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사야서 59장 9-12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해석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이 구절에서 필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엄하고 무서운 징벌적 책망을 넘어서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연상한다. 하지만 필자는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과연 그러한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 이 글을 쓴 저자는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저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구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하퍼스 바이블 코맨터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왜냐하면이 구절의 의미는 주해의 도움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애곡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 주요한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재’(God’s absence)와 ‘애곡’(the lament) 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의 구절과 주해의 설명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설명한 이 주해는 명사 ‘애
중국에서 날아온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어온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코로나바이러 스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방역 당국의 지침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방역수칙을 지켰는데도 코로나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백신접종을 하고 있지만 항체가 형성되고 치료제가 개발되어서 코로나가 정복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간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예배를 드리며 소규모 모임은 하지 못하고 주일 예배도 소수 인원만 모이고 대부분 영상예배를 드리며 1년을 살고 보니 성도들의 영성도 추락하고 교세도 추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교회와 이단 신천지 그리고 인터콥 열방센터, IM선교회 국제학교 등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직장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가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됐다. 교인들도 스스로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혹시나 전파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1년 가까이 교회를 나오지 못하면서 믿음도 열심도 다 식어 매우 안타깝다. 어떤 업소에서는 기독교 인은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을 붙일 정도로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문제는 기약 없는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비대면) 상황이 언
이전에는 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인 국면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으로 표현됐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그런 권능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죄들의 사함”의 선언으로 표현됐다. 중풍병자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비된 신체를 치유해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신체적인 치유 사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주 예수 앞에 나온 인간을 향하여 “죄들의 사함”을 주시는 영혼의 치유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통해 “주 예수는 땅에서 죄들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들을 사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 예수의 치유 사역 속에 나타
목회현장에서 종종 듣게 되는 유머입니다. 만약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떡합니까! 무슨 이런 유머가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유머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매일 상황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부대키며 살아야 하는 목회 현장에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궁에서 각국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때 서양의 식사 매너에 익숙하지 않는 동양인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많이 초청됐습니다. 지금도 서양식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많이 세팅되고, 컵들도 물컵, 음료수컵 등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제대로 교양 있게 식사하려면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 만찬 자리도 동양에서 온 외교 사절단들에게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식사한다고 옆에 있는 핑거볼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
사람이 행복하고, 원활한 삶을 살아가려면 영혼육이 전반적으로 고루고루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몸의 한 부분이 위궤양이나 관절염, 당뇨병, 비염, 고혈압. 등으로 말미암아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우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마음에 원망이나 불평, 근심, 걱정, 미움 등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면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서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게 지낼 때 사람이 진정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말씀대로 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리라 봅니다. 사람과의 관계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여러 갈등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선하고,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까다롭고,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론 이웃들을 통해서 부당하게
한국교회가 심하게 침체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그 침체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의 침체는 전혀 코로나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가속화됐을 뿐이다. 2020년 연말 미국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가 세계 선진국 중심 14개국을 대상으로 1만4000명을 설문 조사했다. 코로나19가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미국 같은 경우는 코로나19로 신앙생활이 오히려 크게 더욱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나머지 조사국들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약간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반면 조사국 중 유일하게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이, 그것도 심각하게 침체되었다고 답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50% 이상이 교회 안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청년부가 따로 없는 교회는 더욱 많다. 믿을만한 통계들에 의하면 현재 대학 생들의 경우에는 3% 남짓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 대
