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활력 있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 삶에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가져야하며 주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용서, 변화 이런 삶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열매”맺는 삶을 말합니다. “열매”란 영성, 내적인 인격, 이러한 것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삶 가운데서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을 그림같이 명쾌하게 설명하시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많은 결실의 예(例)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익숙한 것으로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설명하셨는데 그것이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농부입니다. 우리는 이 포도나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라는 주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배타적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안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 여지가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주님의 관계를 넘어설 수 없음을 천명하신 말씀입니다.
군목 6년차부터 한 2년간 충남 홍성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충남 강경이 부모님의 연고가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내면에 충청도의 성향이 흐르기는 했겠지만, 본격적으로 충청도에서 살아본 것은 대전이 광역시가 되기 이전 학교 다닐 때 이후론 처음이었습니다. 한 번은 홍성의 왕복 1차선씩 밖에 안되는 지방도로로 예하부대 교육을 가고 있었는데 앞에 가는 차가 영 속도를 내지 않아 제 차 뒤로도 적잖은 차들이 줄을 서서 답답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 뒤에는 “초보운전” 뭐 이런 문구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글씨가 아니어서 좀 가까이 가서 읽어보았더니 “답답하시지유? 지는 환장하겄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결국 초보운전이라는 얘기를 그렇게 써놓은 것입니다. 그냥 속도내고 지나는 길이었다면 차 뒤에 무슨 글을 써놓았는지 관심도 없었겠지만, 그 차가 내게 신경을 쓰게 하는 바람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그런 장난 같은 글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경우도 있었는데, 한참 러시아워에 대전 시내를 운전하고 가고 있었는데 앞서가는 택시 뒷 범퍼에 작은 글씨로 뭐라고 붙여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평소라면 보일 리 없었던 글씨
넷째로, 침례교운동은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국교체제의 기독교가 아닌 자유교회)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자들의 영적인 공동체”(Spiritual Body of Believers)여야 한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네델란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서 발견해 낸 신앙원리였다.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결탁되었던 로마가톨릭 교회의 유산인 유아세례 전통을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과감하게 배격하였고, 교회는 세속국가나 권력기관과는 무관한 신약성서적 교회, 다시 말하면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13) 이전의 순수했던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Religious Freedom for All)를 이상으로 하여 세속권력자들은 인간 내면의 종교나 신앙이나 양심의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침례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고집스럽게 믿지만, 동시에 불신자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믿는다. 다섯째
강경 옥녀봉에 비가 내린다 1944년 5월 10일 일제의 강요된 신사참배 거부에 순교, 몰수, 해체의 고난을 받아내느라 십자가를 져야하였던 동아기독대의 아픈 슬픔, 칠십이년 세월 참았던 무게감 견딜 수 없어 2016년 5월 10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눈물이 비로서 옥녀봉을 적신다 이제야 우리들 기억속에 씨앗 뿌려저 기독교한국침례회 신사참배 거부교단 기념예배로 움 돋은 거룩한 예배 옥녀봉 적신 비로 옥녀봉 초목의 푸르름이 생명으로 가득하듯 우리 선조들의 그 슬프고 아팠던 눈물이 오늘의 우리 기독교한국침례회 부흥을 가져왔는데 1944년 5월 10일 잊혀진 과거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질뻔한 하마터면의 순간이 아찔하게 전율하며 옥녀봉에 내린 비는 우리의 뇌리를 두드린다 옥녀봉에 내린비는 슬픔인가? 은혜인가? 우리 선조들이 진 십자가는 슬픔속에 담겨진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거늘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어떻게 받고 있는가? 기독교한국침례회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역사로 그려지는가? 칠십이년전의 동아기독대 그 모습따라 그려지고 있는가? 순교의 피로 지켜져 물려받은 선조들의 유산 삼삼오오 짝을지어 이리저리 뜯어대는 우리들 아닌가? 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차별금지법, [서울]학생인권조례, 세월호특별법, 김영란법 등이 입법절차를 밟고 있거나 시행을 앞두고 있다. 동성애차별금지법과 세월호특별법은 오랜 기간 회자(膾炙)된 바 있어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최근에 공청회를 시도하다가 학부형들의 반대로 무산된 학생인권조례에는 체벌 전면금지, 두발과 복장 자유, 집회 허용 등 교사의 지도를 전제로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공론이 필요해 보인다. 지난 한 해 동안 교권침해 사례가 13,000건이나 된 점을 감안할 때 이 조례가 학생을 교육 하자는 것인지 방임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해괴한 법이다. 김영란법은 전 국민권익위원장 김영란 씨가 2012년에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란 이름으로 국회에 상정한 법율 안이었는데 2015년 3월에 “김영란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2016년 5월에 시행령이 입법예고 되어서 금년 9월 28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 법이 처음에는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했으나 심의 과정에서 적용 범위가 넓어져 하위 공직자와 사립학교 교직원 및 언론인에게까지 확대 되었다. 