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은 운전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잘못된 문장과 발음이 많아 우리말 보존에 염려되는 바도 없지 않다.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1. “약 300미터 전방에 어린이 보호구역입니다.”‘전방’[후방]은 전쟁 때 사용하던 옛말이므로 ‘앞에’로 고쳐 말해야 하며, 어린이에는 강세가 첫 글자 ‘어’에 있으므로 ‘이린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어’에 힘을 주어 ‘어린이’로 발음해야 하며, “전방에 … 입니다”라는 문장은 구조가 잘못되었다. “약 300미터 앞에 어린이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해야 한다.2. “전방에 교통사고 다발지역이 있습니다.”‘다발지역’ 역시 ‘전방에’처럼 어색한 옛말이므로 ‘잦은 곳’으로 고쳐서 “여기는 교통사고가 잦은 곳이니 주의 하세요[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좋을 것이다. 3. “왼쪽 방향 지하도로 진입하여 주십시요.”방향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하도는 좌회전해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 방향 앞쪽에 있으므로 ‘왼쪽 방향’이라 해서는 안 된다. ‘왼쪽 방향’은 삭제해야 한다. 또 “진입하여 주십시요” 하고 부탁할 것이 아니라 ‘진입 하세요’ 해야 한다.4. “약 1킬로미터 앞에서 오른쪽 방향입니다.”도로가 오른 쪽
이 땅에 태어난 사람에겐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절대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둘째는 천국 가는 것으로만 만족해선 안 되고 천국에서 하나님께 큰 상을 받아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어느 연로한 남자 집사님 가정에서 가족들을 한자리에 다 모아놓고 유언하는 자리에 저도 불러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유언의 내용은, 집사님이 죽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마지막에는 교회 사택 구입 시 은행 대출 받은 5천만 원 빚을 갚기 위해 헌금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그 집사님은 2년 후에 돌아가셨고 그 분의 유언대로 5천만 원을 헌금하여 사택 빚을 갚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지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분을 통해 받은 신앙의 교훈은 지금도 여전히 저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분배한 재산은 천국에서 상급이 안 될지라도 하나님께 헌금한 물질은 천국에서 상급으로 돌아갔을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확신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구원 받았으면 이 한 목숨 사라질 때까지 천국에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실 상급에 눈을 떠야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심판’의 개념은 현재의 결단에 종속된다. 이 시대가 종말의 시작이라는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그 종말의 결과에 대한 강조는 부분적이다. 즉,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2:16~21)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운 시대는 궁극적으로 종말을 지향하면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요엘의 예언 성취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강림에 따른 선포와 더불어 성령의 영원성과도 관련되며, 이 영원성을 가진 성령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심판’은 현재를 위한 결단의 촉구 의미를 내포한다. 장차 도래할 종말의 시대를 전제로 하는 성령시대는 종국적인 심판의 서곡이다. 이에 따라 바울은 “의, 절제, 장차 올 심판을 강론”한다(24:25)고넬료의 사건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재판장’이란 표현 속에 내포한다(“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이 표현도 현재적인 구원의 견인과 관련된다.. 심판은 종말을 전제로 현재적인 구원에 대한 선포로 기능하는 것이다. IV. 예수: 구원의 본질구원의 본질은 무엇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열망하시는 것은 위대한 미래를 선택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위대한 미래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위대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 최적화 된 교회입니다.” 위대한 미래를 선택하는 교회, 실패를 선택하는 교회는 장소가 어디에 있던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소의 선택을 중요시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내일”을 맞는 교회와 “실패의 내일”을 맞는 교회는 오로지 오늘의 선택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광야 교회는 위대한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실패의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선택의 언저리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교회를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리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구원하셔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교회는 지금 이 순간까지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그리고 인도하심을 경험하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겨울이 길어도 봄은 오고 밤이 깊어도 아침은 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습니까? 추운 겨울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봄날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어두움에 잠겨 있습니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라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고백한 것 같이 우리의 삶에도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같은 시편에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간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3~4)라고 노래함 같이 우리도 기쁨의 아침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기 원합니다. 오늘은 유구지역 연합부흥집회의 마지막 날입니다. 시작할 때에는 길게 느껴지던 일정도 막상 시작하면 잠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모든게 잠깐입니다. 말 그대로 눈깜빡할 새에 새가 날아가듯 다 지나갔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마지막이 있고 끝이 있기 마렵니다. 이것을 알고 받아들이면 인생은 허심탄회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목사님, 김 아무개 아세요?”