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칼바람 매서웠던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음식 쓰레기를 내다버리러 1층 수거함에를 갔더니 마침 헌옷 수거 차량이 와있었다. 헌옷들과 신발들까지 분리하여 정리하는 기사님의 모습이 능숙하고도 빨랐다. ‘잠깐 쓰레기 버리러 나온 나도 이렇게 추운데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한마디를 건넸다. “아저씨 수고 많으십니다.” “아. 예~.” 아저씨는 멈춤없이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그렇게만 짧게 답하셨다. “이렇게 운전도 수거도 혼자 다 하시는 거예요?”라고 재차 말을 건넸으나, 여전히 “예~”만 하실 뿐 고개는 들지 않으셨다. “실례지만 이렇게 하루에 얼마나 다니세요?”라고 또 건넸더니, “하루에 아파트 단지로는 4~6군데, 수거함 개수로는 20개 내외 정도 됩니다.”라고만 하신다. “아이고 그럼 너무 힘드시겠어요?”라고 또 건넸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고 답하셨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 “힘들긴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바로 그 말, 그 말씀에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오늘도 그 일을 하신다니 그 고백이 내겐 참으로 놀라웠다. 버리는 사람 따로, 줍
기독교에는 통일성(unity)과 함께 다양성(diversity)이 함께 존재한다. 모든 건강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면서 동시에 이 지상에서는 다양하게 각 교파와 각 교회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본고에서는 통일성의 가치와 함께 침례교 신앙이 다른 교파 교회들의 신앙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침례교인들이 특별히 강조해서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필자는 침례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1. 성경 침례교인들은 구신약(Old Testament and New Testament) 성경 66권을 최종적이며 유일한 권위라고 믿는다. 교리나 전통이나 헌법이나 어떤 탁월한 지도자(개혁가나 신학자나 목회자)의 신학적인 체계가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침례교인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조들(Creeds)를 배격하며, 일정한 시대에 일정한 지역에서 한시적으로 유효한 신앙고백들(Confessions)을 만들어서 진술해 왔다.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다. “그 책” 즉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며 그 가
특히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로 보기 위하여 첫째로, 신론적 측면에서는 창세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아브라함과의 약속,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살펴보고, 둘째로, 기독론적 측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언약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살펴보고, 셋째로, 성령론적 측면에서 칭의, 성화, 영화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살펴보겠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영원한 작정과 그리스도 안에 세우신 경륜을 따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복(아들들, 상속자, 영광에 참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됨이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취되는 약속을 받게 된다.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성령을 따라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을 세우신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 안에 이루어지고 영생을 거두게 된다. 연구자는 이러한 전체의 내용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구원론으로 본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는 낭인 신세가 된 다윗은 광야의 아둘람 굴로 은신합니다. 그 소문이 퍼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환난당한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등 약 400명 가량 됐습니다. 사실 다윗 자신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를 의지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아둘람이 돼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니까 어떤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지만 특히 교회는 병들고 약하고 고통가운데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 들이 와야 하는 곳인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함을 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있거나 힘있는 자들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에돔사람 도엑이 다윗을 보았다고 사울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도엑은 간신이었는데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입속의 혀처럼 굴던 도엑이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고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는 것을 봤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신하를 시켜 제사장들을 불러놓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왕의 신하 중에 다
성경에는 천사, 마귀, 악령, 귀신 등 하나님 외의 영적 존재에 대한 기록이 많다. 또한 성경은 세상을 선과 악을 상징하는 빛과 어둠의 대결장소이며 예수께서는 어둠의 권세, 즉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예속되기 때문이다(요한1서3:8). 악령(귀신)은 마귀의 하수인들로서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베드로전서5:8). 악령은 세상의 신이요(고린도후서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며(에베소서2:2), 아담과 하와와 사울 왕과 유다를 유혹했고,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마태복음8:28~34), 세상에서 악을 증진시킨다(마태복음13:39). 성경은, 악령은 사람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노린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악령은 사울 왕이 시기심으로 심한 불안에 빠져 평상심을 잃었을 때 그를 유혹했고(사무엘상16:14), 바벨론과 두로 왕의 교만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을 거역 하도록 부추겼고(이사야14:12~14; 에스겔28:12~17), 가룟 유다가 돈을 탐했을 때 그를 사로잡았다(요한복음12:2). 친구와 가족을 배반하고 부당한 방
