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독립적인 내용을 주목하는 것이다. 한 복음서의 저자가 다른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때, 설교자는 그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그의 저술 관점과 목적에 연관하여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10:5~6, 15:24)은 그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점은 마태의 주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와 치유 받은 후 유일하게 사례한 ‘사마리아 나병환자’(눅 17:11~19) 이야기는 누가의 저술 의도와 그의 신학이 마태의 경우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는 복음서를 해석할 때 저자의 관점만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수직적 사고의 안목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특정 구절의 의미를 먼저(원래적 상황으로서) 예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그 후 저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상훈은 일례로,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수평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은 관련된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20여년전 정상적인 양념 통닭을 먹는 것이 소원인 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통닭을 먹는 날은 피아노 학원 강사로 다니시던 어머니의 월급날이었는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 나가는 빚과 이자, 빼고 남는 돈은 몇 천원…. 그래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치킨은 2,800원짜리(아직도 가격이 정확이 기억합니다.) 노점상 옛날 통닭이었습니다. 매번 어머니가 힘들게 사온 통닭이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매번 친구들이 먹던 멕시칸 치킨을 찾으며 투정하며 거의 먹지 않았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그랬던 저희 가계가 그나마 풀칠 안하고 먹고 살만 하게 된 10여년 전부터는 일 년에 10번 정도는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릴 때 꿈꾸는 그런 치킨을 거의 매주 먹고 있습니다. 옥천에서 함께 교제하는 목사님의 장모님 시누이가 우리교회 옆 동네 현리라는 마을에 계시는데 전도를 위해 계속 기도중입니다. 그 전도대상자 할머니가 구멍가게와 치킨집을 하고 계셔서 벌써 8마리째 치킨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원리를 믿기에 치킨을 사며 도리어 순대 및 간식을 가지고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제 저에 대한 경계 태세는 다 무너졌습니
수난주간 중에 3월 26일 제35회 침례교 교도소 선교회 연차 총회가 교도선교회 회장인 천안 서머나교회 최만준 목사의 초청은 작년 서울 천호교회 이동춘 총무 목사 초청으로 더 많은 회원이 모였고 “죄인의 좋은 친구”모임이 됐다. 실무위원으로 천안교도소에 최만준 목사를 위시해 서울남부 이유진, 원주 곽도희, 제주 한태희, 안양 박수정, 대구 박윤하, 대전 임헌태, 영월 고병기, 공주치료 이승혁, 청주 이용규 목사 및 청송 엄현숙 사모로 11곳이며, 여의도교회 국명호 , 강남중앙교회 피영민, 영통영락 고흥식, 디딤돌 박문수, 광정 정희량, 새소망 박종철, 반석제일 한유기, 화평교회 조천업, 세종누림 이원열 및 예사랑 한명국 목사 등으로 후원교회 10명 회원들로 함께 모였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 눅7:34)로 오신 나사렛 목수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잡수셨고”(마9:10~11)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다루는 로고스 찬미가 첫 단락에서 그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로고스(말씀)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진 신성의 존재라는 것과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권위와 능력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요한은 특히 그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된다는 것을 통해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존재(요 5:26)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요 5:26; 11:25; 14:26)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며(요 3:16; 8:12; 10:10; 17:3) 또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요 2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요 5:2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요 10:10), 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1). 요한은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하신
지금 더함교회는 전교인 가정방문예배 기간입니다. 3주전부터 광고시간마다 방문일정과 함께 주보에 진한 글씨로 ‘헌금 및 식사 준비 금지’라고 적어두니, 할머니들이 고민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예배드리러 오시믄, 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첫번째 집을 들어갔습니다. 파킨슨병을 8년째 앓고 있는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간절히 안수기도를 하고, 서비스로 안마 신공을 하고 나오려는데,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할머니 성도님이 부엌으로 가십니다. 간신히 기어서 도착한 곳은 냉장고 앞. 하나는 성미, 하나는 간식 몇 개를 미리미리 준비 해놓으셨습니다. 안 받고 오자니, 너무 서운해 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도착해 열었더니, 주섬주섬 이것저것 선물 세트로 들어 있습니다. 과일 사러 버스타고 시내 시장까지(동네엔 제철 과일 파는 곳이 없음) 다녀오신 생각하니 맘이 찡합니다. 그런데, 호두과자 날짜를 보니 석 달은 족히 지났습니다. 받아오는 차 안에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믿음으로 주신 성의 생각하여 먹었습니다. ‘주여! 제 위장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두 번째 가정을 들어갑니다. 예배를 마친 후 기도를 해 드리고, 이 새신자
