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렘 20:12) 하나님께서 늘 제 마음을 보실 때에 그리고 제가 시험을 당해 저의 마음의 깊은 곳을 보실 때에도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제 생애에 유일한 목표이며 또한 평생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마치 욥이 그 큰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전에 서해바다에 1만2000여 톤의 기름 유출 사건이 있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참사랑교회에서 봉사하러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120만 명 정도의 자원 봉사단들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현장이 너무나 깨끗한 상태여서 정말 기름 유출 사건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현장 감독 되시는 분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삽과 물통과 융과 같은 종이를 주면서 한 팀은 삽으로 모래사장을 파고, 한 팀은 바닷가에서 물통으로 물을 담아와서 웅덩이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팀은 모래 속에 스며들어 있는 기름들이 물 위에 뜨면 닦아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염되어 있는 기름들을 제거함에 있어서 먼저 바닷물에 떠있는 기름부터 시작해서 모래사장 속에 베여있는 기
“가방을 새로 사면 가죽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각이 살아 있죠. 그게 보기엔 좋은데, 막상 들어보면 몸에 착 붙질 않아서 불편합니다. 그럴 땐 가방을 일부러 문고리에 며칠 걸어두는 거예요. 가죽이 약간 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모양이 잡히도록. 힘을 빼야,더 멋있는 것도 있거든요.” 강혜정 이고운 공저(共著) ‘오프닝&클로징’ (프런티어, 19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힘이 들어가야 아름다운 것이 있고, 힘을 빼야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모든 운동의 기본이고, 머리에서 생각을 빼는 것이 모든 평안의 기본이 됩니다. 좋은 연기를 하려거든 감정에서 힘을 빼고, 좋은 노래를 부르려거든 목소리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분의 색이나 선을 덜어낸 넉넉함, 한 색 빼기를 하여 그 간격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나 여백이 고요함을 느끼게 합니다. 움켜쥔 손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무한의 공간이 손바닥에서 열립니다. 대중 민요 ‘갑돌이와 갑순이’에 얽힌 유머입니다. 서로 갑으로만 살았던 이 둘은 먼저 사랑한다고 하면 손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갑돌이는 ‘을순이’에게 장가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는 어느 여인이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집에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 한잔 하시지요?” 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요?” “내 이름은 부(富)이고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다른 친구의 이름은 사랑(Love)입니다. 집에 들어가셔서 가족과 상의 하세요. 우리 셋 중에 누가 당신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지를….” 부인은 집에 들어가서 노인들이 한 말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매우 즐거워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부(富)를 초대합시다. 그분을 안으로 들게 해서 우리 집을 부(富)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여보! 왜 성공(成功)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조용하던 집안이 소란해졌습니다. 며느리가 시부모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인이 공원으로 나가서 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드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안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두 노인(부와 성공)도 일어나서 사랑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이 놀라서
세계적인 암센터에 31년간 근무한 “김의신” 박사는 하나님을 찬양함이 암치료에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교회성가대원들과 일반인들을 비교해 연구해 보니 성가대원들의 면역세포수가 일반인보다 몇 십 배도 아닌 무려 1000배나 많은 것으로 측정됐다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원들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신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준 것입니다. 또한 1998년 미국 듀크 대학병원의 “헤롤드코니히”와 “데이비드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매주일 교회에 나와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면 신체의 면역체계가 강화되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찬송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병이나 고난을 통하여 우리들을 연단하시거나, 믿음을 성장시키시거나, 인격을 만들어 가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비록 아프고 힘들고 어려움이 찾아올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악보에 쉼표가 없었다고 한다. 쉼표는 노래의 여백이다. 여백 없는 악보, 쉼표 없는 악보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질식하게 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26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글도 그러하고 그림과 사진도 여백이 있는 것이 넉넉하고 좋습니다. 여백은 독자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창조의 공간입니다. 흔히들 동양의 미학을 ‘여백의 미’라고 합니다. 넘침보다는 모자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없음’으로 인해 ‘있음’이 빛납니다. 흰 여백은 감상하는 사람이 들어갈 공간입니다. 이론도 그러합니다.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없는 이론은 복수와 증오에 불타오르는 이론입니다. 100의 출력 능력을 가진 오디오 기기를 70정도로 해 놓고 음악을 들으면 가장 편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틈이 없고 매끈한 유리 같은 사람에게는 이웃의 눈물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넉넉한 무명천같이 여백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눈물을 흡수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리에 기억되지만, 배려의 여백이 있는 사람은 가슴에
