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가정과 동거하든 분리해서 살든 간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다. 옛말대로 특별히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친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개 불편하다고 할까. 차라리 조심스럽다고 하는 게 가장 예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아들 권순태 목사 집에 두 달을 머문 적이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환상적인 커플로서 뭇 교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이민 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저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의 존재였다. 며느리는 친할 듯 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말할 듯 하면서 침묵하기를 꼬박 두 달 동안 그러했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 정도를 넘어서 나는 며느리를 경계했다. 어떻든 며느리에게 결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달 체류 중 며느리에게 불편하거나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 노부부는 최대한 노력했다. 끼니 때는 사인 주기 전에 식탁에 앉았다. 밥 먹고는 언제나 잘 먹었다고 말했다. 두 달 동안 이런 시아버지의 “Thank you”에 “You’re welcome”이란 말을 며느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나는 점심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씀에 은혜받아 그날 저녁예배에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신학생은 4인 가족을 돌볼 돈 55달러를 하나님께 전부 헌금했다. 미국 산골 가난뱅이 목사의 아들로 17세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가출하여 방황하다가 폐결핵으로 몇 개월 사이 20kg으로 줄어들자 귀가하여 병중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서 2절) 읽고 기도하여 고침받았다. 1960년 대전 침례신학교 예과에 입학해 오랄 목사의 전기를 읽고 큰 은혜를 받았고, 미국 털사(Tulsa)에 그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의 놀라운 업적에 놀랐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면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부으시고, 또 어려울 때 하나님께 전부를 바치면 부요하신 하나님은 그의 전부를 돌려주십니다!”(말3:10) 이 설교를 듣고 “과부의 생활비 전부”(막12:24)같은 전 재산 18달러 78
미국에 있는 동안 생활하던 곳이 미국의 중부지역에 있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근처였다. 미시시피강을 사이에 일리노이주와 미주리주가 만나는 곳이다. 짧은 미국에서의 생활이지만, 생각하면 엄청난 어려운 일들을 많은 겪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그네의 삶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모두가 나그네와 같은 이민 사회에서 같은 한국 사람들로 인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받고 살아가는 있는 모습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지역의 강퍅한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됐다. 영적인 문제로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방해하는 영적 싸움이었다. 그것은 가까이 있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링컨 박물관을 관람했을 때, 더욱 실감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있었다는 곳, 바로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며 가족과 헤어지고 고통 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가 많이 부르며, 한이 많은 한국 사람이 작사한 노래라고 알았던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노래가 세인트루이스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도시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찬양 사역자였던 토마스(Thomas A. Dorsey
미국 어느 시장에서 한인 교포 두 명이 싸우고 있었다. 그 현장에 흑인 경찰이 오더니 “당신들 교회에 가서나 싸우지 왜 여기서 싸우냐?”고 질책하면서 함부로 말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술집에서 싸움질 잘 하던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직분자가 된 후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국내에서 말썽을 피우던 자가 해외에 나가서도 그런 짓거리를 자주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도 한인 교회 안에서 분쟁이 심했으니 흑인 경찰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왔으리라고 추측되어진다. 누가복음 17장 10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시길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심령 안에도, 가정에도,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 안에 이미 있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시기, 증오, 알력, 반목, 분쟁이 가득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교회들은 전혀 바람직한 교회가 될 수 없으며 아예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결혼은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신데렐라가 한번 춤추고 사랑에 빠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신데렐라가 결혼해서 왕자와의 배경 차이, 문화 차이, 성격차이, 왕비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담 등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 것인지, 과연 행복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혼을 골인하면서 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의 황홀한 경험에 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매달 날아오는 청구서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뒷모습에 맞닥뜨린다. 구원의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사역에 헌신하고 시작할 때는 신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교회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도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하지만 그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마치 김빠진 콜라 맛처럼 느껴지면서 아무 감정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거룩하고 멋진 순간 뒤에는 훨씬 많
