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를 지금도 잘 알고 있다면, 남은 생도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자원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보하거나 절제하면서까지 나의 안과 밖을 살리고 세우는데 집중하려 합니다. 이즈음에 또다시 더해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영적인 책임감 앞에서도 수고하고 땀 흘리기를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나아가 오늘도 살아 있음에 더해진 갖가지 자원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에 따라 지혜롭고 정직하게 관리하며 유통하려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교훈하시고 명령하시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월의 흐름만큼 반드시 더욱 깊이, 더욱 멀리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더욱 맑고, 더욱 밝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 남겨진 흔적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참으로 믿을만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여, 깨어 있는 그리
나는 호세아 4장 6절을 토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번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추구하는 것,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호 6:1, 3). 간단히 한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예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선 “내가 너희 중에 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18개월 동안 머물던 때를 말한다. 그 당시 사도 바울 앞에 전 세계가 열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행하셨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근본적으로 삶이 변할 뿐 아니라, 때로는 도시들이 변화됐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사역 후기에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빌립보서 3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빌 3
신앙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대두된 것은 무엇보 다도 타문화 속에 드러난 자신을 이제는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다. 타종교를 대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자신의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문제는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타종교를 경험해 왔으며, 그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최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던 시대이다. 철저히 신중심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이제 중세를 지나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 시대의 지배자로 등극한 21세기에 과연 신앙은 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성은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신앙과 이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반목하면서도 공존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며 세계의 종교로 변신하는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새롭게 정립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70~80년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경쟁해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공산주의는 70년의 수명을 다하고 무너졌다. 승리의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인간욕망“을 더 효과적이며 합리적으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긴 것이다. 자본주의 치명적 결함 그런데 자본주의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는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신(新) 자본주의(야수 자본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야수 자본주의가 판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죽여야 사는 적자생존, 이긴 자가 싹쓸이하는 승자독식,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쟁투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싸우는 양극화, 세계 1위 자살과 이혼율, 저출산, 초고령화, 계속되는 산업재해, 환경파괴가 그 증거다. 또 하나는 “과잉생산”이다. 인간의 무한 욕망을 무한 긍정하는 성장지상주의인 신(新)자본 주의는 과잉생산을 중단시킬 수가 없다. 인간의 무한 욕망은 무한 생산을 하고, 무한 생산은 자연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멈추는 순간,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는 표현처럼 수요가 없어도 계속 생산해 내야 한다.
머물 곳 없이, 안식처도 없이 계속 쫓기는 다윗,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설상가상으로 멘토이자 영적 스승인 사무엘 선지자마저 죽었다 (1절). 민족의 지도자요, 선지자인 사무엘을 잃은 온 이스라엘이 다 슬피 울었지만 아버지 같은 영적 후원자를 잃은 다윗은 장례식에 갈 수조차 없다. 오히려 본토에서 가장 먼 아라비아 반도 최남단 바란 광야로까지 피신간다. 거기서 마온 사람인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 나발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한 여인, 그들을 만나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통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생각해 본다. 어리석은 사람, 나발 나발은 다윗이 그의 목장을 보살펴주면서 알게 된 지역의 부자였다. “양이 삼천, 염소가 천마리”(2절), 당시 시골에서 이 정도면 큰 부자, 2절뿐만 아니라 6절에서도 그를 ‘부하게 사는 자’ 라 했다. 문제는 그가 부자답지 못했다는 것, 그는 자신의 부를 합당하게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다윗이 먹을 것 좀 달라고 부하들을 보냈지만 아예 모른다고 했다. 배은망덕,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이 일 때문에 목숨도 잃고, 재산도 잃고, 아내도 잃는다. ‘나발’의 이름 뜻이 ‘바보’ ‘미련한 자’인데 이름처럼
성경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부분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최초로 쟁론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8) 그러나 바울의 초점은 선교였고, 철학자들의 초점은 학문적 토론에 두었기에 이 둘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입장을 보였다. 즉 바울과 철학자,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는 서로에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바울의 여정을 드려다 보면 초기 철학이 추구하는 이성의 절대성으로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우려로 철학에 대한 경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골로새서에 잘 드러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오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노후에 관한 생각이 절로 마음에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이에게 닥치는 자연적인 현상 으로 여겨졌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진 것은 없고, 그렇다고 노후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불안함과 염려가 마음에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늘 그랬듯이 모든 인생의 해답은 성경에 있으니 성경에서 기도하며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애굽 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매일 세끼 똑같은 만나만 먹고, 재래식 화장실과 장막 생활을 한 것을 볼 때 나 또한 그렇게 못 살라는 법이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하니 말씀 안에서 자유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연금 받고 산 것도 아니고 반면에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옥 생활도 하고, 심지어는 고문 등 순교까지 했는데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자며 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이나 잘하자” 라며 예전보다 더욱 신앙의 허리띠를 동여맸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시는 어느 원
다윗의 힘든 도피생활이 이어진다.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빠진 다윗의 긴박감이 잘 드러나는 본문, 가는 데마다 사울이 따라온다. 사울이 미처 오지 못해도 신고자들 때문에 피할 곳이 없다. 물론 비극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추격자 사울에게 잡힐 뻔한 위기가 스릴있게 전개되는 것은 맞지만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빛이 난다. 하나님과 밀월관계였다 23장 1~13절의 내용은 도피생활 중에 있었던 여느 에피소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일라 지역이 블레셋에 의해 공격당하고, 주민들은 타작마당을 습격당해 애써 수고한 농산물을 빼앗긴 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자기 몸 하나 피신하기도 바쁜 때였지만 그일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 블레셋을 공격하려 한다. 당연히 다윗의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3절).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고, 그 전투에서 이겨서 그일라 주민을 구한다. 다윗의 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지랖 때문일까? 아니다. 이게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이다. 다윗은 마치 이미 왕이 된 것 같다. 왕은 백성을 책임지는 자리, 자기가 희생되더라도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인데 다윗은 왕의 품성을 잃은 사울과 달랐다.
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 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 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돌아 다녀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들은
가해자 배우자에 대한 피해자의 항변이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하며 여전히 가해를 하는데 어떻게 이를 참을 수 있단 말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가해자 배우자의 가해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피해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부부가 모두 어린 시절 그들의 부모로부터 피해자였던 사실이다. 한 사람은 가해의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그림자로서의 피해자로 만나 새롭게 구성된 원가족을 통해도 계속 역기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로 접근을 하면 안 된다. 적어도 하나님이 부부로 짝지어 주시고, 이미 자녀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서로의 상처를 보고 함께 치유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이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대부분 가해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가해자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크거나 작거나 모두 피해자요, 가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단순히 역기능이 가족체계에 의하여 대를 이어 대물림이 되는 것에 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