얼마 전 섬기는 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나누며, 상담을 하며 또 다시 화제가 된 방탄소년단(BTS) 이야기를 많이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의 소속 회사의 대표가 섬기는 캠퍼스 동문이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가 미디어에 노출되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한 것은 이전 지구적인 열광과 반향은 결코 우연이나 일시적 스캔들이 아니며 놓쳐서는 안 될 값진 교훈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근 발표된 BTS의 앨범이 폭발적 반응과 함께 영국과 미국 매인 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진귀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이 번 노래가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란 엄청난 철학적 성찰의 자리로 모든 청중을 초대하는 메시지라는 점이다. 앨범은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심리철학계의 거장 칼 융(Carl Jung)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제목도 지난 30년 이상 융을 연구한 한 저자의 책 제목에서 그대로 빌어 왔다. “영혼의 지도 : 페르소나.” 가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Ego)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융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전쟁을 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
피셔 험프리스(Fisher Humphreys)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중생은 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자주 이해된다. 대그(John L. Dagg), 보이스(James P. Boyce), 그리고 멀린스(E. Y. Mullins)는 칭의나 양자의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언급하지만, 그들은 중생을 말할 때 새로운 관계뿐 아니라 새로운 도덕적 실재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중생은 새로운 성품을 지닌 새로운 사람이 존재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고, 성령은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덕적 자아를 성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험프리스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한 접근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는 이같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생의 의미와 조건을 살피고, 중생과 다른 구원의 용어인 칭의와 성화와 양자의 관계를 분석하며, 조직신학자들이 어떤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을 가지고 중생을 설명했는지 연구할 것이다. 그런 후에 연구자는 중생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살피며 중생 교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는 중생 교리를 포괄적으로 살피기 위해 험프리스의 분류에 따라 남침례교
인생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나 그 인생의 시발은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다. 10개월이 아닌 장장 3년을 어머니 모태에만 남아서 살겠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은 고집쟁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그런 고집쟁이는 아무도 없다.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란 의학적으로는 출산이다. 어머니는 출산하였고 아이는 출생했다. 탈출은 못 있을 곳이기에 그곳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되지만 천국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탈출해야만 하는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한 시점의 사건이지만 존재의 양태는 언제나 탈출이다. 탈출은 이동을 말한다. 인간은 식물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적 존재이니 그 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 맨 날 움직이는 존재다. 탈출은 발전을 향한 발 뛰어 놓음이지만 탈선과는 다르다. 탈선은 어느 시점이든 정상에서 벗어남이요 정상의 부정(不定)이요 파괴다. 출생한 영아는 태아(胎兒)의 자리에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고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의 이동이다. 다 자란 청년이 되어서는 부모의 품안에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인간은 캥거루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모로부터 탈출을 결혼이라고
“최재선 전도사, 지난 주일 나는 느티나무 밑 숲길로 도안교회에 오르다가 독뱀에게 물려 뱀독으로 오른쪽 발이 너무 퉁퉁 부어 올라 걷기가 힘드니 내 대신 가서 수요일 예배를 인도해 주시요!”라고 했더니 당시 나도 사례 없이 봉사하므로 다른 신학생들은 몇 사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계룡버스로 유성에 가서 걸어서 십리길로 도안교회에 잘 다녀와서 나는 고마움을 기억해왔는데, 1971년 9월 초에 부산 남문교회 개척 목회시 최 전도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님을 수소문해 선교사 우기수 침례병원 원장에 잘 부탁하여 취직시켜준 일이 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묵히 농어촌 개척교회를 충성하여 섬기다 천국간 최 목사와 홀사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가평 필그림 하우스에서 교단원로목사부부 초청위로회에 3년 만에 하룻저녁 참석하니 1년 동안 소천하신 7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운 시절 한평생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 천국에 입성한 선배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날 앞을 못 보기에 인도를 받는 목사, 휠체어를 탄 목사, 걸음걸이가 매우 시원찮은 분, 말을 잘 못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 기타 병자와 독거노인 등등 나도 언젠가 가야할
“개울물이 쉬지 않고 흐르면 강과 바다를 이룬다”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지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마25:26)고 책망하셨다.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W. Longfellow)의 말을 들어보자.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내일을 위하여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들판에서 또는 인생의 싸움터에서 목 매인 송아지처럼 쫓기지만 말고 투쟁하는 용사가 돼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32세에 비극적인 유서를 작성하고는 그의 형제인 칼과 존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유서엔 삶에 대한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지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지나 사막이라는 환경 속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사막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땅이요 또한 육신적으로 즐거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다가 낮에는 불볕더위가 있는 곳이며,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광야가 그들에게는 축복의 땅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되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즉, 세상 것을 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기
