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미국을 쓸고 주름잡고 다녔어요.” 오래 전 미국에서 조금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잘 나갔나 보다.’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행에서 그것도 머나먼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싸들고 간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하층 생활을 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말대로 대부분 이민자들이 건물 청소를 하거나 뜨거운 스팀이 나오는 세탁소에서 빨래를 하며 일을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의 건물을 쓸고, 수 많은 옷을 다림질로 다리며 주름을 잡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시절, 미국 음식은 그렇게 맛이 없고, 과일도 달지도 않고, 고기도 질기기만 한 줄 알았다”며 나중 집회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렇게도 음식도 맛있고, 과일도 달고, 질 좋은 고기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하신 소리를 들었다. 계층에 따라가는 식료품이 있는 미국에서 가난했던 유학시절에 싼 것만 사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연휴에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아빠는 대학을 가지 말고 한 해 쉬라고 했으니까 용돈 안줄거야” 말하
김난도란 교수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엔 사회의 구성원으로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들, 곧 어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격려, 도전과 비전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는 천 번만큼 이나 흔들린 후에 겨우 어른이 될 수있다고 피력했으며 사회에서의 부적응, 실패, 좌절, 시련 등은 인생 여정에서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극복해야 한 다고 썼다. 어린아이와 같은 크리스천 역시 온전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추구해야할 목표를 제시해줬다. 또한 장성한 크리스천이 되기까지는 시험과 장애가 있어 수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사탄은 크리스천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시길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 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함으로 예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성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성과 관련된 죄악들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그동안 전면에 내세우기 부담스러웠던 ‘동성애’ (homosexuality) 문제까지도 거침없이 다루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동성애는 다양화되고 구체화되어 더욱 대담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현상의한 단면으로 부상한 동성애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를 접하면서 대중들의 관심과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단순히 문화적 현상으로만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 스스로의 책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동일한 성에게서 육체 적·감정적 사랑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볼까? 성서에서는 여섯 군데에서 동성애 행위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성서가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서 분명히 진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의
2. 해석자로서의 독자 이제 한 인간존재로서의 독자는 해석적 정황에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위치에 있다. 독자는 해석자다. 그는 해석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씨름하고 작업 한다. 글을 읽는 독자이지만, 그 독자는 매우 복잡한 경험 구조를 지닌 인간존재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텍스트를 관조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여러 해석자가 밝히고 있듯이, 해석은 독자의 여러 지평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베거와 불트만의 “전이해”의 개념이나 가다머의 “선 입관”과 “전통”의 개념 또는 리퀘르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의지” 개념은 독자를 순수하게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해의 출발은 이미 이전의 삶의 실존적 경험과 배경 그리고 인식적 구조의 층으로 형성되어 있는 독자가 텍스트를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독자가 해석자로서 하나의 프레임이나 구조 틀을 가지고 텍스트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근거에서 독자는 일종의 작가와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는 작가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저자가 의미하는
천국행 길에 가장 심하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율법적 안식일과 십일조다. 예수 피 공로로 사죄받아 칭의얻고 성화과정을 거치며 재림의 구주님을 기다리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고속도로에 안식일과 십일조라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장애물은 구원사역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이었는데 누가 다시 갖다 놓았던가? 단적으로 이단들의 소행이다. 그 이단이란 누구를 가리키냐? 안식일을 고수하고, 또 십일조를 법으로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언필칭 십일 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라고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다. 십일조를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나의 불신친구는 끝내 십일조 헌금 문제로 아직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있다. 고정수입에 십일조가 첨가되어도 빠듯한 살림인데 거기서 1/10을 빼간다는 것은 경제 논리상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가 경제학 정공학도이지만. 엄격한 안식일만 하더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4시간을 무위무동(無爲無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안식교 의사는 아예 토요 안식일에 대어 놓고 의료행위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안식일 준수 못한 죄책감으로 안식교인으로
전쟁에서 연속 이기고 언약궤까지 빼앗은 기쁨은 잠깐, 블레셋은 언약궤를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뻘짓 때문에 다곤 신은 박살나고, 언약궤를 갖다 놓은 지역마다 독종 재앙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난을 면해보려고 이리저리 언약궤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지역마다 쑥대밭이 됐다. 옮길수록 환난은 더 커지고, 사망 자가 속출하기까지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것 같다. 그야말로 언약궤를 빼앗아 온이후 일곱 달은 공포의 7개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급기야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를 반환하는 블레셋 언약궤 반환을 결의한 블레셋 지도자 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6:2).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것을 제안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신을 달래려 한다. 유사한 것을 바침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주술적 행위인 동종요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금 쥐는 독종이 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 생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는 ‘성(sexuality)’이다. 현대 사회의 성문화는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의 성 윤리가 무너지고 퇴폐적인 문화로 퇴보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성을 부정적 측면에서 부각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보다는 성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사적 영역에 두었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성 윤리를 세상에 바르게 제시해야, 성적으로 타락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적 성은 결혼과 연관되며,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관점에서 엄격한 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에 관한 자유보다는 엄격한 통제와 절제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신약성경적 성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친 새로운 윤리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육체적 쾌락이 악하며, 성관계는 종족보존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그 자체는 악하여 성적인 쾌락이 신령한 생활의 적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영혼 우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과 텍스트의 개별성을 구분함으로써 기록된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서 해석에서 쉽게 간과한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텍스트의 개별성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문제는 텍스트가 “살았고 운동력”이 상실된 “닫힌 의미”로 여겼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개별성은 성서를 읽는 독자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정황에서 무한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힘과 같다. 말하자면, 성서의 텍스트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텍스트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즉 해석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이다. 문제는 독자가 규범이 아니라 텍스트가 규범이다. 독자는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에 굴복하고 어느 것이든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가 곧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라는 해석적 원칙과 존 칼빈의 경우에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