서신서의 저자인 바울과 야고보, 베드로, 유다 등 저들 이름 앞에는 수식어로 즐겨 썼던 공통된 단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단어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강조함에 있어서는 저들만의 신앙 철학이 삶의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상시에 성경책을 읽지 않을 때에는 제 책상 위에 달아둔 바구니 속에 늘 올려놓습니다. 이렇게 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데에서 발단이 됐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천장에 구멍을 뚫고 끈에 바구니를 달아둔 후 하나님 말씀을 늘 그 속에 보관하며 지냅니다. 제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깨달아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신앙생활을 태만히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 앞에 늘 붙이고 사는 사도들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종”이라는 본질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저렇게 강조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를 늘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참된 종의 삶을 살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도 하게
지난 하반기부터 우리나라는 극심한 갈등과 반목으로 국민들의 마음은 갈라지고 어느 편에 서야할지 조마조마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이나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사회, 개인의 모든 상황을 건지시며 회복시키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시편 107편은 우리 인류가 처한 모든 고난과 어려운 상황을 요약해서 묘사해 주고 있는데 인간은 누구나 이 네 가지 상황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네 가지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네 가지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인간은 광야 사막을 여행하다 길을 잃은 존재입니다. 둘째, 인간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쇠사슬에 매인 존재입니다. 셋째, 인간은 미련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존재입니다. 넷째, 인생은 바다에서 광풍을 만나 상황을 스스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네 가지 상황은 우리 인류가 겪는 보편적 고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상황 앞에서 무기력하고 좌절과 고난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런 처지에 있는 국가, 사회, 개인을 그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회복시키시는
본 기고글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2016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목회신학박사를 수여받은 김종이 목사의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 논문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 연구목적 본 논문의 목적은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연구하려는 데 있다.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요약본으로 이해된다. 갈라디아서의 주된 근거는 갈라디아서 1~2장에서 강조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 때문이다. 즉,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의 핵심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근거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의의 은혜를 주셨고,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행위를 보여주셨다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에 있다. 이신칭의는 역사의 중요한 흐름에서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해 왔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종교개혁의 주요 주제들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됐던 이신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갖는 함의가 기독교의 주된 교리들인 칭의, 은혜, 예정을 이해하는 근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 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설교를 준비하다 지난 한 원고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있었던 곳이 미국 중부 미주리 주(Missouri)였다. 그래서 그곳의 이야기라 더욱 감동으로 읽었던 내용이었다. 오래 전 미주리 주에 있는 50여명이 출석하는 시골의 작은 마을 교회의 이야기다. 그 동내 미용실에 찾아온 손님들이 모두 삭발을 원해서 물으니 그 교회 성도들이었다. 처음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가 방송국에 알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단다. 사연은 그 교회에 사랑을 받던 한 소녀가 암 투병 중이었고, 항암치료를 하며 교회에 나오지 않는 소녀를 방문한 목사와 성도는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목사와 모든 교인들이 머리를 깎기로 결정한 것이다. 방송국의 중계를 준비하며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주일날 아침에 소녀의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해 모자를 쓰고 교회에 데리고 나왔다. 모자를 쓰고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녀는 교회에 앉아 있는 모든 교인들의 빡빡머리를 보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다 결심을 한 듯 모자를 벗었다. 그 광경을 중계
웬만한 교회에는 모두 찬양대가 있어서 주일예배를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국가적으로 음악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찬양대도 고전적 합창곡이나 찬송가보다는 새롭게 편집, 편곡된 것을 즐겨 부른다. 이번 주간에는 찬송가와 합창곡의 선택에 대해 상고하고자 한다. 찬송가 선택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결혼식 축가로 <바우고개>를 부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지난날의 임을 그리는 내용이므로 결혼식에서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찬송가 선택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흔히 있다. 목회자는 신년예배나 새학기 개강예배에서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 땅위의 수고를 그치라 하시니”(607장)를 부른다든가 어린이의 생일 축하예배에,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늘나라 두시려고 거두시겠네”(564장) 같은 찬송가를 선택하지 않도록 살펴야 하겠다. “내 본향 가는 길”은 땅위의 수고를 그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므로 새롭게 출발하는 마당에 부르기에는 부적절하며,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하신 보배”는 죽은 어린이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거두신다는 위로의 찬송이므로 생일날과는 맞지 않는다. 오래 전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