“목사님, 오늘 서울대에서 하는 학생들 세미나에 제가 도울 일 없을까요?” “고맙습니다. 문 박사님,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학생들 간식 좀 부탁드립니다.” “무엇으로 할까요?” “약 20명이니까 피친(피자와 치킨)세트 라지로 4개 정도 주문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목사님 잠시 후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약 1년 전 캠퍼스에서 한 형제와 점심을 같이 먹던 중 작은 겨자씨가 하나 싹 텄다. 형제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왔다. “목사님, 제가 요즘 기독교 역사에 관심이 생겼는데요. 혼자 책을 읽다가 캠퍼스 오시는 날, 가끔씩 뵙고 궁금한 것 몇 가지씩 여쭈어 봐도 될까요?” 그렇게 해서 매주 만남이 시작됐고, 조금씩 한두 명씩 멤버가 붙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재 매주 5~6명이 모여 기독교 서적을 읽고 나누는 서울대 기독대학원생 독서모임이 됐다. 이 모임은 지난학기부터 주변의 학생들을 초청해 함께하는 오픈 세미나를 가끔씩 열기 시작했다. 지난 학기 처음 4차 산업혁명 관련 화두가 독서모임에서 대화의 논점이 됐을 때, 누군가 함께 하는 초청 세미나 모임을 제안했다. 그리고 기독교인 과학자로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적 대응”이라는 주제로 먼저 고민해 오신 전문가
목회매뉴얼에 대한 이론적 근거 교회가 흔들리면 교회 안에 속한 성도들이 흔들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진이 났을 때 건물이 흔들리는 이유는 기초를 받치고 있는 지지대인 땅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건강한 교회를 받쳐주는 기초와 같은 역할은 교회가 공유해야 할 교회의 핵심가치이다. 교회는 목적이나 목표보다 가치가 더 중요하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교회의 목적이 설정되고 목회의 목표가 세워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면 교회의 핵심가치를 가장 먼저 세워야 한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보다는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사역의 목적과 방향보다 왜 그러한 목적을 두고 있는지 왜 그러한 방향으로 달려가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분당에 신도시가 입주할 즈음에 좋은 위치에 교회를 건축해 부흥을 한 교회가 있었다. 분당 가까운 판교에 신도시가 입주할 때 또 한 번의 비전과 목적을 세웠다. 판교 신도시 입주에 맞춰 큰 성전을 지어 이전하는 것이 그 교회의 목적이 됐고 비전이 됐다. 결국 판교에 수천 명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비전을 이루고 목적을 이룬 것처
펜윅이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가정과 교회 지도자들을 통한 가르침과 영적 훈련, (2)교회에서 교사 직분 등을 통한 훈련, (3)직장생활 등 사회 활동 경험을 통한 인성개발, (4)성경 사경회를 통한 선교적 사명 고취, (5)성경연구와 다른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 발견, (6)선교 사역지 결정, (7)사역지로 가기 위한 파송 단체 물색, (8)후원자 모집, (9)선교 사역지로 출발. 한국에 도착한 펜윅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직접 사역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후일 전도자를 길러내는 데 그대로 적용됐다. 한국에 도착한 펜윅은 자신도 전도와 성경교육 사역을 실천하면서 다른 많은 사역자를 훈련해 파송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전도자의 자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의 실질적 지식을 알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기거하면서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1개월을 기본 단위로 한 주간은 기본적인 교리를 배우고, 세 주간은 나가서 성경을 보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식으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대단한 위력을 지닌다. 인문학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대한 명언 교훈을 던지고, 사회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한 명언 교훈을 주고, 자연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삶과 자연환경에 대한 그것을 주고, 그리고 의학과학 사람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상태를 설명하는 이론을 낸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세상소리다. 그럼 세상소리 명언의 특징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의 소리다.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갈 운명의 사람들의 소리다. 거기엔 영(靈)의 소리는 없다. 오직 육(肉)의 소리만 있다. 세상소리의 한계는 영계(靈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함에 관한 교훈을 두고 땅 사람의 명언과 하늘 사람의 명언을 한 번 대조해 보자. 이하는 계인철의 ‘그리스도인의 심장이 뛰는 사람’(P.146~147)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가 놓친 것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두 저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영적인 단순함은 두 저자의 관심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베르너터키 퀴스텐마허-로타르 J. 자이베르트의 ‘단순하게 살아라’는 표피적 또는 얕은 물가의 단순함, 즉 육체적 단순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단순
나도 흘렸다(Me too) 영어성경에는 “예수는 울었다”로 주어와 동사의 두 단어로 신구약 성경 66권중에 가장 짧은 절이요 문장이다. 헬라어인 “에다크루센 호 예수스”로 세 단어로 된 문장인데 한글 번역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로 되어있다. 예수께서 친구로 불렀던 나사로의 무덤 앞에 한 영혼에 대한 소리 없는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었다. 신약성경에서 특히 사복음서를 수없이 읽으면서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고”(눅10:21) 또 기뻐하신 기사는 몇 곳이 있었지만 울으신 것은 세 번인데 웃으셨다는 기사는 한곳도 발견하지 못했다.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처절하게 저주받아 가련하게 죽어가는 인생들을 보시고 어찌 웃으실 수 있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왔다. 두 번째 우신 시기는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눅19:41~44) 파멸되리라는 예언대로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한 공격으로 처참하게 훼파되고 1900여년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의 비극이었고, 셋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 흘려 기도하실 때(막14:32, 눅22:44) 우셨는데, 히브리서엔 “
