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남침례교 해외선교회(IMB)는 2009년부터 세계화를 위한 노력으로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에 힘써 오면서 지난 10여년간 세 번의 지도자 회의(Global Summit)를 통해 세계화 전략을 세워왔습니다. 그 결과로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세계화(Globalization) 사역의 전담 부서를 세우고 권역별로 세계화 전략팀을 만들고 지역별로 담당자를 선임해 세계화 사역에 힘쓰고 있습니다. IMB에서 추구하는 세계화의 전략은 각 국가의 현지 선교 자원들과 협력해 그들이 지상대사명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도록 돕고, 타문화 선교사를 보내는 것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격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GMP 파송과정> IMB의 세계화의 의지는 현 총재인 폴 칩우드 박사(Dr. Paul Chitwood)의 설교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들의 조사에 의하면, IMB는 전 세계적으로 140개의 침례교 교단과 연합을 하고 있습니다. 175년의 역사의 수고가 남긴 결실입니다. 우리는 그 파트너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IMB 팀과 함께 일할 500명의 세계 협력 선교사(
18세기에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라비안이라고 부르는데, 로마 가톨릭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서 진젠돌프(Zinzendolf,1700-1760)백작의 영지로 피신해 이주하면서 모라비안과 진젠돌프와의 만남이 이뤄졌고, 후에 이들이 이룬 공동체가 널리 알려진 헤른후트(Herrnhut)입니다. 헤른후트는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모라비안교도들은 오늘날 선교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개신교 최초의 선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자비량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비즈니스선교의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선교 전략은 ‘기도’라고 보았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100년 이상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각자 기도시간을 정해서 담당하며 릴레이로 기도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헤른후트를 방문해 보면 알 수 있지만,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기도의 탑”이 있습니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면 사방으로 그림같이 아름답게 펼쳐진 목가적인 아름다운 마을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시간대별로 와서 기도의 릴레이를 이어가던
무더운 더위가 한창이던 7월 31일 바쁜 출근 시간에 평소에는 듣지 않던 뉴스를 틀어 놓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속보 방송이 화면에 뜨면서,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진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그 날 따라, TV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어떤 비행기인지 확인을 했다. 확인된 순간, 식은땀과 함께, 온 몸이 경직되고, 숨을 쉬기 힘들어 주저 앉았다. 그 비행기에는 참으로 귀한 형제가 타고 있었다. 이 형제는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하고, 원래는 갈 수 없었던 그 오지에 다른 선교사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좋아하며 자원했었는데, 그리고 현지에서 먼저 사역을 했던 저는 현지 상황 때문에, 그의 비행 일정을 조정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었는데, 꼭 그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던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선교지를 향해 가는 중에 아니 도착하기 직전, 비행기 사고로 순교했다. 1992년도 여름이었다. 사역하려던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왜? 저는 이후 몇 개월 동안 식사를 잘 못하고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 그 후 여러 나라에 의료선교를 하며, ‘왜’라는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왜 선교를 해야하는가? 과연 죽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무의미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신 냉전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봅니다. 이외에도 서남아시아의 스리랑카는 디폴트를 선언하면서 연일 전국적인 시위로 한 치 앞을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와 지도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일 시위를 벌이는데, 이 틈을 타서 폭력과 방화, 재산 약탈이 계속되자 스리랑카 정부는 이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림으로 정국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하루가 멀 듯이 분쟁과 폭력 그리고 자연재해로 하루 아침에 고향과 정든 터전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8000여만 명의 난민을 포함한 강제 실향민들이 고통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세계는 지금 끝없이 불안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중동의 이라크와 시리아, 예멘,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와 남수단, 나이지리아, 서남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 남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등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내전과 반인륜적인 폭거와 압제로 인해 수많
3년만이었습니다. 2019년에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로 하늘길이 막혀 메일로만 안부를 묻다가 드디어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러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장장 30시간에 걸친 길고긴 여행, 목적지는 인도 아삼주에 있는 암구리입니다. 아삼주는 인도 북동부에 부탄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있는 좁은 협로를 타고 들어가 있는 지역으로 부탄과 방글라데시 미얀마에 접해있는 인도의 한 주에 속해 있습니다. 생활수준은 우리의 1970년대 정도로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도로이며 고속도로라고 해봐야 우리의 2차선 국도수준입니다. 27시간에 걸친 비행과 환승 3시간에 걸쳐서 차로 들어가 도착한 곳은 암구리 지역에 있는 갈보리 미션 스쿨입니다. 3년전에 성림교회 성도들의 건축헌금으로 공사가 시작돼 그동안 수마와 전염병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건축이 완성되어 초중학교 과정의 갈보리 미션스쿨과 미국 시애틀에 본교를 두고있는 워싱턴 인터내셔널 세미나리 칼리지 인도분교 현판식 예배를 주님의 은혜가운데 드리게 됐습니다. 3년만에 다시 와본 갈보리미션교회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해있었습니다. 3년전만 해도 천막 아래 맨땅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공부하던 학생들
