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자주 국가이다. 국민, 영토, 주권을 갖춘 격(格) 빠진 데가 없고 자주독립국인데 친일친미로 나라의 입지를 지켜야 되는 듯 하는 인상을 지님이 유감이다. 친일친미 다 치우고 친신(親神) 국가면 얼마나 좋을까.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라고 해서 모범국가로 보이 지는 않는다. 거기도 세상 다른 나라들에게나 생기는 온갖 일들이 그대로 생기고 있다. 미국을 우방 국가요, 한미 동맹 국가라 하니 이만 두고 곁에 있고 일본과의 한국 관계는 여전히 들쭉날 쭉하고 있는 현실 아닌가? 웬만하면 친일파로 매도한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국을 극진히 사랑하는 뜻에서 한국에 임했다고 하는 비판 없는 전제만은 그만두기로 하자. 일본 땜에 경제와 문화가 이렇게 발전했으니 일본의 공도 잊지 말자는 논리를 펴면 의당 친일파란 소리를 듣는다. 대한민국 사람은 반일 종족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논리 가 소위 친일파에 맞서서 결국 국론통일이 못되고 있다. 제발 일본이 한국을 뜨겁게 사랑하던 나머지 부득이 강점해서 도우려 했다는 말은 그만두자. 그렇다면 강점 해소를 위해서 싸운 애국자들을 무참히 고문하고 투옥하고 죽인 이유는 무엇인 가. 지금 상태에서 과거의 원수라도 현재와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살같이 바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온 몸과 맘을 비치고 힘써서 일하세 오늘은 찬송가 450장을 부르다가 잠을 깨어 일어나니 아침 5시였다. 지금까지 50여년 목회하며 새벽기도에 익숙해 일어나는 시간인데 엊저녁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기도하다 늦잠을 들게 되었다. 이번 중국의 홍수로 6000만 이재민이 생겨났고 피해 금액은 우리 돈 30조원이란 보도를 접했다. 이뿐인가? 블랙 스완 검은 백조가 왔다. 무슨 징조 인가? 1970년 시골 목회를 하던 중 대만에서 발간된 중국공산당사란 책을 읽고 울었는데 이번 중국이 우한에서 교회당 십자가를 끌어내리며 450여 교회당을 폐쇄, 파괴하고 300명 선교사를 추방하더니 코로나 유행병이 유행함에 울었다. 연변 과기대 창립 10주년 행사에 축사순서를 마치고 백두산과 두만강 도문 등의 관광을 마치며 김진경 총장은 이전에 미국 플로리다 대학 동창생이 강택민 주석의 비서실장이기에 북경에 같이 가서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에 ‘목사가 정치가를 만나 뭘해’하는 생각으로 거절한 것이 복음전도를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예수님과 알렉산더 대왕
상담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대화의 기술은 단연 공감이 다. 상대의 아픔과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공감을 통해 드러난다. 상담의 90%가 공감만으로 이뤄진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감이 100% 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할 때가 온다. 혹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 되지 않는 행동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지를 안 써준다고 상담 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펄펄 뛰다 돌아간 내담자는 다시 상담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칭찬 으로만 일관할 수 없다. 물론 칭찬을 충분히 많이 해야 하지만, 문제가 있는 행동을 지적하고 선을 그어야 할 때도 많다. 아이들에게 늘잘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나친 칭찬과 허용이 아이를 망치기 때문이다. 배우자에게 잔소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의 관계가 위로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는 없다. 늘 편을 들어주면 상대방과 틀어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제 좀 그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까지 똑같은 불평을 계속할 것인지,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것인지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이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를 연결하고 있는 진도대교가 놓여 있는 곳인 울돌목에서 1597 년 일본군 300척이 넘는 배후의 배와 울돌 목으로 진입한 133척과 싸워야 했던 조선군 에게 남은 판옥선 12척과 지휘선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승리의 함성을 봤던 것이다. 50년간 개척자로 일하셨던 어느 원로 목회자께서, 항상 열악한 조건에서 몸으로 부딪혀 나가야 했던 개척 일군으로서 어려울 적마다 이순신 장군이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도 포기하지도 아니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최선의 열정으로 임하였던 모습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진도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진도대교에서 명량 축제가 열린다. 백과사전의 기록으로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녹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말한다. 이곳의 가장 짧은 거리는 300여 미터이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약 20미터이다. 이러한 지형적 요건으로 인해 이곳에는 급류가 흐르는데 특히 만조 시에는 시속 23킬로미 터의 빠른 물살이 흐른다. 물살은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 이치며 흐르는데 격류가
현대인들 중에는 텃밭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거기다가 농작물을 심고 가꾸 면서 알뜰하고 재미난 생활을 하길 원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도 텃밭에 애착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왕궁 가까이에 있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던 이유는 그 곳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왕상21:1~2). 그는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거나 돈으로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봇이 거절하자 실의에 빠져 침상에 드러누워 식사까지 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처 이세벨이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왕상 21:15~16). 하나님이 기획하신 에덴동산에는 텃밭이 있었을까? 강이 발원되어 동산을 적시고, 각종 실과나무가 있어서 임의로 따먹을 수 있었던 즐거움의 동산에 그런 밭이 필요했을 까? 창세기 2장 15절엔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전해준다. 아마도 대농(大農)은 아니었을 터이고 텃밭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상상해 봤다. 하나님께선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으셨지만 그것들에게 땅을 경작 하게 했다는 말씀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에덴동산