얼마 전 금요일과 주일은 좀 힘든 날이었다. 금요일 새벽, 새벽기도를 인도하려 나오려는데 갑자기 몸살 기운이 감돌면서 딱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 뭔가? 하지만 그 새벽, 갑자기 설교를 누군가에게 맡기기도 그래서 힘들지만 나가서 인도는 했는데, 그때부터 하루 종일 몸살기는 더 커져버렸다. 기도하면서 버텨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철야기도회 인도라도 누구한테 부탁할까 했지만, 그 역시 갑작스레 맡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오후 늦게 급히 내과를 찾았다. 주사 한방을 억지로 부탁을 하고는 약도 좀 세게 조제해 달라 부탁해 먹고는 철야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래서인지 정신까지도 몽롱해져 그 기도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다. 술 취하면 필름 끊긴다더니 약에 취한 나도 그랬다. 하지만 프로(?)답게 애써 태연한 척은 했다. 물론 예민한 성도들은 눈치 채셨을 수 있다. “목사님이 다른 때보다 좀 힘들어 보이신다.” 그래서 철야기도회가 끝나기 무섭게 사택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딸아이는 아직 기도중이라는 문자를 받고는 “먼저 자겠다”며 누웠다. 그렇게 약 기운에 취하니 토요일 아침 늦게까지 잤다. 그러고 나니 신기방기, 몸은 한결 가벼워지
목회매뉴얼의 필요성 “지금은 목회하기가 어려운 시기이다” 개척뿐만 아니라 기존교회도 점점 성장 동력을 잃고 있다. 정말 목숨을 내놓을 만한 열심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적용도 없으면 교회성장이 어려운가? 목회자가 주의 종으로 헌신하고 4년 이상의 신학교육을 받고 부교역자 경험을 했고, 또 소명 가운데 개척을 하였거나 목회하고 있으면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는가? 국민일보를 비롯해 기독교신문이나 교단신문에서 여전히 “이 세미나에 오기만 하면 우리의 목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광고가 넘쳐나지만 어떤 경우는 오히려 목회의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지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교회는 생명 공동체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목회는 목회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목회자는 복음의 확신을 갖고 목회철학을 온전히 성경에 두고 그것에 맞춰 잘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시행에 있어서 좀 어설프고 부족해도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에 주님의 돌보심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그래서 교회는 목회자가 특별한 능력, 특별한
기독교의 실천은 세 가지 국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첫째는 “무엇을 실천하는가?”와 관련하여 진리(복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둘째 “누구에게, 어디서 실천하는가?”에 관해서 상황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와 관련해 방법론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실천적 신학이란 인간실존이 지니고 있고 해결을 위한 문제에 대해 응답하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와 생활과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진리의 생동하는 역사가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와 그 다양한 기능들(예배, 설교, 상담, 봉사, 교육 등등)을 통해 역사 속에서 현재적으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으며 어떤 개혁이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고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신학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결국 교회와 교회의 활동이 기독교 실천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앙이 1차 체험이고, 신학은 2차체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의 순서가 바뀌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된다.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신학은 최종적 가치가 없다. 신학은 진리를 알고 구현하기 위해서 단순히 이론적 앎만 가지고는 안 되며, 실천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정 받기위해서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서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첫째는 생존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지” 라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의미다. 그대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복음사역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는 일을 성공 하느냐? 못하느냐? 이일로 내가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미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연합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제시했다. 그는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고동락한 경험을 토대로 그 분의 존재의 나타남을 선언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b).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자기의 견해를 말할 때, ‘내가’라는 단수형 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라는 복수형 주어를 즐겨 사용했다. 이것을 통해 저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견해보다는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고백하는 견해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요 3:11; 6:69). 요한은 바로 앞에서도 로고스가 화육해 “우리 가운데 거했다”라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의 성육신을 공동체의 고백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했다. ‘영광’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핵심 단어이다.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나타나심)을 표현하는 시각적 모습(때때로 불과 구름의 모습)을 가리킨다(출 33:22; 신 5:21; 왕상 8:11). 영광은 곧 피조 세계에 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