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친구들 모두가 옥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던 시절, 저는 혼자 타동네 보은으로 떠났습니다. 사립학교였지만,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어머니와 좀 알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클라리넷으로 S대 보내준다는 엄청난 소리에 그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리곤 아는 사람도 어른도 없는 그곳에서 늘 어려웠던 우리 가정의 경제와 부모님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시작되자, 제 안에 감추어 있던 분노와 늦은 사춘기 혈기가 끝없이 나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때리고 맞고, 싸우던 1학년때부터 특기생 명목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빠져 나와 저녁이 되면 기본으로 남들 모두 하는 야간 자율 학습 때, 관악부실에서 연습을 빼먹고, 3m 담을 훌쩍 뛰어 넘어 학교를 나와 아르바이트를 해 모아 둔 돈으로 태권도 장, 검도장, 그리고 유도까지 하루에 최소 3시간씩 운동만 하고 그렇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집중했던 수업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문학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하도 싸우고 다녀서, 꼴통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을 때, 그 당시 모든 학생에게 까다롭기로 소문났었던 문학 선생님께서 제가 수업시간에 써낸 시를 읽고 감탄을 하시며, 모든 반
“내가 뒤돌아보니 너한테 잘못한 것이 너무 많다. 다 잊어버리래이….” “어머니 별말씀을 내가 엄마한테 애먹이고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다 용서하시고 먼저 천국에 올라가시이소. 마지막 소천 기도를 올립시다.” 봄에 위암의 진단을 받으시고 8개월쯤 지나 흔들의자에 앉아 기도 중에 조용히 임종하신 어머니 앞에 눈물을 흘린 기억이 어버이날이 올 때마다 새롭다. 어려운 울릉도 주사골 농촌 살림에 10남매를 낳아 아홉째 아들은 어려서 일찍 보내고 9남매를 키우느라 수고하시다 절간을 접고 40세에 중병이 들어 교회에 나가든 중 “하나님요, 날 좀 70세까지만 살려 주시이소!”라고 간절한 기도에 응답받아 30년을 더 사시고 만 70이 되어 소천 앞에 모자간에 회개하고 먼저 천국가신 어머니의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도 커서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낳아 키워보면 그때야 내 마음을 알끼다!”고 가끔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아래에 떠오르는 이야기는 저의 경험의 거울처럼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설빔으로 받은 옷을 화롯가에서 태워 버린 날 밤새워 울던 동생을 보고 다시 사 줄 테니 울지 말라며 위로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이번 설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지난 달 교회 청년 2명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들이 입대 하자마자 부대에서는 그들이 입고 있던 사복들을 다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조금도 군사 훈련을 받은 것이 없었지만 신분이 군인이 된 것입니다. 군복을 입어서 겉으로는 군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사람은 여전히 100% 민간인이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조교의 지시에 따라 군인에 걸맞은 사격 훈련과 체력강화 훈련과 군사전략 교육 등 한 가지, 한 가지 순종하며 나아갈 때 점차적으로 속사람이 군인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믿어 죄사함 받아 겉으로는 의인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속사람 또한 의인으로 바뀌어 진 것은 아닙니다. 그 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의로우신 말씀대로 한 가지씩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짜 의인의 면모가 점차적으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부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대
물론 옳은 말이긴 하다만 그래도 아직은 이런 구절까지 와 닿을 나이는 아닌데, 왠지 요즘은 사무엘상 7장 12절이 참 와 닿는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여기까지 하나님 날 도우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라는 고백. 생각해보면 너무나 정직한 고백이다. 아마도 이는 일주일 전, 어느 권사님 칠순예배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궐동굴다리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사는 오산시에는 남북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지역을 두 쪽 내는 경부선 철길이 있다. 그래서 오산의 동(東)과 서(西)는 고가도로나 굴다리 형태로만 소통되는데, 궐동굴다리도 그 중 하나다. 사실 폭은 얼마 안 된다. 해봐야 3차선 도로에 작은 인도 하나 있으니 뭐 20미터나 채 될까? 경부선의 총 길이 445km에 비하면 1/22,500밖에 안되는,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굴다리는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 정말이지 만의 하나라도 그것이 부실해지거나 무너지면, 대한민국 국가기간망에는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한
헤럴드 브리슨(Harold T. Bryson) 박사는 “성경에 충실한 설교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본문 주해에서 시작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연결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자는 본문과 현시대의 청중의 순전한 만남을 주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본문과 청중 간에 어떻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적용(application)이다. 그렇다면 적용은 무엇인가? 설교에서 적용은 라틴어의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ap는 ‘to’이고 plico는 ‘to knit’(뜨개질하다)라는 뜻이다. 적용은 성경본문과 청중을 연결하는 것이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설교대학원 학장인 데이빗 알렌(David Allen)은 “훌륭한 설교는 실제적으로 적용된 강해설교”라고 강조한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 박사는 적용이야말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강조한다. 설교는 단순히 본문 주해에서 끝나면 안 되고 청중에게 적용이 되어야 설교 본연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용을 잘할 수 있는가? 마치 설교자가 본문을 이해하듯 청중을 알아야 한다. 장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영국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시골 장로교회의 목사님에 대한 일화를 읽은 일이 있다. 당시 공업화 현상으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가는 작은 시골교회인지라, 목사님이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또 그 동리의 사람들은 까다로운 사람들로서, 저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복음의 진리에 대해 도리어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러다 보니 그의 사역을 통해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장로들의 선동에 의해 목사님은 강제로 교회를 떠나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이 시골교회를 고생하며 섬겨오던 목사님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건이 있었다. 어느 주일 예배 중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쟁반을 받아 바닥에 놓고는 일어나 그 위에 올라섰다. 이 이상하고 괴이한 일을 보고 책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자. 그 소년은 “나는 어리지만 목사님의 삶과 사역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오늘 나는 드릴 것이 없어 나 자신을 고스란히 하나님