저는 캄보디아에서 이 글을 씁니다. 이번 방문이 네 번째인데,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지난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던 국가라는 사실이지요. 1984년도에 개봉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제가 됐던 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인해 세상에 많이 알려지고 관심을 끌었습니다. 캄보디아 내전을 취재하고 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시드니 쉔버그’의 체험에 근거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국 영화인 ‘킬링 필드’를 보면서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며 한 동안 가슴아파했던 기억이 내게는 아직도 새롭습니다. 과거 찬란했던 ‘앙코르(Ankor)왕국’의 신비한 유산을 간직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근대사에 있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들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 없는 야만적인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소름 끼치는 대 학살극을 벌임으로 피로 물들었던 ’킬링 필드‘가 바로 캄보디아입니다. 그래서 더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인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93
우리나라에는 각종 기념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매달 14일마다 지키는 비공식적인 기념일들이 있습니다. 매달 14일에 ‘ㅇㅇ데이’를 붙여서 기념하고 있는데, 1월은 ‘다이어리데이’, 2월은 ‘밸런타인데이’, 3월은 ‘화이트데이’, 4월은 ‘블랙데이’, 5월은 ‘로즈데이’, 6월은 키스데이’, 7월은 ‘실버데이’ 등 수식어도 매우 다양하기 이를데 없을 정도이며, 다분히 상업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지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날들을 기억하고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겐 기독교 정신이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허황된 개념으로만 비쳐지지만, 비신자들은 그런 날들에 의미를 붙여서 즐기고 서로 소통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우리의 과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분히 반기독교적 혹은 비상식적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척만 하면 오히려 우리가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다 기독교적인 전통과 가치관에 입각한 어떤 기념일이나 다 같이 즐길 만한 축제일 같은 것도 없으므로 비신자들을 마냥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들에게 대안을 주지 못하면서 무조건 잘못이라고 지적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주님은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는데,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목자는 각각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 말씀이 저의 마음 깊은 곳에 비수처럼 꼽히는 경험을 했는데, 그 후로 이 부분이 저의 목회의 기본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양(교인)들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으며 언제나 양들의 이름을 즐겁게 부르곤 했습니다. 목자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의 이름을 아는 것은 목자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자 목회에 매우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평생 세 교회를 섬기고 은퇴를 했는데, 제가 섬겼던 교회들의 유치부 어린아이들 이름도 다 알고 있어서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축복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제가 섬겼던 교회는 규모가 큰 교회가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목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양들은 무척 좋아하고 감사해 하는데, 목자가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어떤 은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목자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양의 이름을 모르는 목자는 어떤 면에서 목자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한 공당의 대표가 장애인들의 시위 문제를 비판하면서 장애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됐습니다. 이 정치인은 장애인들의 시위 방식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들의 외침에 집중할 때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위에서 장애인들의 요구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보통 사람들처럼 활동할 수 있도록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와 유사한 시위가 시작된 지 20여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보통 사람처럼 자유롭게 이동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장애인 복지의 핵심은 ‘정상화(normalization)’와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라는 아젠다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정상화라는 말은 쉽게 설명하면 장애인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사회통합은 장애로 인한 차별과 구분을 없애고 하나의 공동체에서 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공동체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장애인을 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가 무엇
안녕하세요. 저는 FMB 소속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재성 선교사입니다. 지난 2004년도 카자흐스탄에서의 순교사건(김진희 선교사)으로 인해, 다시 카자흐로 돌아가지 못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2006년도에 동유럽 땅 끝나라 우크라이나로 들어와 사역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한 몸을 이루었던 구소련 70년의 시간을 1991년에 종식함으로 독립국으로 출범한 지 이제 31년째가 됐습 니다. 그러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야욕은 옛소련 땅이었던 주변국들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음은 지난 2014년도에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하는 사건을 시점으로 동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2개 주를 자국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자국의 힘으로는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에 속히 EU와 NATO 가입을 서둘러 진행했습니다. 러시아는 우 크라이나의 친 유럽화 행보를 두고만 볼 수 없었 기에 이번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전쟁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에 이르렀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해 오면서 우크라이나의 모든 선교사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