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맥코이 선교사 가족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말콤 펜윅 선교 130주년 기념 및 세계한인침례인대회(영적성장대회)에 잘 사는 미국을 한국으로 모시면서 굳이 비행기표까지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이 일을 준비하면서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박종철 총회장의 결단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에 돌아간지도 수십 년, 남편이나 아내는 이미 고인이 된 채 홀로 살고 계신 은퇴 노인 선교사에게 1000달러가 넘는 비행기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이번 대회 최고령 참가자인 현복자(Betty Jane Hunt) 선교사는 4월 11일로 만 93세가 된다. 1958년 30대 초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67세에 은퇴해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자신의 청춘을 한국에 바쳤다. 침례교 교회진흥윈이 생기기 훨씬 이전, 지금 진흥원이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해 침례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도왔던 그는 자신의 생애에 한국 침례교회가 자신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며 나이를 잊은 채 환호했다. 앤 윈더스 켈리 선교사 (미국 정착후 결혼, 사진 왼쪽
최근 들어 매일 순간순간 습관처럼 읊조리듯 묵상하는 말씀이 요엘서 2장28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왜 나를 이렇게 매료시키는가?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이 짧은 두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세상, 젊은이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최근 우리네 삶들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억압하는 용어들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 참 젊어 보인다 라고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늙은이가 되는 기준이 머리털의 희고 검음의 차이인가? 하지만 그 기준은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만 회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이미 정상적 젊은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늙은이를 꿈꾸지 못하게 하고
꿈이 아니었다.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 몸과 다리, 발과 손, 온 몸이 커져 가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 없다. 응급차의 벨소리를 들으며 응급실에 들어 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현실을 받아 들이기 쉽지 않다. 많은 양의 피들이 채취되어 검사실로 옮겨져 성분별로 계산 돼 나온다. 추가 검사가 진행된다. 신속하다 계산된 결과에 따라 알 수 없는 약들이 투명한 작은 관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 온다. 몸에 나타나는 반응들이 정해진 시간이 따라 모니터링되고 의사들이 모여 치료 방향이 결정되면 환자와 보호자에게 전달되고 시행한다. 투석의 방향으로 결정되어 시술이 시행됐다. 배에 있는 복강이 여러 가닥의 튜브를 삽입하는 외과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는 가운데 복강에 있는 엄청난 양의 오염된 체액이 나왔다. 건강한 성인이면 복강 안에 두 말 정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나는 투석을 거부했다. 인터넷을 보면서 많은 정보를 알게 됐다. 투석을 한다하더라도 삶의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삶을 조금 연장시킬 뿐이다. 오래 살았다. 이만큼 살면 됐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을 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침례도 받았다. 신
하나님께서 늦둥이로 저희 가정에 주신 아들이 올해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던히 잘 자라 주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학교생활을 힘들어하고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에게는 말을 못하고 제 형에게 전학을 시켜 달라고 하면서 그간의 힘들었던 고층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기숙사형 학교로 어렵게 전학을 시켜줬다. 소수의 학생을 강도 높게 교육하는 규율이 엄격한 학교라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받고 해 줬는데 이번에는 다시 원래 학교로 역 전학을 시켜 달라는 것이다.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라지만 어디 세상일이 어떻게 제 마음대로 된단 말인가? 오늘은 부끄럽지만 곤히 잠자고 있는 아들의 방에 들었다가 책상 위에 써 놓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며 기도한 기도문이 있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한 페이지를 올려본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저를 다시 OO고등학교로 올 수 있도록 간곡히 요청드리면서 다짐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너무 멀리 돌아온 시간이 아쉽고 후회가 들어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가 처음 우리 학교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부모님 연세가 지긋하시기에 제가 열심히 공부해 자립해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싶은
얼마 전 한국교회가 깜짝 놀란 통계가 있었다!더욱이 대선 직전의 결과이기에, 정치권과 종교계가 모두 놀랐다. 다름 아닌, 한국 종교분포 여론조사의 결과이다. 기독교 인구가 930만명대 이상으로, 불교 신자수를 넘어서 제1종교로 통계됐다. 정치권은 표를 인식해서, 종교계는 순위 문제로, 기독교는 정확성 문제로 모두 어수선하게 된 정보였다. 그러나 가장 놀란 측은 우리 기독교였다. 기독교 인구가 감소되며 기독교 쇠퇴기, 기독교의 붕괴 등 험한 말을 안팎으로 서슴없이 써도 누구하나 뭐라 하지 않는 자타 공인의 분위기 속에서, 기대 이상으로 너무 많은 수치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일명 ‘가나안 성도’라는 ‘안나가 성도’로 인함이다. 그들은 분명한 크리스천이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못 나가거나, 고민 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숫자가 어림잡아 최대 200만 명 가까이, 최소 150만 명은 된다는 보고가 있다. 교회는 안 나가지만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성도들…. 이런 영향 때문일까? 요즘 캠퍼스에 크리스천 통계가 1% 안팎이라는 보고가 우리에게 충격을 줬다. 물론 움직이는, 활동하는 크리스천들을 지칭한 통계지만 어쨌든 큰 충격이다. 그
