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부활이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절이란 단어의 기원을 알고 있는가? 부활절은 영어로 ‘Easter’이다. 이스터라는 용어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인 명칭이 아니다. 이스터(Easter)는 바로 아스타르테(Astarte)이다. 이스터나 아스타르테는 하늘 여왕의 이름(렘 7:17~18)이다. 이 이름들은 여신 아스다롯(Ishtar)의 다른 이름이다.(『두 개의 바빌론』, Alexander Hislop ) 영어 사전에 보면, 이스터는 ‘빛과 봄의 여신’ (goddess of light and spring)이라고 되어 있다. 부활절이란 단어는 앵글로색슨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교(異敎)의 새벽 여신으로부터 유래한 용어이다(카톨릭 백과사전, 1987년 판). 그러므로 이스터라는 단어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 기원을 이교(Cult)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을 이스터(Easter)라 하지 않고, ‘the Resurrection’ 이라고 한다.(벧전 3:21) 하여 로마 카톨릭이 지키는 부활절 날짜와 성경적인 교회가 지키는 부활일 날짜는 당연히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서방교회에서는 재의 수요일에 시작해 부활절 전까지 6주간 반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 받아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금식 일에서 제외한다. 부활절 축제 전에 준비와 금식에 기간을 지킨 것은 사도시대부터였다. 이 기간은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였고,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금식규율은 엄격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서방에서는 이 규율이 점차 완화되어 엄격한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면제되어 재의 수요일와 성 금요일만이 사순절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예절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영국성공회는 사순절을 금식으로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침례교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에서는 사순절을 다양한 예배와 전례로 지켜지고 있다. 3월 5일 수요일부터 사순절 기간이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에게 사순절은 특별한 의미와 유래가 있다. 2014년 사순절은 좀 특별한 절기가 됐으면 한다. 그 동안 경심했던 것을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40일간(주일을 포함하면 실제적으로는 46일) 특별히 하나님의 뜻
지난 2월 26일,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방 안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박모(60)씨와 그의 두 딸 A(35)씨, B(32)씨가 숨진 채 발견돼 집주인 임모(73)씨가 신고했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봉투에는 현금 70만원과 함께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박씨의 남편이 12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계는 급격히 기울었고 박씨의 두 딸은 카드빚 때문에 신용불량 상태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큰딸은 고혈압과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이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동두천에서는 30대 엄마가 네 살짜리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경기도 광주에서는 40대 가장이 중증 장애를 앓는 열세 살 딸, 네 살배기 아들까지 데리고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했으며, 울산에서는 기초수급자인 지체 장애 어머니가 무직자 아들과 숨진 채 한 달 만에 발견됐다. 이 모두가 일주일 새 벌어진 일들이다.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조선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의 청빈한 삶은 예수를 닮은 듯한 모습으로 투영되면서 감동과 칭송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그런 교황이 금년 8월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방문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뉴스다. 가톨릭은 반대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 하나 하나가 너무나 큰 파급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이전의 교황과는 다르다. 가톨릭의 교리와 주장들의 이전 모습과는 다른, 탈권위적으로 방탄차가 아닌 무게차를 타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생일에 가장 소외받는 노숙자들을 초청하는 일들은 성경에서 우리가 자주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도시풍과 력셔리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그는 도리어 시골풍으로 검소함과 실용성으로 삶을 이루어 가고 있는 감동 메이커이다.이런 그의 삶은 결국 높이 평가를 받아 ‘올해의 인물’로 지난해 선정된 것에 이어, 지난 3월 20일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50인 가운데 1위로 선정됐다.(미국 포춘지) 염주교가 추기경이 되는 경사와 함께 한국 천주교는 교황의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축제를 준비하게 됐다. 비난만 할 수 없는 그들이 보여주는 삶들은 오늘 기독교가
물처럼 변화와 적응을 잘 하는 것도 없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그릇을 채우고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난 그릇에 적응한다.물은 비가 되고 눈이 되고 얼음이 되고 안개가 되고 서리와 구름이 되고 수중기가 된다. 어떤 상황에도 자유자재로 적응하는 놀라운 변신의 생리를 갖는다.우리도 물처럼 여러 환경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물은 천하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준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사람은 물이 없으면 잠시도 살아갈 수가 없다. 논밭에 물이 마르면 모든 곡식이 죽고 만다. 가뭄에 단비처럼 고마운 것이 없다. 목이 타는 갈증에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처럼 상쾌한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물처럼 남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정화해야 한다. 물은 남과 다투지 않는다. 물은 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있으면 돌아가고 때로는 땅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때로는 높은 둑이 있으면 조용히 넘쳐 흘러간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는다.덕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싸우지 않는다. 물은 칼로 벨 수도 없고 창으로 찌를 수도 없다. 