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종교들을 보면 사랑을 경험하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지만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종교를 참 종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마태복음 22장 37-40절 말씀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사랑이 경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는 기독교를 기독교라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지체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모든 세대를 걸쳐서 가장 귀중한 가치입니다. 특별히 21세기를 살아가면서 기독교한국침례회 안에서 한 신앙의 고백을 공유하며 주님을 섬기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 9절에 “형제 사랑”이라는 말을 헬라어에서 ‘필라델피아스’입니다. 이 말은 문법상 ‘필라델피아’의 단수, 소유격입니다. 이 말은 “내 가족, 내 형제 자매의 사랑”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께서 곧이어 10절의 말씀에서 “온 마게도냐
사도행전은 ‘도’라는 용어에 비유적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통로의 개념을 내포시킨다주의 도(18:25); 하나님의 도(18:26); 이 도(19:9: 하나님 나라-19:8; 19:23: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19:20; 22:4, 14, 22). cf. 2:28(생명의 길); 13:10(바른 길); 14:16(자기들의 길); 구원의 길(16:17). 물리적으로 ‘길’을 의미하는 ‘도’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특히 이 용어는 헬라-로마 문화권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바울의 증언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22:4; 24:14).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행한 변호에서 ‘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진술을 한다. 이 장면에서 반복되는 ‘도’는 바울의 강론을 통해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24:15)과 ‘죽은 자의 부활’(24:21)을 비롯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24:25). 이 바울의 강론은 구원 이후의 결과를 함축한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뜻’은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하나님의 정하신 뜻(2:23); 하나님의 권능과 뜻(4:28); 하나님의 뜻(13:36; 20:27). cf. 이단이라 하는 도(24:1
이번 시간에는 구약의 인물 중에 ‘셋’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대리자, 임명하다 또는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창4:25). 아담과 하와 부부는 죽임을 당한 작은 아들과 이로 인해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큰 아들로 인해 좌절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넋이 나갔을 것입니다.그런 아담이 “다시” 하와와 동침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이 바로 셋입니다. 셋은 낙심천만하고 있던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위로와 기쁨과 소망”을 준 아들입니다. 셋이 태어남으로 초상집 같았떤 집안에 다시 웃음꽃이 피고 생기가 돌았을 것입니다. 끊어진 아담의 가계를 이어주려고 태어난 아들입니다. 역대상 5:1을 보면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의 자손에게 실질적인 장사의 명분이 돌아갔다고 말씀합니다. 셋은 순서상으론 아담의 셋째 아들이지만 실질적인 장남이 되는 복을 받게 됐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 아담이 “다시”(again)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비해서 아내와 동침(합)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신 것입니다.그리고 셋은 훗날 이 세상의 구주로
문명사회가 역사를 존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역사에서 과거의 실패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한 시대가 지나가면 왜곡한 사람의 저의가 추신(追伸)으로 첨부되어 저울추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는, 알다시피, 정사(正史)가 있고 야사(野史)가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 관청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었고, 어전(御殿)에는 임금의 치리(治理)와 모든 대화를 낱낱이 기록하는 어전사관이 있었다. 그들이 밤낮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후대 정사의 기초가 된 왕조실록(實錄)이다. 이 기록은 임금을 포함해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기록 후 즉시 봉인해 두었다가 임금이 죽은 후에는 실록청(實錄廳)에 영구 보존했다. 선조들은 이처럼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록을 엄하게 취급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는 저녁의 황금시간대에 앞 다투어 사극을 방영한다. 근래에는 ‘육룡이 나르샤’와 ‘장사의 신’ 등 비교적 수가 줄어든 것 같으나 한 때는 ‘단종애사’ ‘태조 왕건’ ‘여인천하’ ‘허준’ 등의 소위 대하드라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방영되었다.‘대장금’과 ‘허준’에서와 같이 의로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2013년도 한국 남·여의 평균 수명 통계표를 보면 남자는 78세, 여자는 84세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성경공부반에서 성도들에게“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다가 죽음을 몇 년 앞두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을 일찍 믿어야 될 필요성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의 답변들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첫째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예수님을 빨리 믿어 지옥을 모면해야합니다.둘째, 세상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달픈데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야 합니다.셋째, 천국에서 큰 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넷째,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참 행복하고, 우리의 영이 살기 때문입니다.그 후 제가 원하는 답이 안 나와서 계속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한 성도님이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다섯 번째 내용을 답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섯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위에서 말한 성도들의 신앙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1~4번째는“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이며