우리 성도들이 매일 매사에 행동하기 전에 마음과 생각으로 어떻게 결정하고 결단하는가? 어릴 때 부친은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하고 (一日之計 在於寅), 일년 계획은 봄에 하고(一年之計在於春),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 한다(一生之計在於幼)”고 말씀하셨다. 1948년 9월 첫주 방학이 끝나고 개학해 새로 오신 김봉석 담임선생은 소련의 대문호의 일기 쓴 얘기를 하면서 너희들도 오늘부터 일기를 쓰면서 매일의 계획을 잘 세우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해서 9월 3일부터 일기를 썼는데 그 다음주에 “너희들 내 말 듣고 일기 쓴 사람 손 들어봐!” 했다. 내가 손들었더니 기뻐하면서 일기 쓰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전교생 앞에서 산또닝이란 구충제를 먹고 건강하게 되는 연설도 5분간하게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교회에 나가 치유되고 가정에 축복이 임해 1학년에 꼴찌에서 2등, 2학년엔 38등, 3학년엔 27등한 내가 4학년엔 1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수첩을 사서 매일 생활 계획을 시간별로 적어서 잘 실천하게 됐고 목회를 시작한 1964년 3월 8일부터는 목회일기를 써왔는데 일평생 큰 도움이 됐고 나이가 들수록 생활계획이 복잡하고 많아질수록 수첩과 일기장은
사람들이 삶이 즐겁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과 남이 입은 옷을 비교하고, 내 차와 남의 차를 비교하고, 내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고 모든 것을 비교하므로 행복을 잃어버린다. 비교하는 사람은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으로 위축되고 불행에 빠진다. 불만 없이 잘 살던 아내가 오랜만에 동창회 갖다 와서는 “순자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남편 잘 만나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더라.” “영희 남편은 이번에 사장으로 승진했다더라.” “혜선이는 45평으로 이사 간다더라.” 등등 학교 다닐 때 별 볼일 없던 것들이 명품 옷에 명품백 들고 고급 승용차 몰고 왔는데 나는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면서 남편에게 불평을 하며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자녀들에게도 “누구네 아들은 전교 일등 했다는데, 누구 딸은 명문대 간다는데, 니들은 뭐하냐” 며 자녀들을 남들과 비교하여 기분 나쁘게 만든다. 자기 남편과 친구 남편을 비교하고 자기 아내와 친구 아내를 비교하며 불평하다가 부부 싸움을 하고 며칠씩 말도 안하고 지옥으로 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목사의 글에서 목회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가 목회(木灰), 즉 나무가 다 타서 생긴 재라는 뜻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 유달리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한마디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된 교회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패기 어린 주장을 펼치는 열정 어린 신학생들에서부터, 한국 사람이라고는 몇 가정이 채 되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은퇴의 나이가 지나도록 섬기시는 선배 목사님들까지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도 목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논제 앞에 할 말을 잃어간다. 대형교회라는 축복과 짐을 동시에 지고 부러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는 유수한 기독교계의 리더들도, 일주일에 10번이 넘는 설교에 교회 청소까지 맡아하면서 따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작은 지역교회 목회자들도, 뜻하지 않은 일로 교회의 분열이나 급작스런 사임의 아픔을 경험하는 목사님들도 하나같이 목회라는 여정에서 두렵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으로 순간순간 신나고 벅차기도 하지만, 타들어가는 나무처럼 그 심장이 까매져 갈
벌써 큰 딸이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 지도 4개월. 미국에서의 고교 졸업 후 대학까지 진학했었지만, 학비와 향수병 등의 이유로 결국엔 돌아와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던 중, 다시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민 연유다. ‘그냥 있는 곳에서 편하게 다니다 신랑도 만났으면….’하는 아비 마음이야 왜 없겠냐마는 기도하며 결정했다 해서 또 한 번 더 뒷바라지 하게 됐다. 물론 꿈꾸던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건 기쁘다. 아는 분들은 참 좋은 학교란다. 하지만 그래도 또 2년간 얼굴 못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는 여전히 허전하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한, 나의 두 마음. 얼마 전 한 성도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도 다섯 명도 안 되는 개척교회를 섬기겠다고 기어이 떠났다. 그렇게 어려우면 교회 차원에서라도 돕겠다 했지만, 그 뜻한 바는 꺾지 못했다. 참 많은 관심과 기도를 베풀었는데, 그 또한 우리 교회를 좋아했는데,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일꾼인데, 혹 그러다 다른 상처나 입지 않을까 염려도 되지만, 이미 그렇게 결정해버렸다 하니 어찌나 섭섭하던지. 물론 언젠간 돌아오리라 믿고, 교적도 안지우고 기다리겠다며 나름 쿨하게 응했지만 그래도 섭섭한 이 마음은
