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근처 교회에서 권사 임직을 하며 순서를 맡게 됐다. 다시 권사에 대해서, 나아가 교회 직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권사(勸師, exhorter)란 “교회에서 전도와 봉사 그리고 권면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권사 임직을 생각하니 오래 전 들었던 말이 떠 올라 눈물을 훔쳤다. 어느 교회에 연세도 있으시고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께서 계셨다.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칭찬 듣는 권사님이셨다. 어느 토요일, 권사님이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여자 하나가 부엌에서 나오는데 무엇인가 숨기듯 감추며 인사도 못하고 황급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갔다. 그런데 주일 준비하러 왔던 사람들이 주일에 쓰려고 사다 놓은 고기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다 기도하고 간 권사님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권사님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도하러 교회에 갈 때 황급히 나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말을 하려다가 만약 말을 하면 그 여자를 찾아갈 것이고 교회에 소문이 나면 교회에 못 다닐 거란 생각에 “내가 그랬노라고 고기를 보니 먹고 싶어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교회로 집회를 오셨을 때 이리저리 여행이 많아 시차 때문에 피곤하시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면 밤낮이 바뀌는 시차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주 꼬박 고생한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시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무 때나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신단다. 아침까지 억지로 자야겠다는 생각이 없으시니, 잠이 안 오는 밤이나 새벽이 고역스럽지 않으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문득 갱년기를 그다지 힘들지 않게 잘 지나가셨다는 한 집사님 생각도 난다. 그분에게도 갱년기의 흔한 증상인 불면증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자다 깨지면 그냥 일어나서 이 일 저 일 보다가 잠이 오면 자고, 안 오면 그냥 일어나 일을 가신단다. 그럼 다음 날은 어찌 되었건 푹 주무신다나…. 이 정도로 긍정적이면 불면증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찌 됐건 다음 날은 잘 테니까. 그러다 또 잠이 안 오면 다른 일 하면 되니까…. 사람들이 상담을 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증상을 없애는 데에 있다. 다들 골칫거리를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하다. 화가 치미는 현상을 없애고, 불면증을 없애고, 우울감과 불안감을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중략).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으므로 삼등이나 그 이하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중략). 등’은 순위나 등급 또는 경쟁을 나타내고, ‘류’는 위치나 부류의 질적 가치를 나타낸다(중략). 결국 삼류란 질의 문제로 ‘질이 형편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공산품일 경우 품질의 문제이고, 인간일 경우 인격과 인품의 문제이고, 국가일 경우 국격의 문제다.” 정호승 저(著) ‘정호승의 새벽편지’(해냄, 120-12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일등이 꼭 일류는 아닙니다. 일등이지만 삼류 같은 사람이 있고, 삼등이라도 일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삼등 완행열차에 일류 낭만을 실을 수 있고, 일등 고속전철에 삼류 추태를 실을 수도 있습니다. 삼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삼등을 축복하십니다. 꼴찌에게도 박수와 갈채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삼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꼭 일등 같아 보이지만 삼류 인생을 산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늘 상석에 앉으며 일등이 되려 했고, 일등처럼 보였지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빌2:16) 전도사 시절 미국에서 살 때 부모님이 집을 한 채 사주신 적이있습니다. 그곳에서 파를 심어 키워 먹을 생각으로 모종을 20개 정도 구입해서 마당 한구석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이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지 도저히 삽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 또다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하는 식으로 반복하면서 파들어 가 끝내는 모종을 다 심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매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올 때마다 그곳에 들러서 물을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 녀석들이 땅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나올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먹고 말지”하는 마음으로 포기한 뒤로는 관심조차 마음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무심코 그 주위를 거닐던 저는 대변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들의 생명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삽질조차하기 어렵던 그 돌덩어리 같던 땅들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
4. 우리나라의 평신도신학 현황 WCC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평신도신학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개신교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평신도 훈련으로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던 옥한흠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역을 담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평신도에 관한 한국교계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1986년에는 총신대학부설 한국교회문제연구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1992년에는 옥한흠 외 7인에 의한 소책자 “평신도”가 출간됐으며, 1997년에는 심일섭의 “평신도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가 나왔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착화 운동을 평신도신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듬해에 출간된 김점옥의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라”는 주로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리더의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평신도 분야의 발전 과정은 느리게 진행됐고, 체계적인 신학의 정립보다는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한 평신도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은 당시 평신도교회 운동을 실천하던 최승호가 1998
