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고백했던 말, “여호와 이레”. 우둔하고 연약한 사람의 생각 너머에서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외치는 소리다.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삼일길을 걸어가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해 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 준비해 놓으신 그 분의 손을 모르고도 순종할 수 있었는데, 적어도 우리는 그를 위해 벌써부터 준비하시고 기다리셨다는 말씀의 주님을 알고도 순종하지 못한다. 부족하지만 작은 순종에 준비하시고 기다리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10여년전 한국의 모든 사역을 정리하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기도하던 아내가 처가가 있는 논산 시골 마을에 아동센터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생활비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의 씨앗을 심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위해 기도했다. 2년여 동안 가깝지 않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교대로 몇 차례를 오가며 아동센터를 세웠다. 급식비라도 보조금을 지원 받기 위해서는 2년 동안 개별적으로 운영을 해야 하기에 가능한
인생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나 그 인생의 시발은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다. 10개월이 아닌 장장 3년을 어머니 모태에만 남아서 살겠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은 고집쟁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그런 고집쟁이는 아무도 없다.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란 의학적으로는 출산이다. 어머니는 출산했고 아이는 출생했다. 탈출은 못 있을 곳이기에 그곳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되지만 천국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탈출해야만 하는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한 시점의 사건이지만 존재의 양태는 언제나 탈출이다. 탈출은 이동을 말한다. 인간은 식물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적 존재이니 그 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 맨 날 움직이는 존재다. 탈출은 발전을 향한 발 뛰어 놓음이지만 탈선과는 다르다. 탈선은 어느 시점이든 정상에서 벗어남이요, 정상의 부정(不定)이요, 파괴다. 출생한 영아는 태아(胎兒)의 자리에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고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의 이동이다. 다 자란 청년이 되어서는 부모의 품안에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인간은 캥거루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모로부터 탈출을 결혼이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성경속이나 세상 역사속에 절대 왕좌에서 최상의 영화와 권세로 40년간 복록을 누린 이스라엘 3번째 왕인 솔로몬왕이 그의 저서 전도서에 첫 번째 나오는 오허(五虛)의 말씀이다. 솔로몬의 외경인 지혜서에도 “우리의 이름은 조만간 잊혀질 것이고,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은 구름의 자취처럼 사라질 것이고, 안개처럼 흩어질 것이다”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회고했다. 그런데 전도서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로 심판주이심을 진술했다. 대학시절 영어영문학과에서 배운 미국 시인 롱펠로우(Longfellow)는 “구슬픈 싯구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공허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요, 사물은 눈에 보이는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 내 분수에 넘는 세월은 그 얼마나 의심스럽고 안타까운 것이었던가!”라고 일본의 위인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72세로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프랑스 시인 라우르 뾰숑이 완전히 은둔하자 친구가 찾아가서 파리 구경이라도 같이 가자고 권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왜 파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전통적인 변신론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게 직접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잘 보여 줍니다. 삼인칭적 경험과 일인칭적 경험의 차이지요.” 강영안 저(著)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IVP, 19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교 변증학의 거성(巨星) C.S.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한 권은 고통을 객관적인 어조로, 이론적으로 다룬 ‘고통의 문제’이고, 다른 한 권은 자신이 겪은 슬픔을 관찰한 ‘헤아려 본 슬픔’입니다. 전자가 3인칭 시점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1인칭 체험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마치 고통이 저만치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통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제일 유명한 구절이 이것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그러나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다릅니다. 루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만년에 뒤늦게 만나 결혼하게 된 사랑하는 아내 조이 그레섬이 죽은 직후 이 책을 씁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했던 자신의 말을 잊은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나타나는 기술의 융합과 연결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산업구조와 새로운 생활의 패러다임을 지칭하는 말로 그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를 살펴보면 사물인터넷, 빅 데이터, 플랫폼, 인공지능 등이 나타난다. 물론 이외에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특징과 현상이 존재하나 전반적인 과학기술과 산업체제의 변화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이 연구의 범위나 목적을 넘어서기에 위에서 열거한 일반적이며 대표적인 특징들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려 한다. 1) 플랫폼(Platform) 플랫폼은 4차 산업혁명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플랫폼은 본래 기차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목적지로 보내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현대사회는 이 용어를 기술 혁신을 통해 사람과 사람 또는 사물을 연결하는 인프라를 제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의 생태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전통적인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 생산자와 다른 쪽에 연결된 소비자 사이의 중간역할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다면 플랫폼 기반 기업은 혁신적인 과학기술과 플랫폼을 중심으로 모인 사용자들 간의 개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연결해 새로