직장에서 허둥거리며 점심 식사도 놓치고 허기진 배를 쥐어 잡고 핸들을 잡았다. ‘합창공연에 괜히 참석하겠다고 했는가?’하는 갈등이 속에서 물씬거린다. 세상의 평화,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모두가 행복해 하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식사도 거르고 이게 무슨 고생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남들이 들을까? 몰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아이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청아하게 예배당을 울리는 소리에 번거로웠던 마음이 한순간 눈물로 변한다. 천사의 소리인가? 마치 인류에게 평화를 선물하신 예수님이 아이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천사를 보내시고 노래하게 하신 듯 마음이 화들짝 신선해졌다. 왠지 모를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의 은혜가 두 눈을 벌겋게 충혈시켰다. 참으려고 애써봤지만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옆 사람에게 금세 들통이 나버렸다. 지난 15년의 세월이 나뭇잎 떨어지듯 쏟아져 내린다. 3년 전부터 우리 아이는 수원굿윌스토어의 노래하는 일자리 JL희망합창단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합창단이 분당우리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분당송림중학교 강당에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합창공연 요청을 받아서 활동보조 선생님께 아이를 공연장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다른 일정이 있
이웃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로부터 추천사를 써 달라는 전화가 왔다. 목회 초년생이던 전도사 때 만난 친구인데 서로 주고 받는 것 없는데도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설교했던 원고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고 나니 이 친구에게 있었던 일화가 생각이 난다. 내가 지역에서 기독교 연합회 대표회장을 하던 해에는 전국적으로 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었다. 선거철이 되면 음으로, 양으로 무슨 행사들이 많이 있는 법. 그 중 하나가 책을 출판하며 기념하는 소위 북 콘서트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할라치면 종교계 각 단체장을 의례 끼워 넣기를 하는데 기독교계 대표회장인 내게 순서에 축사를 해 달라는 초청을 보내 왔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행사장으로 근처까지 갔는데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으로 조여오고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모 대학의 체육관을 빌려 하는 행사인데 이미 군중들은 체육과 밖까지 몰려들었다. 간신히 체육관 주차장까지 도착하니 조금 호흡에 안정이 오고 통증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래서 무사히 행사하는데 순서에 차질이 없도록 축사를 하고 자리에 돌아와 잠간 행사를 지켜보다가 양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성경으로 나의 온 마음을 덮고 싶었던 저에게 어느 날, 목사님께서 권면하신 ‘성경따라쓰기’를 통해 저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게 하셨습니다. 한 자 한 자 적어가며 저의 손끝에서 피어났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성경을 통해 더 큰 은혜로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미용사인 저는, 신앙생활을 하기 전, 한 달에 한 번씩 사회복지시설에 봉사를 다녔습니다. 봉사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어김없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봉사를 해야 복을 받지” 그러시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저는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중에 현재 담임목사님이신 송명섭 목사님께서 필리핀 미용 봉사를 함께 가자고 하시는 권유를 받게 됐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과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가기 시작한 봉사가 지금까지 8년째입니다. 제가 교회 다닌 년수와 같습니다. 봉사로 시작한 교회생활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목사님께서 심방 중에 우리 교회 성도 중에 ‘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
매년 찬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주변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는 나눔과 돌봄을 위해 언론매체들은 사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나는 섬김, 나눔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어머니의 달비(딴머리) 머리다. 지금은 가난이 내게 위대한 선생이 되었지만 유아시절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서준 과도한 빚보증 때문에 집과 모든 재산, 가재도구들이 집단리에 의해 모두 경매처분 되어 갑자기 가난이라는 것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우리 식구들을 덮쳤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부모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했던 최후의 끈이 “내 어머니의 달비”였다. 까마득한 기억의 어린 날, 친정어머니께서 큰딸 시집보내면서 반닫이 느티나무 농 밑에 고이 넣어 주셨던 대장장이가 정성껏 만든 까만 가위를 새벽기도 드리고 와서 곱게 갈아 옆에 놓고 어머니께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꼭, 잠에 취한 어린 나를 깨우셔서 앞에 앉히고 둥근 체경(거울)을 손으로 잡게 하고는 비녀를 뽑은 삼단 같고 칠흑 같은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앞으로 곱게 넘겨 빗으시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금씩 여기저기를 잘라내셨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이 보이지 않게