어느 엿장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엿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튀는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술사를 찾아갔습니다. 모진 훈련 끝에 갖가지 마술을 전수받았습니다. 모든 과정을 마친 날, 마술사 스승은 제자 엿장수를 앉혀 놓고 결정적인 마지막 훈수를 해줬습니다. “네가 즐겁지 않으면 보는 사람도 즐겁지 않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타오르지 않는 한, 남을 타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영혼을 싣지 않는 일에 이웃은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거울은 먼저 웃어 주질 않습니다. 내가 먼저 웃어야 합니다. 산소 마스크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 속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산소 마스크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먼저 어른이 착용하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이나 노약자의 차례라고 합니다. 어린이나 노약자를 먼저 돌보는 것이 예절이고 상식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이 먼저 건강해야 약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먼저 맛봐야 합니다. 가장 감동적인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이 먼저 감동 속에서 시를 써야 가능합니다. 가장 능력 있는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말씀을 받은 확신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냉랭하면서도 남
1980년 초 한국의 몇몇 캠퍼스에서 소수의 대학원 기독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삶과 괴리된 신앙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복음주의 기독교세계관 스터디 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카이스트 등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였고, 또 하나는 인문, 사회” 계통의 대학원생이 주축이 된 “기독교학문연구회”였다. 각자의 모임은 큰 틀에서 문제의식과 목적을 공유하고 간간히 교류하며 발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라는 이름 아래 통합됐다. 현재 약 6000명의 회원이 소속된 국내 가장 큰 기독교 NGO기관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 겨자씨보다도 작아 보였던 모임, 그 당시 첫 기도를 심고 뿌렸던, 학생들 대다수는 현재 여러 대학 캠퍼스의 시니어 교수들과 각계 최고 전문가들로 성장했다. 이 단체는 현재 매년 두 차례 대규모 기독교세계관 학술대회와 네 차례의 등재학술지 (신앙과 학문) 발간, 그리고 지속적으로 여러 캠퍼스와 지역 교회에 수많은 자원을 파송해 섬기고 있다. 기독교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요즘, 우리가 이 땅의 청년 세대를 향하여 무엇으로 다시 복음의 농사를 지을 것인가? 어제도 밤늦게
크래머(Kraemer)는 이런 역사적 변질이 성경적 교회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교회사의 경향”이 ‘제도적인 교회’ 쪽으로 더 치우쳐 흘러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힘의 압력” 즉 사회적 및 정치적 압력과 교회 안팎의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하고 효과적인 지도력과 권위가 요청됐던” 상황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성서적인 형태에 가까이 가기보다는 교리와 권위의 단체로 발전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2. 종교개혁으로 인한 회복의 시작 12세기 이후에는 여러 종파가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도전과 반발을 거세게 했다. 14세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저항 운동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에 근거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 했던 이 운동들은 마침내 16세기에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평신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은준관은 이에 대해,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적 평신도 지상주의라는 양극단의 틈바구니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교회론과 만인제사장 사
침례신문의 ‘하늘 붓 가는 대로’ 103회에 다음과 같은 표제의 나의 에세이가 게재됐다. ‘며느리와 딸’. ‘나도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아들 권순태 목사 집에 두 달을 머문 적이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환상적인 커플로서 뭇 교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이민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저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의 존재였다. 며느리는 친할 듯 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말할 듯 하면서 침묵하기를 꼬박 두 달 동안 그러했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 정도를 넘어서 나는 며느리를 경계했다. 어떻든 며느리에게 결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달 체류 중 며느리에게 불평하거나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 노부부는 최대한 노력했다. 끼니 때는 사인 주기 전에 식탁에 앉았다. 밥 먹고는 언제나 잘 먹었다고 말했다. 두 달 동안 이런 시아버지의 “Thank You”에 “you’re welcome”이란 말을 며느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나는 점심은 외식으로 때웠다. 식사 시간에도 며느리와 함께 한 적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10분 이상을 마주 앉아 담소한 적이 없었다. 어딜 가든 담소 잘 하기로 꽤나 유명
1960년 2월 저동교회 임암천 목사가 나에게 “강성찬 전도사를 부흥강사로 초청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청빙해라”고 전했다. 그래서 나는 경북 산골 고령까지 먼 길을 찾아갔다. 농촌교회를 개척한 총각 강 전도사는 마침 자체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집사 내외를 불러서 “멀리서 한 선생이 손님으로 오셨는데 방이 이렇게 차가워서 되갔소, 군불을 잘 넣고 또 반찬도 계란 같은 것이나 생선도 밥상에 오르게 하이소”라고 힘있게 일러줬다. 식사 대접을 잘 받은 후 저녁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따뜻한 방에서 잘 자고 나서 이튿날 나는 강성찬 전도사를 저동교회 부흥강사로 초청하기로 허락받고 모교회 임암천 목사에게 통지했다. 세월이 흘러 강성찬 전도사는 목사가 됐고 부산교회를 부임해 강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해 간증을 듣게 됐다. 그는 평안도 정주의 농부의 아들이었고 선친은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었다. 마침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농토는 공산당에게 빼앗겼고, 그때는 소 두 마리가 전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 중 송아지를 기쁜 마음으로 건축헌물로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연자맷돌을 돌리던 건장한 어미소가 갑자기 혀를 길게 내밀고 침을 흘리며 눈동자가 흐려지고 비