한국침례교 최초의 순교자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박노기 목사, 김희서 교사,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였다. 이들은 10월 20일 포시에트해(海) 모커우 지점에서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해 해상에서 순교했다. 이 일이 연추와 수청 전 지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교회 부흥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동아기독교 순회전도자들은 대게 육로로 이동했는데 왜 이들은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이동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당시 국경지대에 마적단(馬賊團)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바닷길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연구자가 지난해 1월 연해주의 고려인 역사관을 방문해서 초기 한인이 탔던 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배가 너무 초라한 목선(木船)이어서 오늘날의 국제여객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배였다는 사실이다. 큰 풍랑을 만난 작은 배로 인해 순교한 것이었다. 4. 평가 시베리아는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이 가장 단기간에 이뤄졌고 빨리 문을 내린 지역이다.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1909년 2월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1925년 가을에 으르싯쓰교회가 마지막으로 개척됐다. 시베리아에 44개의 동아기독교가 세워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작품 중에 묘사된 유토피아(Utopia,理想国)는 헬라어 ‘ou(not)’와 ‘topos(place)’의 합성어 ‘outopos’로 그 뜻은 ‘not+place’ 곧 ‘nowhere’이다. 그런데 그의 유토피아 제2권에서 이방인과 공산주의자의 도시국가로 묘사된 이성(理性)에 의해 전적 통치되는 헌법과 정치록(1516)에 관해 가장 훌륭한 공화국가로 새로운 섬 “유토피아(Utopia)”는 플래툰(Platon)의 공공성(Repablic)을 말하지만 유토피아는 없었다. 결국 이 세상엔 이상국이라고는 없다는 뜻이다. “예수 믿고 천당가요!” 어떤 때는 노란 종이에 빽빽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선전종이를 주기도 했으나, 엄마 따라 울릉도 주사골 봉래폭포 위에 있는 석굴의 절법당에 다니는 나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예수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고 뒤따르며 놀려대기도 했다. 1951년 8월 3일 처음으로 저동침례교회에 나간 뒤 알고 보니 그는 교회당에서 100m쯤 떨어진 용바우골에 사는 교회 집사라고 했다. 그 후 그 집사님을 볼 때 부끄러웠고 매우 훌륭하게 보였다.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목회자가 없어 대전지방 도안교회가 문 닫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해보라고 하고, 신약은 할 수 없는 일인데 해보라하지 않는다 (Law would tell us something even though it was impossible for us to do. Gaspel would not tell us to do something if it were impossible to do.). 구약 율법은 우리에게 못 올라갈 나무에 올라가 보라고 말하고 신약의 복음은 못 올라갈 나무라면 아예 올라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너는 안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은 “너는 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실천과 에베소서 5장 21~33절의 부부생활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으니까 해보라고 한 것이다. 율법은 안 되는 줄 알면서 시켜본 것이고 신약은 되는 줄 알기에 해보라는 것이다. 어째서 복음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거의 같은 시기의 러시아의 문호 끄리일로프(Krylov)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인을 하고 잡혀서 사형을 받아 죽고 한 사람은 유명한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존경을 받다가 나이가 많아 죽어서 심판대에 서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죄가 인정되어 지옥으로 가서 벌을 받게 됐습니다. 둘 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마솥에 들어가게 됐고, 가마솥 밑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었으나 살인죄를 짓고 사형을 받고 온 죄인의 불보다 오히려 책을 많이 썼던 학자의 불이 더 뜨거웠습니다. 학자는 “재판장님! 저 사람은 사람을 죽인 흉측한 살인자지만 저는 그런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남의 것을 한 푼도 훔치거나 떼먹은 일도 없는데 불이 더 뜨거운 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라고 항의를 하자 재판장은 “저 사람은 한 사람의 생명을 죽였거니와 너는 네 쓴 책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병들고, 죽게 했노라. 그러므로 너는 불이 더 뜨거운 것이 마땅하니라”고 선언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볼테르야말로 수세기를 이어오면서 그의 높은 지식과 넓은 학문에 비춰 불멸의 지성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을