부족하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도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났지 않느냐?”는 어느 분의 질문을 받으며,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고 진도에 내려와 목회를 위해 기도하던 시간을 회상해 본다. 몇 년 전 생각하기조차 힘든 시간을 몸소 겪은 진도 땅, 그것도 수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얼룩진 팽목항에서 몇 분 거리에 교회가 있는 마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하신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마을의 노년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지 못한 마음이 느껴졌다. 민속공연을 광고하는 홍보지에 “굿 보러 오세요.” 공공연하게 적어 놓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교회에서 굿한다”고 말하는 지역이다.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적 무지 속에 살아온 지역 주민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슬퍼진다. 복음을 들고 문화가 전혀 다른 선교지로 달려가는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말은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다른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요, 선교사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고령화 되어가는 한국의 농어촌은 연령적으로는 더 어리고 젊은 타 문화권의 선교지보다 변화도 없고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환
이외수란 작가가 거미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칭송하는 글을 썼다. 우리나라 거미들은 독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온순한 벌레라고 했고, 부화한 새끼를 위해서 자기 살을 뜯어 먹이며 기르는 에어리 염낭 거미를 예를 들면서 모성애가 숭고하다고까지 극찬했다. 특히 그는 거미줄로 지은 거미집에 대해서 ‘그것은 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투명한 실로 허공에다 섬세하게 드리워 놓은 한 편의 시이며 노래’라고 표현을 했다. 누구든지 거미가 허공에다 거미줄을 친 것을 보면 놀라고 신기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거미줄은 견고성이나 영구성 면에선 언제나 형편이 없다. 1995년 6월에 100평 남짓한 예배당을 준공했다. 23년 전 일이지만 그 때 재정난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으며 몇 개월에 걸쳐서 지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입당을 하고 며칠 지나서 예배당 바깥 한 곳을 보니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았다. 얄밉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몇 달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건축했는데 왕거미는 하룻밤 공사로 우리의 예배당에다 자기의 주거용 사업용 거미줄을 쳐놓았던 것이다. 그 날 왕거미와 거미줄은 당장 없어졌다. 단번에 빗자루로 거미줄을 쓸어버렸고 왕거미는
한국에서 상담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아직도 상담소의 문턱은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민을 왔던 그 당시의 문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사는 해외 거주자들에게 상담이란 왠지 수치감과 의구심을 유발하는 단어이다. 의사를 보러 간다는 말은 시장 간다는 말처럼 쉽게 이야기되고 정보를 나누지만,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숨기고 싶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상담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가슴이 철렁하다.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겨야지, 뭘 상담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린다. 그래서 어쩌다가 상담을 요청하는 ‘희귀한’ 한국 분들의 사정은 의외로 심각하다. 자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아동보호기관에게 아이를 빼앗길 위기에 있기도 하다. 이미 한쪽에서 이혼을 결심한 경우 법적인 수속을 밟을 때쯤 상담소를 찾기도 한다. 중독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이미 모든 것을 잃을 때에야 문제를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과 치유의 역사들을 보지만, 이미 상처 입고 신뢰를 잃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돌이키기 쉽지 않다. 기다리다가, 괜찮다고 자위하다가, 호미로 막을 일에 가래가 필요하
회복은 무조건 옳다. 하나님의 복음은 망가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기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최근 한 선교단체에서 개최한 이단관련 특강에 다녀와서 말했다. “아빠, 세상에는 별의 별 이상한 이단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구원파….” 어느 덧 다시 학기말이 됐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캠퍼스의 CCC, IVF, JOY, SFC 등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분주하다. 선교단체 마다에서 개최하는 여름수련회에 많은 학생들을 초청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동일하게 분주해지는 것이 이른바 캠퍼스 이단들이다. 이 시기가 되면 구원파는 IYF(IVF가 아님)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각 단과대학 거의 모든 화장실 소변기 위에 여름방학에 학생들이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초청한다. “굿뉴스코해외봉사단”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해외봉사 초청 스티커를 부착하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신천지는 UNPO(United New University Peace One)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학생들을 유혹한다. 이 단체는 “새로운 문화로 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멋진 단체명의 의미를 내세우고, 마치 자기들이 U
