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후에 몇 타 교단 신학교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았다. 그 중 어떤 곳에서는 필자가 연구하거나 가르친 분야가 아닌 사도행전과 요한복음, 교회사, 설교학 등을 요청해서 나는 교재를 찾고 교안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서점은 물론, 도서관과 장서(藏書)를 가진 친구의 서재에 까지 가서 관련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필자가 검토한 책 중에는 제목과 장정은 그럴듯한데 문장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고 심지어 주(註)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따온 글을 짜깁기 한 책도 있었고, 방대한 분량의 책에 색인(索引)을 달지 않아서 저술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내용면에서는, 어떤 책은 내용은 말 할 수 없이 좋았으나 너무 이론적이어서 교재로는 적합하지 못했고, 어떤 책은 분량이 많아 감당할 수 없었고, 또 어떤 책은 저자의 교리적 신학적 편견이 심해서 어떤 이론이나 인물을 지나치게 선양하거나 배척하는 등 편협한 견해를 드러낸 것들도 있었다. 좋은 책이 많았지만 교재로 쓸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심사숙고 끝에 선택한 일부 교재는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교재로는 평택대학교 피어슨연구소가 펴낸 피어슨 박사(Arthur T. Pierson)의 ‘신
웨슬리는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책 읽을 시간을 스스로 만들었다.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어 책 읽기를 감당했다. 의지적으로 책 읽기에 마음을 모았다. 분명한 것은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분명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책벌레들이었으며, 하루하루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대학생활에서 400여 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렇게도 분주한 전도자의 생활 중에도 일생 동안 1000여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는 한마디로 독서광이었으며, 책벌레였다. 목회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이 목회자들에겐 생활이 돼야 한다.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아도 책 읽는 시간만큼은 확보해야 한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어서 좋은 지식을 소유하면 그것이 눈빛으로 비치고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목회에서도 빛을 발휘할 수 있고, 목회의 열매로 드러나기도 한다. 웨슬리는 아주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보통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책에 빠져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
하나님은 교회를 향한 모든 계획은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고(1:4), 우주가 아들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고(1:10),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죄 사함과 구속과 은혜를 받고(1:7)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을 이루게 됐다(2:16). 성자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죄사함’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구속’의 개념은 애굽의 통치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예표했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됐다. 이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은혜는 새 삶이 시작된다는 약속과 함께 주어졌다. 이에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8)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는 이른바 우주적 기독론이 서신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나신 분
요한복음은 이스라엘의 메시야(그리스도)로 오신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신 것이 입증되었음을 그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1:1~3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뒤에 인용된 요1:14과 요20:28과함께 신약 성경 전체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말씀이다.이 구절들은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이시며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성경 속에 명문화해 두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요1:10,11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자기 땅인" 이스라엘에 사람으로 오셨고 또 "자기 백
그런데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대속 제물은 죄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가 있다.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 예수라는 분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가 낳은 이 아들이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 예수가 장성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인가?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를 오래 따라다니더니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분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백을 가야바의 뜰에서 완벽하게 뒤집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아예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마태는 무슨 근거로 사7:14의 “임마누엘”이 바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그 예수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그가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그 임마누엘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서를 마태가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가 그분의 부
목회자보다 더 나은 평신도. 이 생각은 목회를 하면할수록 더 진해져 가는 생각이다. 진실로 난 우리 성도들이 존경스럽다. 그들 믿음에 늘 감탄한다. 그런데도 난 오늘 목회자란 이유 하나로 그들 앞에 선다. 대체 뭘 가르칠 게 있다고? 되레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내가? 이 생각은 지난 주 심방한 한 가정에서도 확인했다. 30대 젊은 나이에 오랫동안 깊은 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지칠 법도 한데, 이미 몇 차례 수술로 이젠 병원 가는 것조차 겁날 텐데, 얼마 후엔 또 신장이식수술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그 앳된 얼굴에 밝은 미소와 깊은 평안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로하러 간 심방이었지만 위로는 내가 받고, 힘내시라고 간 심방이었지만 힘은 내가 얻고, 기도해드리러 간 심방이었지만 격려는 정작 내가 받았다. 그녀는 내 덕분에 평안을 얻었다지만 솔직히 그녀 덕분에 내가 평안을 얻었다. 예배하는 내내 그녀는 나 때문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지만, 난 그 모습 때문에 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뭐지? 과연 난 그럴 수 있을까? 저 상황에도 저런 평안함 가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믿음은 목회자인 나보다 훨씬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이렇게 일꾼들을 들어 쓰셨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신앙부흥운동을 시작하여 현재의 감리교회 토대를 이룬 창시자이다. 영국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책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웨슬리 자신이 많은 글을 쓴 작가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했다. 또한 웨슬리 자신도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22세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홀리클럽(Holy club)’을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웨슬리의 지도로 경건한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은 성경과 고전을 연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며 옥스퍼드 감옥의 죄수들을 방문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삶을 행동으로 성실하게 보여 줬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웨슬리는 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다.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 덕에 어려서부터 경건생활에 힘쓸 수 있었지만, 그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진 못했다. 그러던 중 미국 조지아 주 선교여행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후 모라비안 형제단의 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 어떤 사람이
로마서 8장 11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부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주도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몸의 부활도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 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협동사역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의 속격은 현재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미래의 부활간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바울은 11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 쉽게 표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주한다”를 두 번씩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부활 생명을 성령에 의존적이고, 거룩한 성령에 흡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삼위일체적인 방향에서 기독교 신학을 몰고 갈 수 있는 신 개념의 긴장이 이미 이 구절들에서 분명히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26절)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27절).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성자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34절). 여기서 우리(교회)를 위해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삼위일