저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표적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했지만, 그 표적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육신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를 향해 예수님은 그의 존재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영원한 생명의 떡을 주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는 오병이어 사건 후에 진행되는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긴 교훈에 나오는 인자 말씀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지만, 그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자기 ‘살’(육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기의 말씀의 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1981년도에 사랑하는 제 아내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 연애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산악인으로서 암벽등반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산을 너무 좋아해서 친구들로부터 “산적 두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제 이미지는 늘 산과 연관 지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산이 얼마나 좋던지 집에 와서도 방에서 잠을 자기보다는 옥상에서 하늘을 보며 자는 것이 더 행복했을 정도로 산과 저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어느 날 사랑하는 제 아내에게 산 사나이다운 멋진 면모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에, 늘 암벽 등반하던 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인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서 산악인들의 활동 상황을 다 목격한 제 아내가 “길조 씨도 이런 암벽에 올라가나요?”라고 질문을 하길래 “그럼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내가 훈련시킨 후배들인걸요.”했더니, 제 말을 듣던 아내의 얼굴에 감탄보다는 어둠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내려올 때 제 아내가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IV.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과 북방선교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창립하면서 “교회본부를 원산에 두고 한국과 남북만주(南北滿洲)와 노령(露嶺) 시베리아 등에 전도지역을 확장할 것을 결정”함으로 시베리아 선교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노령(露嶺)의 시베리아란 펜윅이 순회전도자들을 파송했던 크라스키노(연추), 파르티잔스크(수청), 포시에트(목허우),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아누치노(도비허)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이다. 한편 본고에서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또한 위의 러시아 도시명을 혼용할 것임을 밝힌다. 연해주의 한인 이주 역사는 1863년 함경북도 경흥의 농민 13가구가 굶주림과 억압을 피해 두만강 건너 포시에트(Посьета)에 정착한 시기로 본다. 이들은 최초의 한인 마을인 ‘지신허’(地新墟)를 포시에트 지역에 건설했고, 이후 1869년에는 기근으로 인하여 1만 명이 이주했고, 1906년에는 고려인 인구가 3만 4,399명이었다가 1914년에는 6만 3천 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미 1910년에는 비공식 이주민을 포함해서 연해주의 고려인이 8~10만 명 정도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연해주에는 1863년부터 고려인
이 글은 한국교회가 4차 산업혁명이란 외부적인 변화의 특성을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을 통해 목회에 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즉, 한국교회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적 변화에 대비해 목회 전략이 준비되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기본 이해 4차 산업혁명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다보스 포럼 의장인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에 의해 제시됐다. 그는 2016년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에서 기술발전으로 야기되는 미래 산업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4차 산업혁명으로 소개하며 포럼의 주제로 공론화했다. 슈바프는 기술로 인한 사회변화와 발전의 준거가 되는 특징을 역사적으로 4차에 걸친 산업혁명으로 설명한다. 1차 산업혁명은 1760~1840년에 철도와 증기기관의 발명과 사용으로 전개됐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전기에너지를 이용한 대량생산시스템의 도입으로 2차 산업혁명이 이뤄졌으며 1960년대에 반도체를 이용한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으로 디지털, 정보화 시대가 펼쳐지며 3차 산업혁명이 나타났고 이후에 더 정교해지고 진화된 디지털 기술과 정보통신의 발전을 통해 나타나는 광범위한 사회변화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군이었다. 그러나 앗수르와의 전쟁으로 큰 고통 중에 병들어 죽게 됐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38:1)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며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38:2~6). 하나님께서 사형선고를 내렸는데도 히스기야 왕은 통곡하며 엎드린 기도로 하나님께 도전했다. 죽을병 들린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죽음을 통지했는데도 진실 되고 간절하게 기도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기적을 우리도 믿고 체험해야 한다. 인도의 왕립 의학대학교수 하워드 섬
세상에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큰소리 칠 사람은 그리 흔치 못할 것이다. 여간 자기 자신의 정체(正体)에 자신감이 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토할 수 없는 발언일 것이다. “나를 본받으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3:17) 복음, 곧 그리스도를 모신 바울이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다가 멸망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하늘로부터 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늘 시민권을 소유한 자로서 바울이 도저히 유구무언할 수 없어서 토설한 것이 “나를 본받으라”였다. 여기엔 복음 지닌 자기 본(本)을 말한 것이지 육의 복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더 나아가서 빌립보 교인에게 명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라”(빌4:9) 이런 바울을 바라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즉각적인 나의 인상(impression 혹은 image)이 “바울에 유사하거나 인접하거나 더 나아가서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슨 망령(?)된 생각인가. 혹 80이 넘은 노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