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부활현현의 마지막 사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약속(예언)의 성취와 사도들에게 주는 대위임의 말씀을 전달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기로된 것들은 다 반드시 성취돼야 한다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부각시킨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렇게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 것이며 둘째는 그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제 삼일에 부활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 전파가 이렇게 반드시 성취돼야 하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구원의 역사로 제시한다.‘전파하다’(khru,ssw)라는 동사는 사도의 임무 곧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에게서 위임받은 것을 보낸 자의 권위로 선포하는 혹은 전파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동사는 마가와 마태가 예수의 선포 사역과 관련해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반면에 누가는 이 동사를 “기쁜 소식을 전하다”(euvaggeli,zomai)라는 동사와 함께 병행해 사용했다(눅 4:18~19; 8:1).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khru,
구미(歐美), 특히 유럽 신학은, 대부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버린 지 오래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단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유랑생활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적 문서에 불과하다. 한국 신학계 일각에서도 한 때, “이제 교의학의 시대는 지나고 행위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근본 보다 방편을 중시하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신학적 커밍아웃이러한 풍조와 병행해서, 한 때 우리 신학계에는 주일 아침에 교회가 아닌 사찰의 대웅전에 서 예불을 하는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신학자들의 연례 세미나에서 “이제 하나님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하고 공공연히 자신의 “신학적 커밍아웃”을 선포한 교수도 있었다.필자는 그들의 신학이나 행위를 성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 태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리한 “이단 감별 기준” 대로라면 그런 신학자들이 제일 먼저 신학을 검증받고 이단 사이비로 고발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교회지도자들만이 그들의 신학에 문제를 제기했을 뿐 한국교회와 이단 연구가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기독교 교파와 종교 단체에서 조차 다투어 커밍아웃 인사들을
암몬왕 하눈의 객기와 도발의 댓가로 다윗의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암몬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용병을 동원했다. 아람군대 이만 명, 마아가왕의 군대 천 명, 돕의 군대 만이천 명 등 총 삼만 삼천 명의 군사들을 동원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아람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용병을 모집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맹장 요압과 아비새를 파견했다. 요압은 정예 병사들을 엄선해 자신이 직접 지휘할 병사들과 아비새가 지휘할 병사들로 분리한 뒤, 아비새에게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하10:11)” 하는 동지애와 조국애와 야훼신앙으로 충만한 출사표의 노래였다.첫 번째로, 요압은 동지애를 강조한다. 무슨 싸움이든 독불장군은 승률이 떨어진다. 마음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나 동지가 있을 때 승리의 가능성은 커진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성공을 말할 때 개혁의 동지로서의 프리드리히 3세를
작은 교회 목회자는 강단을 비우지 말아야 한다(딤후 2:15). 목회자가 하나님과 교인과의 약속은 강단을 지키는 일이다. 목사는 강단에서 죽고 살아야 한다. 성도는 영적 양식을 먹는 지도자를 따른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심방을 수시로 해야 한다(고후 11:29).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심방시에 목회자는 심방 갈 가정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 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은 이름을 기억하는 목회자에게 마음을 연다. 목회자는 수첩을 준비해, 할머니와 손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작은 교회 목회자는 영성생활에서 성령운동과 기도운동을 해야 한다(엡 4:3). 성도들 모두가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입을 벌려 외치게 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도 합심해 열심히 기도하게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작은 교회에 특징이 있게 해야 한다. 작은 교회는 교육하는데 힘써야 한다. 장기 계획을 가지고 삶이 변화하게 해야 한다. 새신자가 6개월 교회에 다녔으면 말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교인이 돼야 한다. 명절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이 행복하도록 꾸준히 제자훈련을 시켜야 한다. 작은 교회는 성경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딤후 3:10)
기본적으로 목회자는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도록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양떼인 교회를 인도하시는 목자로서 큰 목자, 목자장으로 불리신다. 목자장이신 주 예수님은 목동들을 불러 목자의 역할을 맡기신다. 혹자는 목회자를 목자를 돕는 목견(목장의 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좀 지나친 표현이다. 작은 목자인 목회자는 양들이 각자의 본분을 다하도록 챙겨줘야 한다. 교회성장학자인 슐츠(Schultz)는 목회자를 완성자(completer)라고 했다. 완성자란 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피면서 부족한 부분이 발견될 때 그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살피고, 주어진 은사를 따라 제대로 사역을 하는지를 살피고, 교회의 여러 사역들이 균형있게 성취되고 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교회는 교회의 예배, 교육과 신앙훈련, 친교 등 고유한 내적 사역과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봉사와 섬김의 사역 그리고 전도대상자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사역, 악한 자들과의 영적 전쟁 사역, 세계 선교를 위한 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인적 자원을 개발하고 재정을 확보하는 등 가