이 법의 내용 가운데는 직무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 속량 )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1:7)” 속량(헬,아폴뤼트로시스)이란 말은 본래 노예 된 자를 그에 상응한 값을 주고 해방 시킬 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죄의 값을 치루셨는데 그 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치르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치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한 예를 들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바이올린 중에는 그 가격이 몇 십만 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몇 백, 몇 천, 몇 억, 심지어는 26억짜리 바이올린도 이 세상에 있다고 합니다. 그 가치의 기준은 어느 만큼의 음질과 음색으로 사람들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값, 즉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값을 지불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걸맞은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
인간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존재다.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어떤 실수와 잘못을 했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의 말 한마디는 가히 절대적이다. 이삭의 아들 에서가 동생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축복을 뒤늦게라도 되돌려 달라 호소한 것도 바로 그 때문. 그저 축복만이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도 그들을 풍성하게 축복하신 일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축복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초의 약속이며, 명령이자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역시도 하나님은 먼저 축복하셨다. 그 다음 사명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축복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특히 축복을 확실히 받아야 할 인생의 일곱 시기, 1. 아이를 가질 때, 2. 임신했을 때, 3. 태어났을 때, 4. 어릴 때, 5. 사춘기 때, 6. 결혼할 때, 7. 노년의 때는 더 없이 중요한
한 때(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지방의 침례교인들 사이에서 “지계석주의”(Landmarkism) 운동이 유행했었는데,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가 바로 침례교회였으며, 그 분이 받고 베푸신 침수례(Immersion Baptism)가 교회역사 상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침례교회 전승설”(Baptist Church Succession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학설에 의하면 침례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에도 존재해 왔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20세기초까지도 이 학설이 침례교인들 사이에서는 통설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전세계 침례교 신학계에서나 역사학계에서 객관적이고 건전한 이론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을 비롯한 근원적 종교개혁이 종교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하듯이, 아나뱁티스트들을 넘어서는 침례교운동 역시도 종교개혁운동의 한 지류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침례교회 역시 종교개혁운동의 한 결실이며,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고, 유아세례와 국가교회체제를 거부하는 자유교회운동에서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 지난 호에는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관한 첫 번째 국면인 선재와 화육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두 번째 국면인 부활과 승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은 선재와 화육 그리고 부활과 승귀로 압축된다. 빌립보서 2:6~11에 나오는 기독론적 찬송시의 전반부(2:6-8)는 선재와 화육에 관한 것인 반면, 후반부(2:9~11)은 부활과 승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전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종의 본체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으로서 그의 존재성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결합을 제시했다. 바울은 후반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통해 인성과 신성의 신비한 결합으로 나아간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존재가 되셨다(빌 2:9). 바울은 전반부에서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됨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바울은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
창세기 24장에 기록된 내용에 아브라함의 며느리요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는 다섯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시대의 영적 리브가를 본받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첫째, 매우 아름다웠습니다(16절). 우리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여인이었습니다(15절). 엘리에셀이 목적지인 밧단아람에 당도해 우물가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24절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미리” 예비하신 응답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셋째, 따뜻한 마음씨로 배려하고 성실하게 도와주고 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17~19절). 그녀는 마실 물 좀 달라는 엘리에셀의 말을 듣고 급히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떠서 드리면서 요구하지 않은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손수 길어다가 끝까지 먹여주는 것을 봅니다. 낙타의 별명이 “사막의 배”라고 합니다. 그
