871년부터 1900년까지 이 시기에 유럽 사회가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 전통이 유럽의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면서 생기는 문제들이었다.즉 과학, 세속화, 공업화, 자유주의, 민족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신이 유럽 사회에 소수의 지식인들에게서 노골적으로 거부되기 시작했고,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단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기독교 관습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다.19세기에 제일 먼저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자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지식 계층으로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대학교수들과 직업적 문인이고, 둘째는 의학, 법학, 저널리즘, 그리고 교육 분야에 전문가들과 도시 판매상과 상점의 주인과 같은 소부르주아들이며, 셋째는 농토에서 공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대대적인 인구이동을 통해서 정통적인 생활 근거지를 떠나면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났던 일부의 도시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이들은 마르크스 사회주의로, 실증주의자로서 휴머니스트로서, 또는 종교의 역할을 하는 국가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 일부는 막연한 범신론에서 나머지는 단순한 불가지론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똘레랑스(tolerance)”란 타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프랑스어이다.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된 조직이나 공간 내에서, 그 구성원 각각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 한다는 의미이다. ‘견디다, 참아내다’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말로 자연스런 본능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면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미덕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남의 의견에 동의를 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능력, 역량을 말한다.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 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이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이나 사상, 상대방의 이념 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행동의 자유를 존중 한다는 뜻이다.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해석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서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우
인간부재(人間不在)라고 한다. “사람이 없고 일꾼이 없고 인재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듣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언젠가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 중에 인물이 없다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왜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인물이 별다른 사람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땅에서 솟는 사람인가, 어디서 빌려오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인물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물이어야 하고 인물을 인물 되게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를 지도자로 인정해야 한다. 오늘의 풍토에서는 지도자가 나지도 못할 뿐더러 지도자가 지도자 될 수도 없다. 이런 세대에 어느 인물이 지도자로 나설 수 있겠는가? 정신병자 아니고는 나설 사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 우리는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부정하고, 인물을 죽이는 그런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지도자이며, 사회에서도 크건 작건 우리는 다 지도자들이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이 놀랍고 거룩한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복권에 비교하면 좀 송구스럽지만 이해를 돕기 이렇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당첨이 예정된 믿음이라는 복권을 이스라엘에게 나누어주신 것이다. 그 복권은 일곱 자리 숫자를 주최 측인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복권을 가진 이스라엘을 무척 사랑하고 계신다. 그래서 편법을 써서라도 당참이 되게 하시려고 일곱 개의 숫자단지 속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복권의 숫자대로 똑같은 숫자의 구슬만을 넣어놓으신 것이다.이스라엘이 가진 믿음의 복권의 번호는 1234567번이다. 그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첫 번째 자리수의 단지에는 다 1번이 새겨진 구슬만 담아놓고, 두 번째 자리수의 단지에는 전부 2번이 새겨진 구슬만, 담아놓고, 일곱 번째 단지까지 다 그렇게 준비해 놓으셨다. 드디어 추첨을 하는 날이 됐다. 첫 번째 단지부터 구슬을 뽑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애굽의 열까지 재앙’이 그려진 그 항아리에서 손을 휘저어 구슬을 꺼냈더니 1번이 나왔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당연한 결과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환호했다. 그 다음 ‘홍해가 갈라지는 그
한국교회의 현실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와 독선에 매몰되어 있다. 도시교회들은 대형교회로 발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실 유지에 급급해 농촌교회나 이웃교회를 돌볼 여유가 전혀 없다. 농촌교회들의 빈약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한국의 농촌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누구도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국민과 목회자들이 농민들, 즉 ‘땅의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다 외국의 농축산물 수입개방과 정부의 농업홀대 정책, 그리고 WTO의 쌀 시장 전면개방으로 인해 농업농민들은 설자리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농촌교회는 벼랑으로 내몰려 해체위기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도 외국농축산물 수입개방은 우리민족의 식량 지급률을 크게 떨어뜨리고, 나아가 농민들의 농업에 대한 의욕을 사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무상제공과 외국의 농축산물이 마구 몰려오면서 우리의 입맛은 서구사람의 입맛으로 변질되어 버렸으며, 우리농산물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농업은 바로 우리국민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농
하와이 라이나교회 서울국제침례교회와 협력으로7월이 돼면 태백의 작은 산골 마을이 분주해 지기 시작한다.폐광도시 선교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신태백교회가 올해로 13회째 맞이하는 청소년 영어 캠프 준비로 인해 바빠지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알지만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외국인을 접하지도 못하고 학원도 없기 때문에 영어라는 것을 접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런 시절 침례교 해외선교사님과 연락이 닿았고, 미국에서 온 해외선교사님과 함께 태백에서 최초로 13년 전 제1회 영어 캠프를 시작했다. 1회, 2회가 거듭될수록 산골마을의 영어 캠프는 태백 곳곳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캠프가 시작하는 첫날이 되면 캠프의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태백 시장부터 시의원들까지 참석해 축하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인력도 충분한 재정도 없는 시골에서 캠프가 시작되고 인기가 올라가자 학교며 관공서며 이곳저곳에서 여름이 되면 영어 캠프를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인기 있는 산골 마을 영어 캠프가 될 수 없는 것일까 하고 걱정하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색다른 길을 열어 주셨다.5년 전 서울국제침례교회 댄 목사님(pastor Dan)을 만나게 해주셨고,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도 침체 되어 있지만 질적인 면과 수적 성장에도 크게 둔화되고 있어 유럽의 교회들처럼 교회 건물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고 있다. 북 유럽에서는 교회가 교회로써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 됐다. 독일에서 태어난 루터교회가 덴마크를 비롯해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에서 국교로 인정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이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 된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됐고 목사는 교회에서 예배인도나 설교를 할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교회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만 크게 남아 있을 뿐이고 교회 자체는 죽어 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교회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성경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야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러한 유럽 교회 모습을 답습해가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행정뿐만 아니라 조직과 제도는 빈틈없이 일사불란하게 교회를 움직여 간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인 복음 전파와 성도들의 영적 질적 성장을 위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는 지 의심하지 않을 수
한 자매가 설교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적용하면서 간증문을 보내왔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주일 설교를 들으면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생각하며 살았는지 문득 되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기뻐하실까? 요즘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아직도 내 직업에 대해서 만족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온 것도 내 삶의 일부분이고 나는 최선을 다 한 것 같은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떤 때는 재도전해서 교사가 되고 싶기도 하고, 때론 유명한 프랜차이즈를 내건 학원을 운영해보는 것도 그럴 듯하고, 아님 만드는 걸 좋아하니 초콜릿 카페를 내볼까, 아니면 운동하는 것이 즐거우리까 헬스트레이너에 도전장을 던질까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저를 어디에 쓰실 것인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님의 영광을 삶 속에서도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를 날마다 물어봅니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의 일의 종류나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께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를 보실 것 같았습니다. 어느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