1) 역사적으로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1) 영국 신부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84)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사후인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교회의 적, 이단의 우상” 등의 죄목으로 화형선고를 받았고, 틴들(William Tyndale, 1484?~1536)은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다는 죄목으로 1536년 런던에서 화형당했다.(2) 보헤미아의 후스(John Hus, 1373~1415)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위클리프를 변호하다가 이단으로 처형됐다. 그의 뒤를 이어 루터와 칼빈과 훼브마이어 등의 개혁자들도 이단으로 선고받고 평생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는 삶을 살았다.(3)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4)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고발되어 결국 로마 옥에서 처형됐고, (5)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는 신성모독 죄로 유대교의 이단자가 됐다. 검토한 바, 로마교회가 만든 이단은 개혁자요, 진리수호의 맹장들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번
한국교회는 통일교와 전도관 운동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고, 구원파와 근래의 신천지 이단 등으로 “이단”이라는 두 글자를 듣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게 됐다. 한번은 필자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두 목사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김 아무개가 이단이래.” “왜?”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데.” “그래? 그럼 이단이네.”한국교회에서는 흔히 확인도 검증도 없이 단지 “그렇다고 하더라”는 몇 마디 말로 무고한 사람이 이단으로 낙인찍힌다. 필자는 교단으로부터 교리 교사로 위임받은 사람으로서, “이단”이란 말을 할 때는 최소한 아래와 같은 요건을 생각하며 신중을 기하기를 권면하는 바이다.첫째로, 삼위일체 구원론 등 성경의 핵심 교리를 왜곡 해석하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둘째로, 그릇된 종말론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구세주 또는 재림주라고 주장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여 개인의 직장. 가정생활, 교우관계를 포함하여 사회생활을 파괴하는 단체.셋째로, 끝까지 자신의 교리적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지신들을 비판하는 이에 대해서는 조직화된 단체의 힘을 빌려 SNS나 언론매체에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고소 고발로 위협하며, 맹목적으로 기성교회를 비판하
도대체 뭘까? Eliot의 작품 황무지(Waste Land)에서 표현한 ‘잔인한 4월’ 담긴 진정한 의미는? 정말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소식들이 그의 경험상 4월에 유독 많아서였을까? 그래서 4월만 되면 그 막연한 불안이 다시 돋아나서였을까? 정말 그렇다면 이 4월은 괜히 주는 거 없이 기분 나쁜 달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잔인한 4월’의 진정한 의미는 그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역설(逆說)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4월의 생명력은 정말 잔인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패도, 절망도, 죽음도…. 그러므로 이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삶속의 죽음’(Death in life)을 벗고, 동토를 뚫는 대지의 생명력을 본받아 다시 일어나고, 다시 기운내고, 다시 희망을 만들어가자”는 희망의 외침이다. 그래서 Eliot은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영국 런던의 시민들이 더 이상의 재기를 꿈꾸지 못하고 마치 죽은 시체처럼 꿈틀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강력히 도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 육체적으로 숨을 쉰다 해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
4. 작은 교회의 목회적 특징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에 충실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는 노련한 농부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농사 방식이 최고의 선이라 믿고, 소출을 늘리기 위해 농약의 살포 양을 늘리는 것뿐이다. 그 결과 땅은 죽어가고 종국에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이는 한국교회 현실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의 본질을 망각한 채 목회 방식의 노예로 지내거나 성장과 부흥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갖가지 세미나를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목회의 본질을 붙잡고 한 사람의 변화에 집중할 때, 주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다. 이 일은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가 할 수 있는데, 작은 교회가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역할은 영광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제자리에 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사람에 주목하고 그를 준비시킨 후 그를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신다.작은 교회는 깊은 유대감을 경험 할 수 있다
침례교회의 목회자 상은 가톨릭이나 일부 개신교회처럼 성직자 개념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무교회주의자나 성별된 목회자를 부인하는 일부 회중교회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철저히 섬기는 봉사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훈련자가 돼야 한다. 이러한 목회자 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성경말씀이 에베소서 4장이다. 에베소서 4장은 먼저 교회가 한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신앙적 기초에 대하여 언급하고(1~6),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봉사해야 함을 강조하고(7~8), 구성원들이 그렇게 하도록 챙겨주는 일군들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으로 소개했다. 여기에 언급된 일군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역할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이다. 목회자의 주요한 역할은 성도들(교인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온전케 된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끔은, 자주 사용하는 말에도 혼란이 온다. 그 중 하나가 은퇴와 퇴직과 퇴임, 또는 은둔(隱遁)이다. 