첫째, 교회는 동성혼이 성경적 가치관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표명하고 창조신앙에 입각해 결혼과 가정의 존재 이유와 동성혼이 아닌 이성혼이 결혼과 가정의 기원임을 지속적으로 설교하고 교육해야 한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등한 지위를 갖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설계임을 선포해야 한다(창 2:21~2). 장년뿐만 아니라 청소년, 청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의 이성혼에 대한 확신이 미래를 밝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잊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삶을 통해 건강한 결혼과 가정의 삶을 보여주며 증거해야 한다. 서두에서 한국 사회가 근대화 이후 핵가족화, 호주제 폐지, 이혼율 증가, 최저 출산율 등으로 가족제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을 귀히 여기며’(히 13:4)라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그 의미와 우리 삶에 미치는 역할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결혼이 잘 지속하고 발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고 예수님이 축복하신 것이므로 가정과 함께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귀히 여긴다’는 말은 ‘명예로운 것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땅의 모든 성도는 결혼과 가정을
“고래는 지구상 최대의 동물이다(중략). 그런 고래를 춤추게 하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 춤이란 원래 스스로의 신명이 몸짓으로 발현되는 것인데, 그 춤은 그게 아니다(중략). 사람이나 고래나 그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때 춤을 추는 것이 고래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다(중략). 고래여, 칭찬에 현혹되지 말라.” 이인환 저(著) ‘고래여 춤추지 말라’(도어즈, 20~2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춤을 출 몸 구조가 아닌 고래도 극진한 칭찬을 하면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고래가 춤추게끔 하는 정성을 사람에게 1/10만 쏟으면 모든 사람이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좋은 뜻입니다. 그러나 고래는 춤을 추려고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고래는 바다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래의 존재 이유입니다. 바다에 있는 고래가 자유로운 고래입니다. 독수리는 하늘에서 바위는 산에서 자유롭습니다. 무한한 창공을 나는 것 같은 비행기도 길이 있고, 바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만물이 모두 길이 있는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 없이 사막에 ‘던져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비전이 있어서 이 땅에 ‘보내진 존재
“메디치 효과”란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 다방면의 음악, 미술, 철학, 문학, 과학 등 학자를 모아 공동작업을 후원하자 문화의 창조 역할이 커져서 르네상스 세대를 맞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된 경영 이론입니다. 이처럼 “메디치 효과”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들의 결합을 통해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내거나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납니다. 감옥 아니면 이런 고위 인사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거기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등 관계를 그들에게 듣고 배웁니다. 하나님의 메디치 효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숱한 만남이 이뤄집니다. 나이, 출신, 직업이 다양하고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메디치 효과”입니다. 안주하고 있으면 맨날 보는 사람만 보고 만나는 사람만 만납니다. 낯선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도 만나는데 이 또한 또 다른 만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더 강해지며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집니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즐기세요. 하나님은 우리들을 낯선 곳으로도 이끄십니다. 힘이 드는 곳 일 수도
내 말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중략). ‘아재’와 ‘꼰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썰렁 개그라도 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재’고,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꼰대’다. ‘아재’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고,‘꼰대’는 젊은 사람들 위에 위치해서 아래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진낙식 저(著) ‘인생 처방 약 Mind 100정’(와일드북, 192-19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스페인어 ‘꼰데(conde)’는 ‘백작’이라는 고귀한 의미이지만, 자기 반성이 없이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꼰대는 나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차이입니다. 늙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젊어도 꼰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 풍속을 잘 따라가지 못하지만 느린 몸과 마음으로 늘 반성하며 소통하려는 사람을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의 어설프고 애달픈 몸 짓과 마음 짓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꼰대는 다릅니다. 몸과 마음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반성하려 하지도 않고 소통하려고도 않는 사람이 꼰대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늘 옳다고 하며 사람을 깔아 보고 가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