우리 신앙의 본질(핵심)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3절은 우리의 구원을, 즉 우리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1서는 여러 곳에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분의 성품과 의도와 뜻을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성서공회 중 하나인 United Bible Society에서 발간한 핸드북 시리즈 요한1서에서 Haas, C., Jonge, M. de와 Swellengrebel, J. L.는 요한1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요한1서 2장 3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동사는 ‘친밀한 교제 안에 있다 혹은 친밀한 교제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의도를 친밀하게 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번역은 여기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안다고 하고’라고
노인의 되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행위다. 나도 여러 번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내가 이제는 값싼 안경을 맞춰주는데 이유는 또 잃을 것이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 다. 안경을 잃고 귀가하는 날, 안경 없는 맨 얼굴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또 그 안경을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소?” 정말 코믹한 아내의 질문이다. 세상에 자기 물건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짐짓 일부로 잃어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그 물건과 함께 시간과 장소도 잃게 마련이다. 이것을 잃음의 삼중주(三重奏)라 할까. 더 나아가서 잃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물건을 잃을 땐 자기도 깜빡하는 순간의 자기상실이 따른다. 이때는 잃음의 4중주(四重奏)라할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내가 머문 곳을 다시 가보아도 역시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는 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알 턱도 없지만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그곳을 찾지만 역시나 역시이다. 물건상실보다 더 괴롭고 비참한 것은 자아상실(自我喪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를 잃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잃어버린 자아(lost ego)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원
1981년의 미국 영화 ‘레이더스(Raiders)’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 영화계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영화제목 ‘레이더스’는 원래 ‘침략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영화 포스터의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제목처럼 언약궤를 찾아 나선 모험 판타지다. 해리슨 포드라는 최고의 명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된 바 있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바벨론에 망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고, 고고학 교수인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그 언약궤를 찾아 나선 것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약궤를 추적하던 독일군이 법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모래뿐이고, 거기서 무서운 천사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성한 궤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천사들이 궤를 지키듯이 본문에도 언약궤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이 노획(鹵獲)한 언약궤를 갖다둔 블레셋의 도시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사무엘상 5장, 이 장의 중심 단어는 ‘여 호와의 궤’, ‘언약궤’다. 12절밖에 안
지난 시간은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진 현실을, 반면에 하나님은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나누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현실을 영적인 관점에서 진단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현 영적 상태와 관련해서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 호세아 4장 6절이라고 생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다음 세대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어른 세대의 영적 타락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어른 세대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 다.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던 해 1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에 낸 기고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제목이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였던 것 같다. 그 몇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 가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주어왔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 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 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주었다고 꼭 팁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 보상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고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다. 성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고 (3:20), 본문 1절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 도시이다. 마치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은 표현인데 지금 같은 미디어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알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 아닐까?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선지자가 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은 갑자기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로 바뀐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진다. 너무 명암(明暗) 대비가 뚜렷한 전개라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만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바뀌는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엘리 시대의 결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엘리 가문의 영적 타락,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다. 은혜 상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도 다양한 사상들 속에 둘러 싸여 있다. 한 세대가 갖는 의식 구조나 공감대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 즉,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내 이런 다양한 현상들 중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인 세계관의 원색적인 표출로 이어지며, 기독교 신앙과 상충한다. 기독교와 대립되는 기존에 있던 세속적인 세계관으로는 크게 다섯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신론이다.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기에,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며, 인간 사의 주권자나 섭리자도 아님을 말했다. 두 번째는 자연주의이다. 물질을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인식해 인간의 이해력 역시 기계의 복잡성처럼 생각하였다. 물질의 존재 목적과 역사 과정 등도 자연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세 번째는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으로서 모든 가치를 부정해 인간이 의미 있는 행동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