정의(定義) 하거니와 퇴직은 단순이 직장을 그만 두는 것, 은퇴는 직장을 물러나면서 하던 일에도 손을 놓는 것, 은둔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숨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퇴직 했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은퇴요 찾는 사람의 발길마저 끊어지면 자연스럽게 은둔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교회나 직장을 잠시 떠나는 것까지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퇴임”이란 어휘를 사용하려고 한다.아름다운 퇴임을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목회 상식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1) 전임 목사는, 교회와 후임자가 일심으로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후임자의 목회와 신자들의 교회생활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교회가 원해서 남아있는 퇴임목사라 할지라도 후임자의 행정과 인사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 은퇴 목사는 교회에서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것을 알아야 한다. 3) 근래 책을 펴내면서 출판사들의 사정을 보니, 편집과 영업을 맡은 중견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서 따로 출판사를 설립하고 전 직장의 고객을 빼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에서는 이런 것을 생존경쟁의 한
일본인은 대게 예의 바르고 검소하며 질서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며 정직하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일본인의 정서와는 달리 시대의 양심을 외면하고 역사를 고쳐 쓰려고 한다. 그들의 역사인식을 짚어 본다.첫째로, 아베 신조 총리는 가미가재에 희생된 자국 소년들이 남긴 애절한 편지와 기록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하는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공언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태평양 전쟁을 통해 자기나라와 미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피 끓는 청년들을 얼마나 많이 희생시켰는가. 가미가재는 이미 일본의 전세가 기울어 정공법으로는 미국과 연합국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애 띈 청소년들을 애국이란 명분으로 동원해서 연합군의 시설이나 선박에 자폭하도록 교사한 전쟁범죄 행위이다. 생각해보면 가미가재가 바로 오늘날 자살폭탄 테러의 원조가 아니가.아베 총리는 명분 없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 타국의 희생자들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보편적 양심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가미가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알리고, 그것을 영구 보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아무리 막돼먹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전쟁에는 나름대로 다 명분이 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에도 옛 영토 ‘폴란드회랑의 회복’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암몬왕도 자기 나름대로의 명분과 논리를 내세워 히브리백성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제가 된 그 요단강 동편 영토는 암몬왕이 시비를 걸어오기 300여년 전부터 히브리백성들이 점유해왔던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몬왕은 이미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지파와 갓지파가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그 땅을 반환하라고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입다는 성경의 가나안 정복사를 거론하면서 암몬왕의 억지주장을 분쇄한다. 먼저 사사기11:16에 기록과 같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땅에 우회 진입한 경로를 밝힌다. 에돔 족속의 반대로 인해서 멀고 먼 우회 진입로를 선택했지만, 히브리백성들은 결코 암몬이나 모압지역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차라리 그 땅은 진멸당한 아모리땅이라는 정확한 해석을 덧붙인다. 아모리 족속들이 가나안 진입을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었다는 팁까지 덧붙여서 말이다.다시 말해서 원래 그 땅 주인은 아모리 족속이었지만, 그들이 전쟁에 패하여 진멸당하고,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므로
2. 작은 교회의 개념 예배의 출석률을 언급 할 때는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수를 기준으로 한다. 작은 교회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고, 쉽지 않은 많은 제한적인 내용이 있다. 현대문화는 ‘작은’이란 개념에 편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태어난 문화적 배경과 지역과 교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이기에 세상적인 용어인 ‘작은’이라는 용어가 합당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행 20:28). 예수님이 언급하신 복음의 생명력을 깨닫고 있는 사역자에게는 숫자가 많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요 12:24). 교회를 분류할 때에 보통 연구를 위하여 주일 낮 평균 예배자 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침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나 한국교회의 분류인 전체교인을 중심으로 분류하고자 한다.한국교회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교회성장연구소는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에서 출석성도 수를 기준으로 소형교회(100미만의 교회), 중소형교회(100~300명 미만), 중중형교회(300~600명 미만), 중형교회(600~1000명 미만), 중대형교회(1000~2000명 미만), 대형교회(2000명 이상)으로
지난 2월 13일 개봉 이후 벌써 관객 수 30만을 돌파하고 있는 영화. 게다가 3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UN인권이사회에서도 상영될 영화. 그래서 우리 가족도 이 영화 관람에 참여해봤다. 아시는 대로 이 영화는 북한 지하교회에 현재 가해지고 있는 북한정권의 박해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예배는 물론이고, 찬송 한 곡조, 기도 한마디까지도 맘껏 할 수 없는 북한. 성경은 김일성 초상화 뒤에 숨겨 보관해야 하고, 예배는 지하 동굴 같은데 모여 드려야 하며, 기도 역시 이불 뒤집어쓰고 드려야 하는 등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혹한 고문을 당해야 하는 현실은 오늘날 너무나 큰 풍요와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극명히 대조된다. 정말 그들의 아픔이 영화관의 대형스크린 크기만큼이나 크게 다가왔다.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난 첫 번째 느낌은 다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주인공 철호가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중, 죽은 아내가 환상으로 나타나 어깨에 기대어 “꿈을 꾸었다”며 들려준 메시지도 그랬다. “꿈을 꾸었는데 성도들이 기도하니 북한 인민들이 살아나고, 기도를 중단하니 북한 인민들이 죽어가더라. 그러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