만물 중에서 지극히 유하고 약하다. 그러나 물은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 불도 물을 당할 수가 없다. 견고한 돌과 쇠붙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한들,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역겨운 짓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동성애란 말인가? 짐승들도 안하는 짓을 하물며, 인간이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소수일지 모르나 점차 그 양상이 확산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동성애의 확산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한 개인의 성적 취향을 넘어, 그것이 보편적 사회현상으로 대두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자연스런 조화에 역행하는 동성애는 분명 억제돼야 한다. 최근 군대 내에서 동성애를 허락한다는 법이 국회에 제출되면서 사회가 시끄럽다.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이태희는 지난 28일 오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군대내 동성애 옹호 조장하는 군형법 92조 개정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대책위는 군대 내에 비윤리적인 동성애를 조장 옹호하며, 대한민국 군대를 무너뜨리려는 새 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진당 등 국회의원들의 정신 나간 행위를 강력 규탄하며,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군형법 개정을 결사반대한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창당한 새 정치민주연합이 진정 새정치를
사막을 여행한다거나 등산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을 준비해야 한다. 군인은 전쟁터에 나가거나 훈련에 임하기 전에 군장 검사를 받는다. 이 때 수통과 물의 준비는 필수적이다.목이 타는 상태로는 여행도 등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배고픈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목이 타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일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실상 육체적인 목마름 보다는 영혼의 갈급함이다.사람들은 육체의 갈증은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영혼의 갈급함은 해소는커녕 인식조차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옛날에 비해 더 잘 살고, 과학의 발달로 더 편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하다”, “낙이 없다”, “살 맛이 안 난다” 하면서 마치 사막을 걷는 여행자처럼 목말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의 온갖 쾌락에 젖어 있다가 죽어서는 손가락 끝에 물 한 모금이 없어서 영혼을 태우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육신의 편함만 도모했지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
며칠 봄기운이 완연하자 교회 작은 화단에도 생명잔치가 한창이다. 불과 지난 주만 해도 살아있는지 분간한 길이 없던 작은 나무들과 풀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봄이 주는 경이로움과 가득찬 축복을 느꼈다. 오늘 주일예배에 올려지는 권사님의 기도를 들으면서도 해마다 새롭게 재해석되는 복음의 핵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 분의 기도는 이렇다.“사랑의 주님! 그리스도의 고난과 아픔과 부활의 환희를 나타내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마음의 천박함과 정신의 공허함과 영혼의 교만에서 우리를 구원하사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사랑과 목적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계실 때 주님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갔으며, 세칭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밤을 지냈을까요? 주님께서 금식기도하시며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며 고통받으셨을 때에도, 주께서 관원에게 붙잡히시고 그들에게 조롱당하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따르던 무리들은 어디로 갔으며, 주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구름처럼 따르던 열성인파는 어디로 피신하였으며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였습니까? 주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gospel)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 타락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실 것을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Lord)에 관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seed)에서 나셨다. 그런데 ‘육체로는’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문자적으로는 예수님이 다윗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에서 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다윗의 씨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윗의 후손인 ‘고니야’(Coniah)가 왕으로 있을 때 그는 왕이 될 자식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받았다.(렘 22:30)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한 처녀(a virgin)를 통해서 태어나셔야만 했다. 그리고 거룩함의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한다.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쫓으라.”고 베드로 사도는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위로하고 용기와 힘을 주는 말을 하기보다 사기를 저하시키는 비난만 쏟아 붓는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모든 일에 올바른 사리판단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사물을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실 판단이고, 둘째는 가치 판단이다. ‘이 사람은 누구다’는 사실판단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다’는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은 쉽지만, 가치판단은 어렵다. 왜 가치판단이 어려운가? 판단자의 주관과 감정과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기준과 감정을 앞세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어떤 사람은 성격상 확실한 사람이라서 바른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성격만 중요하고 남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가? 바른 말이 꼭 좋은 말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