그렇다면 바람직한 설교는 무엇일까? 좋은 설교는 성경 본문과 오늘날의 청중을 견고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설교이다. 성경 본문이 처음 쓰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말씀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를 통해 의도하신 뜻을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전달해야 한다. 남침례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헤셜 요크(Hershael W. York) 박사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청중들과 교감을 강조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청중들에게 성경적 정보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고 믿는다”라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편향된 설교 접근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양되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침례교회 설교는 어떠한가? 한국침례교회는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학노선을 지향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본문의 계시를 강조하고 연구하지만 실제로 청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한진환 박사의 설명처럼 “청중을 그저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을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한 변수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침례교 설교도 본문과 청중 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이 지방회는 독일 선교사 목회자로 떠날 전도사를 위해 목사안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목사 후보자 전도사는 침례교 목사안수 요건을 다 갖춘 자인 것만은 사실이나 갑작스러운 독일로의 선교 목회를 떠나는 만큼 서둘러 목사안수를 받아야만 했었다. 듣건대 목사 안수를 받는데 꽤나 시간을 요한다고 하는데 이 지방회는 속전속결식으로 목사안수를 진행했다. 그러나 결코 약식은 아니나 속식(速式)이었다. 이 지방회는 두어달 만에 면접시취, 구술시취, 논제시취를 끝냈다. 이미 독일에 체류한 전도사가 2주간의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곧 현지로 돌아가야 하겠기에 속전속결로 해줬다. 이 지방회는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게 해야 하는 지방회였다. 듣건대 목사 안수를 받는데 엄청난 경비부담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지방회는 무경비 안수를 치렀다. 주변을 보면 시취위원이니 안수위원이니 해서 몇 차례 모일 때마다 식사대접, 그놈의 거마비에 혼줄이 나는 어린 전도사들의 처지였다. 그러나 이 지방회는 그런 전례가 없다. 지방회에서 모든 것을 사양하는 바람에 목사안수 후보자는 겨우 사정하에 간단한 중식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 특전을 얻었다. 전도사를 독일 선교사 목사로 추천한 교단의 어떤 어른 목
조선 말기 당시 관직은 참봉이었던 홍봉조씨는 1850년경 일찍 무인도인 동해의 고도 울릉도(鬱陵島:답답한 언덕 섬)에 맨 먼저 들어와 살았다. 1890년 어느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독도(獨島)에 나갔는데 왜놈 어부들이 물개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어부들을 몰아낸 일이 있었다고 홍봉조씨의 손자 홍순칠(洪順七)씨는 말했다. 또 직간접으로 1950년초 어려서부터 저가 들어온 독도를 지킨 얘기를 아는대로 아래에 적어본다. 홍순칠씨가 초대 참모통장 최병덕 장군의 호위병으로 복무한 일이 있어고, 6·25 사변중 원산 전투에서 탱크를 타고 수색하다가 부상을 당해 1953년 봄 상사로 제대한 뒤 고향 울릉도에 돌아왔을 때, 울릉도 첫 개척자인 조부 홍봉조씨는 일본 사람들이 독도는 자기의 영토라고 표지판을 세워놓았다고 분노하는 말씀을 들었다. 통일신라때 거칠부 이사부 두 장수의 군대가 동해의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남긴 울릉도 태하동 해변가 석벽의 글씨가 증명한다. 지금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 글은 자못 조심스러우면서도 역사적 사실이기에 강력한 자부심으로 쓰고 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외교경로를 통해 항의한다면 유엔군 사령부 지휘하의 국군병력이
한국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말 중 하나가 4차 산업 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로봇과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등을 융합하는 기술적 변혁의 움직임이다. 미래학자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때는 이들 중에 70%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10년 이내에 길에서 운행되는 자동차 10대 중 1대는 무인자동차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고도의 기술적 변혁은 이미 시작됐고, 사회 각 기관에서는 혁신의 시대를 선도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기독교 연구기관에서도 근래에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고 있다. 그렇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설교자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현대 설교자에게는 ‘해야 할 일’(to do lists)이 많다. 또한 목회환경이 변화하기에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캠벨 몰간(Campbel Morgan)은 “사역자의 최상의 임무는 설교이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큰 위험
4) 귀납적 개요 설교 본문 : 요한복음 3:1~15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생의 길 서론 : 이 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공과 업적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삶의 공허감과 영적인 갈증을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해 준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I. 수많은 성취와 업적들(과학, 부와 재물, 학문, 지위 등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삶의 목마름과 갈증이 있음 -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인생 - 위대한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 본문의 니고데모 이야기 -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혼란 가운데 있는 인간 - 현실과 물질세계에 갇혀있는 인생 - 영적 진리(거듭남)에 어두운 당대의 지성인 니고데모와 같은 현대인들 II. 알 수 없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는 인생 - 인간적인 능력(돈, 명예, 권력, 쾌락 등)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추구함 - 소유하면(위에 것들) 소유할수록 영혼의 갈증은 고조 됨 - 한국 정치인들의 말로 -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 등등 III. 길과 진리 되시는 주 예수님만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줌 - 모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