우리말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생전의 모습과 죽은 후의 너무나 상반되는 이름을 구약에서 찾는다면 사울 왕일 것이고 신약에서 찾는다면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될 정도는 유대인들에게 유다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그렇다고 “철수”나 “영희”처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중에 왕족의 머리를 지칭한다는 면에서 유다는 권위와 영광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자신의 이름을 배반자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가룟 유다를 지칭할 때 꼭 수식어로 “예수를 배반한 사람” 또는 “예수를 팔 사람”이란 별칭을 사용한다. 마태는 가룟 유다란 이름 없이 단순히 그를 “예수를 판 사람”으로 명시하기도 한다(마 26:48).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할 때 사용한 헬라어는 “배반자”라는 명사가 아니라 분사로 되어 있다.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하는 헬라어 용어는 부정과거 분사 o` paradou.j auvto,n(호 파라두스 아우톤, 그를 넘겨준 자)이거나 현재 분사 o` par
그러나 스미스의 말은 시편의 시들이 신학과 무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감흥을 먼저 존중하라는 것이며 시의 무게감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들을 기독교 신학의 틀 속에 두라. 목표는 거기에 수반된 신학을 멀리서 넓게 보기 전에 본문 안으로 가까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 다.” 히브리 시는 독자들을 보다 편하게 그리고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시 안에서 하나님을 노래 하고 구원자를 찬양하며 그에게 간구하는 그들의 고백 안에서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게 한다. 이처럼 히브리 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구속의 역사를 웅변적으로 증거 하듯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시편 23편에서 저자는 여호와에 집중하면서 그가 자신을 지키고 돌보시는 목자임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목자는 자연히 생명의 목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다(요 10:10). 4. 그리스도 중심 해석 시편의 신학적 내용은 신약의 메시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시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실제로 시편 저자들의 신학적 핵심은 필연적으로 ‘주께서 다스리신다’라는 근본적인 선포와 다
옛날 중국에 진나라와 제나라가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진시왕이 통일 대업을 이룰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으나 제나라는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나라의 농부들이 참외밭을 가꾸었는데 국경을 이웃한 진나라의 농부들도 똑같이 참외를 키웠습니다. 해마다 제나라의 농부들이 가꾼 참외는 잘 자라서 모양도 좋고 맛이 훌륭한 참외가 됐지만, 웬일인지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진나라는 막강한 국력을 앞세워 쳐들어와 제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뭉개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지속되자 제나라 농부들은 대책을 세우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거듭된 회의 끝에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 진나라 참외밭에 가서 (좋은 참외가 열리도록)(달고 시원하고 맛이 있는 참외가 열리도록) 가꾸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마다 와서 못살게 구는 적들이니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제나라 농부들은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듬해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가서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자기들의 참외밭보다 더 정성을 들여 가꾸어 놓았습니다. 마침내 진나라 참외밭에도 상품 가치가 높은 훌륭한 참외가 주렁주렁 달리자
필자는 지난 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해 한국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관점과 그것을 토대로 이뤄진 천당 신앙과 기복 신앙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과 신앙이 예수님의 말씀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역동성과 현재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 그것의 역동성과 현재성과 진행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하여 공관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용어들은 두 가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다. 천국은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이며 이것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이다. 마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다. 누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으며 그밖에 다른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하나님)의 나라”(11:2), “그(하나님)의 나라”(12:31), “그 나라”(12:32; 22:29), “내(예수)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예전에 한 성도님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술 전에 기도해 드리기 위해 병원에 심방을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수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분은 너무나 평온하고, 해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근심을 제거해 주셔서 수술에 잘 임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토록 여유롭게 기도까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고,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스데반의 몸과 마음을 신비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