-사람은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나서부터 눈 감을 때까지 입에서 말을 뗄 수 없다. 말이 곧 삶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목회자는 매일 매시 누구인가를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고 상담하고 전도하면서 그 어떤 사람보다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대화중에 목사를 난처하게 하는 말이 있다. 1) “목사님, 김 아무개 아세요?” 하는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신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목사는 마음이 언짢아 진다. 손윗사람에게 “누구를 아세요?” 하는 것은 실례를 범하는 것이므로 “목사님, 김 아무개를 기억하세요?” 해야 한다. 목사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질문한 신자가 참지 못하고 매를 번다.2) “목사님과 친했잖아요?” 친하다니? 목사는 모든 신자를 한 결 같이 돌보는 사람이지 어떤 신자와 특별히 친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아니므로 질문자는 목사의 기억력을 되살릴 다른 단서를 제공해야 했다. 또한, 친하다는 말 역시 동료나 같은 연령대에서 사용하는 말이지 손윗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3) 사람들은 대화중에 “나 같은 경우에는”이라는 의미상의 조건구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스타킹을 신고 그 위에 양말을 신어요,
이번에 선교여행을 목적으로 다시 일본 땅을 밟으며 새롭게 만난 일본전국시대의 세 명장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세 사람의 인물됨에 대한 이야기 한토막이 있다. 어느 날 울지 않는 두견새 한 마리를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데, 오다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계속 울지 않는다면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랬더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 울게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그랬더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세 사람의 리더십 스타일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비유이므로, 비유가 다 맞진 않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만큼은 이런 세 가지가, 리더십의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하면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단호하고 결단력 있고 추진력 있는 오다 노부나가 스타일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꾀 많고 유쾌하며 친화력 있고 목표지향적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타일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지나침보다 부족함이 낫다며 서두르지 않고 기회가 올 때까지 낮은 자세로 기다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스타일을 따를 것인가?그러고 보니 오다 노부나가는 조선의 수양대군을 닮
복음서에서 질병치유는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기능을 한다. 사도행전도 이 전승을 이어간다. 사도행전에서 육체의 질병 치유와 구원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4:9-10).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왔으며 이들이 다 나음을 얻게 되는데(5:14-16), 이 치유가 믿음과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을 14절의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라는 내용에서 추론할 수 있다. 특히 베드로는 육체적인 질병 치유 및 귀신 축출을 전인격적인 회복과 관련하여 설명한다(10:38)Ibid., 115..그러나 사도행전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 치유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넘어 전인격적인 존재의 치유까지 구원이라고 칭하며, “종말론적인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Ben Witherington III, “구원과 육신적 건강: 1세기 누가-행전의 구원론,” ‘복음의 증거: 사도행전신학’, I. H. Μarshall 편, 류근상 역 (서울: 크리스찬출판사, 2004), 184.. 물론 구원받은 자가 모두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지 않듯이 치유가 바로 구원은 아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육체의 질병으로부터의
침례교도들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 또는 오직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이며 성경의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1, 2, 3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고 선포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율법 선생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요5:39)고 하셨습니다. 유대 율법선생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성경 지식이 무엇 때문에 주님과 충돌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성경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다른 것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이 여전히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찾지 않고 다른 것들을 찾기에 급급한 것은 부정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창조역사(創造役事) 가운데서 무엇을 하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의 창조역사가운데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은혜”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모든 게 은혜 속에 녹아 있고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때문에 살아 있고 은혜 때문에 죄도 용서 받고 구원도 받았으며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고 은혜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이 고백하신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한 것 같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일 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전해줍니다(창6:8). 노아가 이런 은혜를 입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창7:1). 창6:9에 보면 노아의 믿음을 보여주는 세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의인” “완전” “동행”입니다. “완전”이란 히브리어로 “타밈”이라고 하는데 이는 흠과 티가 하나도 없이 결점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중심과 태도와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며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런 노아에게 어찌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나 어떤 육체의 행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이른 아침 엄마가 일하러 나간 빈 집에서 아이는 종일 엄마를 기다린다. 