인정(人情)은 사람이 지닌 정이다. 그것은 사람만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이다. 인정의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에 견정(犬情)이란 말은 없다. 돈정(豚情)이란 말도 물론 없다. 사람만이 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만이 인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주고받을 정(情)을 소유한 피조물은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은 없다. 문제는 사람만이 갖도록 부여된 이 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걱정이다. 지금 인정의 향방이 문제다. 우선 향방 자체가 없는 인정도 있다. 자기만이 소유하고 끝나버리는 메마른 인정이다. 이래서 정을 줄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모양도 여간 딱하다. 어떤 인정은 주기는 주되 그러니까 향방은 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 인정은 흐르긴 하지만 흐름의 대상은 물(物)이다. 돈에게 인정을 붓고 탐욕물에 인정을 쏟고 하는 등이다. 요사이 가장 쉬운 예는 반려견을 인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그 대상이 사람(人)이어야 하겠건만 동물(動物)이랴. 그 이유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정을 줘도 받지를 않는다? 정 받을 사람이 너무 없다. 예수 하늘에서 인정을 주려 왔건만 사람들은 마다하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축복의 통로였다. 은혜로 평화의 사도인 이삭(Isaac)을 얻었다. 이삭도 축복의 통로였다. 그 역시 은혜로 축복의 조상 야곱(Jacob)을 얻었다. 야곱도 대를 이은 축복의 통로였다. 그 또한 은혜로 예수의 형상인 요셉 (Joseph)을 얻었다. 축복의 물줄기가 대를 이어 흐르는 은혜로 인해 그 가문이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어느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막스 죽스(Max Jukes)라는 18세기의 두 가문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막스 죽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불신자였고 부도덕한 사람, 비슷한 처지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집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이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수 잘 믿는 은혜의 사람, 미국 초창기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 자였으며, 그 부인 역시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그 두 가정에서 나온 후손들을 보면 너무 달랐다. 막스 죽스의 506명 자손 중 310명이 거지였고, 150명은 범죄자, 그중 70명은 살인자였다. 사형당한 사
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
방문상담을 하는 ‘건강가정사’들은 사회복지나 가정학, 여성학 등의 교과목 이수 외 체계적 가족 방문 및 가족 상담 관련 훈련을 받지 못하고, 사례관리자 또한 개인초점의 사례관리에 익숙하여 가족초점의 사례관리나 상담개입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상담을 통한 변화에 상담사 변인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효과적인 방문 가족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방문상담을 할 때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외에 방문상담의 상황 및 대상에 적합한 상담접근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경원외 2인은 방문대상자의 유형을 ‘지지호소형’ 과 ‘문제해결형’ 및 ‘정보/조언요구형’으로 분류하고, 유형별 ‘표준 상담중재’를 제공하였다. 해결중심 라이프웨이 상담사는 방문대상 자를 ‘고객형’과 ‘불평형’ 및 ‘방문형’ 중 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고객형은 ‘은혜사건’ 혹은 ‘예외상황질문’을 사용할 수 있다. 불평형은 ‘대처질문’과 ‘임재질문’으로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방관형은 ‘자기관심질문’과 같은 질문 기법으로 피상담자의 강점 혹은 자원들을 찾아내거나 해결의 작은 단서들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담사는 방문대상의 특성이나 가족환경,
부부싸움은 곧잘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시작되는데 산으로 올라갔다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이르기도 한다. 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싸움이 커지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됐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대부분 시초의 갈등 때문이 아니다. 싸우다 중간에 던져진 말 때문에 더 열 받고, 그 반동으로 화나서 한 대꾸가 더 큰 싸움으로 이어진다. 이혼도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직접적 원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싸워가는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면서 헤어져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의 갈등도 시작을 따지면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별일도 아닌 작은 불씨가 초가 삼간을 다 태운다. 별일도 아닌 시작에 뒤따라오는 반응이 갈등의 방향을 결정한다. 일하며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받던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애들 시끄럽다고 짜증을 부린다. 들어오자마자 짜증인 남편에게 서운해서 대뜸 애들한테 해주는 게 뭐 있는데 성질이냐고 되받아친다. 졸지에 나쁜 아빠가 된 남편은 너는 잘하는 게 뭐가 있냐고 한 방을 날린다. 그렇지 않아도 육아에 살림에 지치고 자존감이 바닥이던 아내는 내가 너 때문에 이러고 산다고 원망을 한다. 열 받은 김
네덜란드의 아동 문학가 안나 왈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있다.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의 ‘테스와 보낸 여름’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 깊게 볼 수 있는 것은 샘이란 소년이 죽음과 외로움에 대비해서 훈련하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섬으로 간 샘은 그곳에서 ‘지구에 마지막 남은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부터 자기보다 나이 많은 부모와 형이 먼저 죽은 후에 혼자 남아서 외로움을 겪게 될 것을 상상한다. 이것을 미리 극복하려고 일주일 동안의 고독 훈련 계획을 세우고 해변가에서 실행에 옮긴다. 수영을 하거나 게를 친구 삼아 대화를 하며, 섬을 배회하면서 정해 놓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이 영화는 샘이 고독 훈련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더 멋지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겠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만 어린 소년의 고독 문제를 다뤘기에 특이하고 관심을 끌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과 감정을 가졌기에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양한 고독감을 경험하게 된다. 대화할 한 명의 친밀한 친구조차 없거나 반려자를 잃고 난 후의 지독한 외로움과 허전함,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가지는 것,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낙오자
이성(理性)은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알아내는 힘이다. 논리적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힘으로 본능, 충동, 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따르도록 의지와 행동을 규정하는 자율적 도덕적 의지의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반면에 인간은 본능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진위,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감성(感性)은 사전적으로는 자극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5관(五官) 눈, 코, 귀, 혀, 피부 다섯 가지 감각 기관(感覺器官)이 타인의 감정 등 외부로부터의 모든 감각적 자극을 받고 그에 반응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지식적이라면 감성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을 광고할 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디자인이나 색상으로 모성애를 자극한다거나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을 감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하고 상품의 품질이나 경제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이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한다. 사람은 이성적이라야 하지만 감성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이성 감성뿐만 아니라 영성(靈 性)도 있다. 영성은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그 할아버지는 여러 명의 손자들을 두고 있었 다. 옛날 한 마을에 옹기종기 살 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사는 고로 자연히 그 할아버지 밑에 손에 닿는 손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손자들 중에 유난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손자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할아버지와 씨름을 하자고 조르는 여섯 살 박이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였다. 마루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놈은 한판 씨름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이길 경우, 손자 놈은 아주 절망적인 기분으로 되돌아갔다가 내일을 기약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이 조손(祖孫) 사이의 씨름의 승자는 거의 손자였다. 10번 씨름하면 한 두 번은 할아버지가 승자이고 나머지는 손자가 승자이다. 승리한 손자는 기고만장하다 힘센 할아버지로부터 자기의 씨름 솜씨를 인증받기 때문에 여러 손자 놈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기가 살아있다. “내가 할아버지를 이겼다” 그러나 사실은 할아버지가 져 준 것이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턱이 없다. 그것을 알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나는 이런 광경을 보노라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장면이 생각난다(창 32:13~32). 에서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가서 두 아내를 취해 자수성가한 동생 야곱이 금의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