20년 넘게 교제해온 김 목사님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로부터 메일을 받고 나에게도 어느 날 보여줬다. 거기엔 김 목사님의 아들과 여섯 살짜리 손녀가 대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리나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거야. 예수님 믿고 영접하면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단다.” “아빠, 영접이 뭐야?” “아빠가 지난 번 목장 모임 때 간증하면서 예수님을 웰컴 했었지. 그렇게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 마음속에 와 주세요.’하고 웰컴 하는 것이 영접이야. 리나도 그런 기도드릴래?” “아빠, 나도 하나님을 웰컴하는 기도를 할래. 예수님한테 풀로 딱 붙어서 안 떨어질 거라고 말할 거야.” “그럼 리나가 기도하자.”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웰컴해요. 그리고 하나님한테 풀로 딱 붙여서 안 떨어질 거예요. 예수님과 안 헤어질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메일 내용에는 가정에서 아빠와 어린 아이 사이에 신앙적인 대화가 있다. 그리고 아빠가 딸에게 예수님을 영접시키고 기독교적 참된 신앙을 전수해줌이 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런 신앙적인 대화와 신앙적인 지도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원하고 좋은 차타고 넓은 아파트에 살아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원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는 남들이 부러워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우월하다고 인정받을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려고 노력한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어떤 핸드백을 들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가방하나에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원하는 것은 그런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부러움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는 말이 있지만 누가 수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됐다고 하면 “복권에 당첨 된 사람치고 잘 된 사람 없다더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은 무슨 복이 있어 저런 복권에 다 당첨되나 하면서 나도 저런 거 한 번 걸려 봤으면 하고 부러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돈 벌고 노력해서 명품 옷 입고 명품가방 들고 외제차 타고 다니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혼자만 행복하지만 칭찬받는 삶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
우리 집 앞에는 늘 해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현관문 앞 베란다 구석에 늘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현관 앞에 떨어지는 지푸라기와 새똥을 치우기 귀찮기는 하지만 매해 그 구석진 자리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가 신기하고 반갑다. 우리 집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매일 왔다가 가는 손님도 있다. 우편배달부이다. 우편함을 저녁때마다 열고 돈 내라는 고지서와 광고지들을 꺼내 뒤지면서도, 나는 혹시 반가운 소식이 없나 기대한다. 요즘처럼 전자메일과 텍스트가 주요 의사소통이 된 시대에도 이메일을 열 때면 문득 생각한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없을까? 뭔지는 모르지만 기쁜 소식이 없을까? 반가운 사람에게 혹 연락이 있을까? 사람들은 연인이 보낸 사랑의 메시지, 가족들의 귀가 시간, 반가운 친구가 밥 먹자는 전화, 직장에 합격했다는 소식, 월급 올랐다는 소식, 상사가 칭찬한다는 소식 등 기분 좋은 연락들을 기다린다. 멀리 대학을 갔던 자식이 돌아오는 명절을 기다린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새 얼굴을 기다린다. 좋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그 소식들은 지루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하루에 드리워진 회색빛을 무지개색으로 바꾸기도
한 평생을 살아온 시니어(Senior)들에게는 한국의 어제와 오늘은 마치 지옥과 천국을 방불케 하는 느낌을 지닌다. 노년들이 피차 만나면 조국의 발전상에 그저 감격해서 노년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감탄하고 지금의 젊은이가 바통을 잘 받아서 달리고 있다는 현실감에 만족한다. 그리고 언필칭 “세상 많이 변했구나”라고 하루에도 몇 번 씩 토로한다. 가령 스포츠 세계를 한정해 놓고 보자. 도대체 골프가 뭔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스포츠인가? 지독히 가난했던 노년 십대 때 야산에서 소를 먹이다가 귀가할 즈음이면 막대기자로 토막 막대기를 멀리 쳐 내는 놀이를 했다. 힘껏 쳐서 토막 막대기가 멀리 멀리 던져지면 그날 저녁엔 보리밥이라도 먹겠다고 기뻐하고, 거꾸로 이놈의 토막 막대기가 멀리 못가고 가까이 떨어지면 그날 저녁엔 틀림없이 죽그릇이 안겨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막대기치기 놀이를 한 우리들은 지금 골프의 선구자요 선조다. 호화로운 잔디밭이 아니라 자연 야산에서 토막 막대기를 던진 것이 골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학설(?)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 땅의 노년들의 이야기임은 물론이다. 그럼 축구란 무엇인가? 지금 세계는 축구 스포츠가 우상이 되고 있지 않
역사상 가장 큰 재난 중 하나가 1271년에 일어났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칸을 방문했다. 당시 중국과 인도와 아시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쿠빌라이 칸은 마르코 폴로가 전해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몹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마르코 폴로에게 교황에게 가거든 기독교에 조예가 깊은 사람 100명을 자기에게 보내주면 자기 자신과 모든 신하들과 장군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일이 신속히 이루어지 않았다. 30년 이상이나 선교사 보내는 일이 지연됐고 그나마 겨우 두세 명의 선교사가 늦게 도착했다. 중요하고 큰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쿠빌라이 칸 한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그 당시의 영토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겠으며, 오늘날 아시아와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 한 사람의 구령이 얼마나 큰가? 헬라의 스파르타 표어에 ‘너 하나하나가 산 벽돌이 되라’는 말이 있다. 모든 수는 ‘하나’에서 시작하여 10, 100, 1000, 10000, 억, 조, 그리고 경으로 늘어난다. 1초가 60개 모여 1분이 되고, 한 시간은 60분,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