낮에는 배가 고파 찔레 꽃잎[순]을 따 먹으면서도 “엄마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밤이 늦어 [품삯으로 받은 곡식을 이고] 하얀 버선 발목을 바쁘게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마지막 2행은 어린 딸(성별 표시 없지만)이 자라서, 지금은 다른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찔레꽃은 진달래와 봉숭아 개나리 등과 함께 가난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정서에 깃들어 피고 진 꽃이어서 노랫말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해온다. 찔레꽃을 쓴 시인은, 대구 출신 월북 문인 윤복진(1907-91)이 분명한데 1920년에는 이태선이, 1930년 ‘신소년’ 잡지에는 이원수(1911-81)가 각각 같은 제목으로 조금씩 다른 내용의 시를 발표했다. ‘문학세계’와 대구문학관 등이 윤복진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고 그의 유작을 모아 전시했으나 작사자가 여럿 나타난 이유를 찾
요즘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좀 적적하거나 동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집에서 동물을 키웠고, 그런 동물이 언제부터인가 크기와 관계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게 되었습니다. 거의 자식같이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거의 안쓰고,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도 사람 대하듯 하고, 동물 이름에도 자기 집 성을 갖다 붙여주는 사람들까지 있다 보니 동물들이 자기가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혀를 차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이제는 동물학대방지법 같은 것도 있어서 자기 소유의 동물이라고 해도 밥을 제대로 안주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반려 동물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개와 고양이입니다. 전통적으로 개는 사람 가까이서 살아왔고, 종자가 개량되어 크기가 작아지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이 되어지면서 일찍부터 실내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공동생활이 많아지면서 개가 짖는 소리가 적잖은 민원을 발생시키고 이웃 간의 불화를 조장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기르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침례’는 외형적 형식이지만 그러나 내면의 상태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실체로 기능한다요한의 침례(1:5; 11:16; 19:3, 4); 회개의 침례(2:38, 41; 8:12, 13, 16, 36, 38; 9:18; 10:47, 48; 16:15, 33; 18:8; 19:5; 22:16); 성령침례(1:5; 11:16); 기타(19:3). 요한의 침례(1:21; 10;37; 13:24; 18:25; 19:3, 4).. 예수는 승천하시기 전에 ‘물침례’를 비교점으로 삼아서 제자들이 ‘성령으로 침례’ 받을 것을 예고하신다물침례와 성령침례와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김선배,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의 신학적 의미,” ‘복음과 실천’, 45 (2010 봄): 51-3..이 예고는 베드로의 회상을 통해서도 반복된다(11:16). 사도행전에서 침례는 구원과 침례의 시차적인 간격이나 개념의 분리 없이 구원을 표출하고 보증하는 형식이다로마서 6장은 침례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과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침례가 성령과 관련 하여 내면적인 상태를 표출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침례’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는다. 성령
시편 23편은 내 어린 시절 처음 성경을 암송할 수 있었던 때에 첫 번째 암송했던 시였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의 시절을 지나며 수많은 좌절의 순간순간에도 시편 23편은 내게 격려를 주었고 희망을 주었고 행복을 주었습니다. 청장년을 지나 초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먼저 주님의 품에 안기신 선친 고 이진팔 목사님 내외분의 묘소를 가끔 찾아 묘비 앞에서 그리움을 달래며 고개 숙여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나직하게 암송하며 영원한 그 날을 고대하면서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이것이 나의 영적 히스토리이며 독자들도 같은 영적 역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시편 23편을 처음 대하면 너무나 달콤하고 포근한 솜사탕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암송했으며 또 아름다운 곡을 붙여 노래하며 사랑해온 시입니다.웨슬리는 “이 작은 한편의 시가 세상의 어떤 수많은 책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시편 23편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시편 23편이야말로 시편의 나이팅게일”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밤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희망을 찾아 기쁨의 아침을 맞는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현현 체험의 마지막 국면은 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로 묘사된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진행한다. 저자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 속에 그 제자를 등장시킨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가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이더라”(21:20).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서 그의 동료이며 경쟁 관계에 있던 그 사랑 받은 제자에게 관심을 돌린다. 베드로는 그 제자가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자는 ‘따르다’는 동사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그 제자의 상황을 대조시킨다. “그 제자가 따르고 있다”라는 그 제자의 상황에 관한 표현 앞뒤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인 “나를 따르라”(v.19)와 “너는 나를 따르라”(v.22)는 지시가 반복된다. 그 제자는 베드로가 행하도록 반복적으로 지시를 받은 것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을 이미 행하고 있었던 것이 부각된다.그 제자는 고별 강화에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과 동일시된다(13:23~25). 그는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이며 그래서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