고린도 전서 10 : 7~10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을 때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디 내려오는 모세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던 사건입니다. 그때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보고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지만 3천여 명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셨던 것입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께 멸망을 당했습니까? 이들 3000여 명은 끝까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쪽으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한번 받은 구원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빠져서 신앙생활 하다가 죽어도 천국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천국 가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이단에 빠졌다 하더라도 잘못됨을
성서 해석자가 성서 문학 장르의 특성을 따라 그 안에 계시된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설교는 성서의 구속사적 이해라든가 본문 중심의 성서적 설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이 엿보이지만, 여전히 성서의 문학적 이해는 부족해 보인다. 성서의 문학 장르 이해 부족 현상은 설교자 자신의 고정된 설교 방법론의 문제와 연관된다. 본문에서 설교까지의 여정에서 일반적으로 설교자의 관심은 이미 정해진 자신의 설교 구성의 틀에 내용을 적절히 배열시켰는가에 집중되는 반면 본문의 문학 장르적 특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설교자가 성서의 문학 형식과 역동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성서적 설교의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강조하면서, 성서적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이 여전히 설교의 언어와 형식 나아가 효율적인 전달 방식에 매여 성서의 문학 양식을 간과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간파했다. 성서의 문학 양식 가운데 복음서 장르는 독특하며 내러티브, 비유, 예수님의 가르침, 기적 사화 등 다양한 세부 장르(형식)를 포함한다. 많은
(3) 고린도전서 10:1~12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1) 이 글은 신자에 대한 내용입니까, 불신자에 대한 내용입니까? *신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2)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면 안 된다 이것만은 반드시 꼭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고등학교 3학년 반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 합니다. “얘들아 이건 너희가 모르면 안돼.” “무슨 말 입니까?” “수학 책에 나오는 것이 모두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반드시 알아야 된다” 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모르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애굽에
나이 50이 넘었지만 청년대학생 사역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졸업시즌을 맞이하면 종종 대학 캠퍼스에서 섬기던 여러 영혼들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즉 공부를 다 마치고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캠퍼스를 떠나는 자들로부터 받은 감사의 메시지들을 읽는 축복이다. 올 해는 약 4년 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만났으나, 사역하던 대학교회에서 세례를 직접주고, 여러 번 성경공부 과정을 섬기고, 결혼 주례까지 섰던 한 형제로부터 그 선물을 받았다. 졸업식을 수일 앞두고 그 형제의 아내가 남편의 박사논문에 실린 감사의 글 일부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주례를 서 주신 석종준 목사님 내외분께서 아직도 저희 멘토로 있으시고 때로는 직접 찾아와 주시고 심방으로 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 서울대학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생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했습니다. 대학생활 동안 많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석종준 목사님의 성경공부 및 기도 주말 목장모임을 통해 신앙이 튼튼해졌습니다.” 형제는 몇 차례 함께 성경공부과정을 마치고 부목자로 섬기던 중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어느 교회 목자였던 옆 연구실의 한 신실한 자매와 교제를 시작했다. 나는
설교화 과정에서는 적용된 성경진리의 목적(영혼구원 또는 영적성숙-예배, 교리, 윤리, 격려, 경고 등)을 분명히 하여 설교를 작성할 때 자료사용에 있어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한다. 넷째, 적용된 성경진리의 감성(The Emotion of Applied Biblical Truth)이다. 본 단계에서는 본문에서 느껴지는 감정적 요소(비평적, 중립적, 따스함, 열정적)를 현대의 특정한 청중에게도 전달될 수 있도록 돕는 단계이다. 예화 사용 시에도 본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감정적인 정서가 고려되고 구체적으로 설교에 적용이 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형식인 장르(이야기, 예언, 지혜, 시, 복음서, 서신서, 묵시)가 설교화되어 현대의 구체적인 청중에게도 성경형식의 현대화된 역동성(The Contemporized Dynamic of Biblical Form)을 찾아 성경의 장르와 형식을 통하여 다양한 형식의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위의 세 과정을 종합하여 본다면 위의 도표와 같이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서 각각의 학문 영역에 따라 단계별로 변화된다. 필자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만드는 3단계(주해, 원리화, 설교)의 각각의 특성을 설명했다. 위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