필자는 정치의 잘 잘못을 따지려 하거나 어떤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난할 의사가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보여준 치졸한 계파 갈등과 어지러운 20대 국회의원 선거로 인해 우리사회의 상식과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면서 한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은 공천방식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정부 여당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당 중심의 하향식 공천방식 대신 상향식 프라이머리 방식을 채택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동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가 당이 정한 새로운 방식을 거부하고 종전의 공천방식대로 공천 작업을 추진하겠다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에 대해 당 대표는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으나 선관위원장은 선관위는 독립기관이므로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고 당대표를 포함해서 모든 소속의원들을 면접까지 하면서 선관위 방식으로 공천을 밀어붙였다. 참으로 서슬이 퍼런 권세였다. 그러나 국민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선관위는 당이 정한 정책 안에서 공천과 선거를 수행 감독하는 한시적 기구이므로 당의 정책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업무수행 과정과 결과를 수
새벽이슬-15 충성된 종 ‘엘리에셀’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단연코 아브라함의 종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창15:2).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 가서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특명을 받은 종인 엘리에셀은 비록 늙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엘리에셀(도우시는 하나님)은 자그마치 아브라함 밑에서 최소한 60년 이상을 종으로서 충성을 다한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의 표본입니다(고전4:2). 예수님께서도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복이 있으리라”(마24:45~46)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3:10~11에는 집사를 세우는 기준으로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분을 인정상 주고, 시험든다고 주고, 대접상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엘리에셀같이 충성된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만 소망이 있으며 미래가 있습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엘리에셀같은 충성된 일꾼이 세워지게 하소서! 엘리에셀의 두 번째 특징은 그는 설득력있는 말
말과 언어에 대해서 여러 번 글을 올렸거니와 목회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조심해서 사용하며 계몽해야 할 표현 몇 개를 더 하고자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를 낳아준 육친의 어버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아버지와 다름없이 친근한 어르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근래, 속세를 떠나 홀로 사는 기인(奇人)들을 찾아가서 대화와 체험을 나누는 방송 프로그램 등에서 아버지 호칭이 오, 남용 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생면부지의 산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사회의 법도와 통념을 벗어난 일이며 듣기에도 민망하다. 아버지 대신 선배님, 어르신, 노인장, 또는 아버님 등으로 불러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을 나타낼 때 폭넓게 사용되는 호칭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려서 사용해야 한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어머님이라 하든지, [누구]어머니, 아주머니, 어르신, 여사(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 하겠다. “형님”은 친근한 선배에 대해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근래에는 남용이 심해 듣는 이를 식상하게 만든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공연히 형님 형님 할 것이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또 왔습니다!” 박종수 씨는 예사랑 교회에 부임이후 3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 예배보기보다는 돈 받으러 오는 단골손님이다. 구룡마을 무주택 지역에 모여 지내는데 주일만 찾아온다. 지난달에는 저가 미국 가고 없을 때에 왔다 갔다며 오늘은 말도 없이 내 사무실문을 밀어제치고 들어왔다. 예배시간이 남아있어 대화했다. “작년에 내 시킨 대로 요사이는 일을 하고 있느냐?” “예 파지 줍기를 열심히 하는데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수입이 됩니다. 그래도 동료들과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오늘 또 이렇게….” “그래 시킨 대로 놀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지!” 교회마다 주일에 돌아다니며 구호금을 받기보다는 지금 65세이고 건강할 때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살며 주일은 꼭 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엄중히 충고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언젠가 비오는 날 신당동에서 손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노모 아주머니가 힘들어 하기에 뒤를 밀어주며 따라 올라갔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쇠약한 할머니도 매달 50만원이나 수입이 된다고 했지. 가게들과 파지수집 예약을 하고 다만 1,000원이라도 나눠주면 가게 주인이 잘해 준다고 하던데, 자네도 그렇게 해서 앞으로 10
지난 수요예배를 드리며 내겐 다소 충격이었던 중요한 묵상 하나, 요한복음 6장15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는 표현. 그날 따라 그 말씀이 왜 그리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는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의 능력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를 ‘선지자’로 고백함을 넘어 ‘임금’으로까지 삼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시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자리를 떠나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내용이다. 왜일까? 주님은 이 땅의 선지자로도 오셨지만 왕이 되기 위해서도 오셨는데, 왜 그들의 원함을 뿌리치고 떠나버리셨을까? 백성들이 알아서 왕이 되게 해드리겠다는데도 왜 주님은 거절하신 걸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왕과 주님이 원하는 왕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고픔과 압제를 벗어나게 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지만, 주님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영적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원함’의 차이가 주님의 ‘떠남’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니 이는 왠지 우리의 모습도 비추는 것 같아 섬뜩하다. 아무리 우리의 원함이 간절하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