이단은 대부분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공격하는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펴서 기독교의 핵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으로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을 무기로 삼아 적의 급소를 공격해야 한다. 그들은 비진리를 무기로 삼는데 그것은 진리 앞에서 무력한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검으로 적의 급소를 정확하게 찔러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진리의 검은 아주 강하면서도 아주 날카로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날렵해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울 때 어떻게 하였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 전투의 전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삼상 17:38~40). 다윗이 사울에게 불려 갔을 때 사울은 자기의 갑옷과 무기로 그를 무장시켜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다윗이 그것들을 착용해 보니 자신을 너무 둔하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평소에 맹수들과 싸울 때 사용하던 무릿매와 (본딧말은 물매가 아니라 “무릿매”이다) 목자의 막대기(maqqel)만을 들고 평소의 복장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갔다. 전투에서는 힘과 기동력이 제일 중요한데 무릿매는 다윗
탁월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바로 「고백록」(The Confessiones)을 집필했다(A. D. 397-401년).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고백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읽히는 불후의 명저다. 고백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널리 읽혀진 책으로서 철학자들, 문학가들, 심리학자들, 신학자들, 평신도들, 심지어는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애독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안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그의 신앙 표현은 오랫동안 빛나고도 남을 흔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신앙인의 진심어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당대의 주요한 철학들을 통해 걸어온 자신의 지적이고 영적인 여정을 고백적인 문체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치열하게 전개했던 육체와의 투쟁으로부터 자신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백록에는 한 권의 책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키케로(Cicero)가 쓴 「호르텐시우스
이러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그리고 이신칭의보다는 성령론을 더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신칭의’가 갈라디아서의 구원의전체가 아니라 시작이고 오히려 구원의 중심적인 부분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 세워져서 완성되어지는 부분에 있다고 본다. 갈라디아서는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그리고 ‘이신칭의’보다는 성령론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2장의 이신칭의보다도 3장부터 6장에 이르는 성령으로 진리에 순종해 의의 소망을 이루는 삶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사역’은 구원론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은 신론, 기독론, 성령론 모두 강조점을 두고 이해해야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전통주의나 새 관점의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성부 하나님의 뜻(작정)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종말론적인 틀에서 살펴보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약속의 성취와 교회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점에서 거듭남과 성화와 영화의 과정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구원 사역을
설교에 대해서 직 간접적으로 여러 번 글을 올린 바 있으나 설교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반성과 교정의 필요성을 느낀다. 설교의 ‘말씀 說’ 자는 ‘말씀 言’ 변에 兄이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옥편은 이 글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사람이 서서 가르치는 모양이라고 하지만, ‘형제 兄’ 자 위에 놓인 모자를 모양대로 ‘여덟 팔’ 자로 풀이하면 설교는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한다는 의미가 된다. 형님이 말을 하든지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씀을 하든지 간에, 설교자는 청중(신자와 시청자)을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말과 태도를 정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가르칠 敎’는 회초리 네 개와 ‘아들 子’와 ‘글월 文’ 자로 구성된 글자이다. 자녀교육은 학문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엄해야 하며 필요 시 매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교학(homiletics)은 ‘따라 말한다’는 의미의 homily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dictate, 즉 받아 적어서 백성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모든 매스컴마다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서 뜨겁게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권과 자유라는 미명으로 들어온 성소수자 권리에 전세계가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의 소리는 분명 아니다. 비단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성경을 거짓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스스로 기독교 천문학자라고 주장하는 우 모 교수는 “창조가 약 1만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있다”며 “창세기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분명 교회에 타협 이론으로 성경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다. 미국 생활에서 잊을 수 없었던 경험 가운데 하나는 두 번의 그랜드캐년을 중심으로 창조과학탐사를 한 것이다. 광활한 계곡 속에서 창조의 현장과 노아 홍수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장면을 발로 밟으며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며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미주 창조과학선교회 안내로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선교회 회장인 이재만 선교사의 강의를 듣게 된다. 참석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까지 학교에서 세뇌교육처럼 들어온 과학
“꿈을 품어라.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인형과 같다.”(그라시안)는 말이 있듯이 꿈을 꾼다는 것은 중요하다. 꿈은 삶의 의미요 삶의 목적이요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삶의 추진력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꿈을 꾸며 살아야한다. 어릴 때는 어린아이의 꿈을, 청소년 때는 청소년의 꿈을, 성인이 되어서는 성인의 꿈을 꾸며 살아야하고, 노년이 되어서도 꿈을 꾸며 살아야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닥치는 어려움도 극복하고 낙심하지 않고 노력하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고 삶도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꿈도 없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면 낙심하고 발전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윌슨은 “비록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꿈을 간직하고 꿈이 실현될 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꿈을 꽃피울 봄날이 올 것이다”고했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당장 이뤄 지지 않기 때문에 꿈을 안고 사는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목발을 짚고 다니며 자주 교회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할아버지께 물어 봤다. 무료급식소에서
따라서 성경만큼 보편적이고 영원한 책은 없다. 성경의 진리는 기록된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서 역사한다. 아울러 성경은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써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영원한 진리이며,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지침이며, 인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양식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했고, 그 기록된 것을 받은 독자들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엡 3:1-4). 성경은 읽혀져야 하고, 그 뜻이 깨달아져야 하며, 그 교훈이 개인과 교회에 의해서 실천돼야 한다. 그것은 성경만큼 뛰어난 힘과 영향력, 그리고 감화를 주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또는 중요한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 독서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확실하게 목적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의식을 갖고 독서하는 목회자와 목적의식 없이 독서하는 목회자는 관심이나 흥미, 책임감이나 집중력 그리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일단 양적으로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