신학대학 3학년 초쯤의 일이다. 어느 날 커피숍이었는지 식당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옆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이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것 같은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흔히 쓰는 용어처럼 사용했기에 무슨 전문 학술용어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내가 무식한 것처럼 느껴져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 또래에서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의 오만함이었지만 말이다. 그 때부터 나는 사회과학 전문서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알아 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한 뒤로 학교와 교회 생활이 전부이다시피 했기에 학교공부와 성경공부, 신앙서적 읽기 외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1학년 때 서양문화사 교수(외래강사)가 침신대 학생들은 책은 많이 읽는 것 같은데 너무 기독교 서적만 읽는 것 같다며 다양한 독서를 권했었지만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졸업을 앞두고 학창시절을 그동안의 추억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어느 해 수학여행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한다. 저녁에 숙소에서 아이들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재미있게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짓궂은 한 아이가 서있는 한 아이의 바지를 잡아 내렸다. 소위 깝질을 벗긴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만 이 아이는 보여주기 부끄러운 부분까지 보여주고 말았다. 그 순간 아이들을 박수를 치며 웃었고 어떤 아이들은 “찍어, 찍어”를 외쳤고 동작 빠른 아이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바지가 벗겨진 아이는 수치감 때문에 울어버렸고 반 아이들은 우르르 찍은 사진을 보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일은 담임 선생님이 그 방으로 들어와서 장난을 친 아이가 울고 있는 아이에게 사과하게 하고 사건은 일단 마무리가 됐다.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장면을 상기시킨다. 그때 아이들이 “찍어, 찍어“를 외칠 때 큰 소리로 “안 돼 찍지 마라! 찍지 마라”라고 외친 두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보려고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도 그 아이는 “지워, 빨리 지워”라고 외쳤다. 사과한 아이는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사과는 자신
2) 삼자 : 이정희 목사(부인 서영임)의 자녀들 자子: 이기대, 이기윤, 이기중 이정희 목사(대전온천지방회 주님의기쁨교회 원로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 8대 총장(94년)을 역임했다. 이정희 목사의 장남과 차남은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삼남 이기중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석사를, 미국 텍사스에 있는 서남침례신학대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고 4대째 목사이다. 3) 이덕여 목사의 자녀들 그들은 다 충성스러운 교인들로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 셋째 딸 이숙자 집사는 남매를 낳았고, 맏딸 남혜숙의 남편은 박영홍 목사인데 장로교회 목사로 봉직했고, 넷째 딸 이춘자 집사는 오남매를 낳았고, 장자인 성은창 목사가 있고, 현재 호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2. 이덕여 목사의 동생 이덕흥의 자녀들 자子: 이창희, 이창홍, 이경희, 이요섭. 여女: 이연희, 이복희 이덕흥 목사의 자녀들은 다 각자의 교회에서 충성스런 신자들이고, 장남 이창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18대 총회장을 역임했고, 사남 이요섭 목사는 2017년도 교회진흥원 제4대 원장으로 취임해 봉사하고 있다. 두 딸들이 있는데 장녀 이연희 사모는 고 김선경 목사(칠산)의
이덕여 목사가 가장 좋아 하던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디모데후서4: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2:18~25) 이덕여 목사가 늘 사용하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의중백귀출(疑中百鬼出) : 즉 의심하면 백가지 귀신이 나돌아다닌다는 말씀이다. 이덕여 목사는 광시면 광시리 이장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분쟁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그때에 분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서로 믿고 살아야지 그렇게 의심하면 없었던 일도 생겨 분쟁이 그치질 않는다고 타이르다시피 했다. 대인 관계에서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는 교훈이 담긴 모습이었다. 사람이 두 주인 ‘재물과 하나님’을 못 섬긴다(마 6:24, 눅 16:13)
이 감노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놈들에게 빼앗김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신앙정신은 빼앗길 수 없다.”라는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자고 외쳤다. 그리고 마을 사랑방에서 집안의 안방에서 신도들을 모아 주일을 지켰다. 1945년 8월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된 조국은 자유롭게 찬송을 부르고, 자유롭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자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원산사건은 다음과 같다. 일제(日帝)는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그들은 교회의 공식집회 때에는 국민의례를 강요하고, 교회 안에서 국기배례, 황궁요배, 출정 장병의 무운장구를 위한 묵념, 황국신민서사를 외워 제창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일제는 이러한 전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에 대하여 일제히 검거에 나서 불응자들은 본격적으로 투옥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했다. 1942년 6월 10일에 원산의 헌병대는 교단총부를 불시 수색하는 동시에 이종근 감목을 검거 구속했다. 이들은 이 감목에게 동아기독교의 교규(敎規)에 명시된 몇 가지 사항에
나 혼자서 그 길을 가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누가 대신 가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가야 하네 나 혼자서 십자가 지네 나 혼자서 져야 하네 누가 대신 져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져야 하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누가 대신 죽어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죽어야 하네 나 혼자서 심판대 서네 나 혼자서 서야 하네 누가 대신 서 줄 수 없네 나 혼자서 서야 하네 시인은 1908년 평북 박천 출생으로 평양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나 경도여전과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수료했다. 이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선천보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일제의 신사참배의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후 도미해 노스웨스턴대학과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를 수학했고 김동명 목사와 결혼 후 LA한인교회를 개척하며 왕성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1997년 10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