II. 구원의 선포사도행전은 선포되는 복음과 설립되는 교회의 모본을 제시하면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교회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구원의 선포는 듣는 자의 결단(반응)을 요구하는 일방성이며 증인 또는 증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선포와 증언은 매우 함축적이지만 그 범위는 매우 포괄적이다. 1. 구원‘구원’은 사도행전에서 다른 용어들보다도 비중 있게 등장하며‘예수 사건’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전달한다.(주. 이 논문에서는 구원 관련 용어들에 대한 성경 구절 예시를 구원의 전개와 직접 해당되는 경우로 제한했다.) 이 용어는 구원의 실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구원의 개념들을 통합하면서 구원에 대한 반응을 요구하는 선포의 기능을 한다(주. Joel B. Green,“ 땅끝까지 구원(행 13:47): 사도행전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복음의 증거: 사도행전신학’, I. H. Μarshall 편, 류근상 역 서울: 크리스찬출판사, 2004, 105. 부분적이나마, 구원의 실체에 대한 사도행전 자체의 의미는 비록 같은 용어의 사용이 아니라고 해도 바울의 소명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구원에 대한 부연 설명, 또는 해석이 아그립바 앞에서 행한 바울의 고백 속에서 등장한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오고 어두운 밤이 자나면 새벽이 오듯 앞이 캄캄한 생의 터널도 반드시 끝날 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혹독한 추위가 우리를 떨게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갑니다. 터널 저편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차량처럼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와 제물은 받아주셨습니다(4절). 그 이유를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세 가지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잠 15장8절)했는데, 아벨은 하나님 보시기에 은혜롭게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순서나 방식이 아니라 믿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려진 것을 언제나 기쁨으로 받아 주십니다. 두 번째는 아벨이 의로운 자였기 때문입니다(요일 3장12절). 악인의 제물은 가증하기 때문에(잠 21장27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배시간과 장소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신실하고 겸허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예배
사복음서 중 요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 사건을 세 번 전달한다. 요한은 세 번째 부활현현의 묘사에서 부활의 주님과 베드로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에 집중한다. 이 대화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의 세 번의 대답과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세 번의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이 대화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앞으로의 삶을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고별강화에 따르면, 베드로가 그의 희생적 충성을 자부했을 때, 예수님은 이중 아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 그런데 이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했음에도, 예수님은 다시 이중 아멘 말씀으로 그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의 생명까지 잃게 될 것을 예고하신다.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예고는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행위의 변화를 설명하는 독특한 비유로 묘사된다. 목자로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삶은, 예수께서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는 인생을 ‘한권의 책’에 비유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모든 여정은 매일 한 페이지씩 글을 창작해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人生)이란 제목의 책을 한 페이지씩 써 간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글로 쓰는 일기(日記)와는 다르다. 글로 써가는 것이 아닌, 삶으로 써가는 책이다. 행동으로, 말로, 표정으로, 생각들의 총체로 채워가는 책이다.자서전(自敍傳)과도 다르다. 자신이 쓰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은 업적들로만 채워지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인생을 선물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점으로 오늘 내 삶을 바라보신 각도로 친히 써주시는 책이다. 그렇다면 지난 한 주간 내 책에 쓰여진 일곱 페이지는 과연 어떠했을까? 태어날 때부터 오늘까지 살아온 세월이 벌써 만 50년, 18095페이지나 넘겨온 나의 책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기록되어 있을까? 너무 궁금하다. 생각해보니 혹, 양(量)에 있어서는 자랑할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24시간을 정말 빼곡히 채워왔고, 새벽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대표적인 건축물 “사그리다 파밀리아(聖家族)성당은 1882년도에 착공해서 153년이 되는 2035년도에 완공예정이라고 합니다. 성가족성당의 아름다움도 압권이지만 ‘가우디’가 남긴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아름다움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부지런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성장을 저해하는 어떤 요소라도 극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가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밭, 그리스도의 집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에게 1절의 말씀에서 “형제들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형제들”이라는 말은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나는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이며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구원의 복음을 위한 다양한 용어와 전달 방법이 사도행전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당시의 사회에서 통용되던 다양한 표현과 구원 개념의 활용이 사도행전의 구원 신학을 위한 ‘선포’(설교)와 사건들 속에 폭넓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기초로 사도행전의 구원 신학은 전체 내용의 연계성 있는 구조 속에서 다면성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사도행전은 구원의 선포 속에 특징적으로 회개, 침례, 죄사함, 성령, 믿음, 하나님 나라, 부활, 심판, 질병치유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포와 구원의 실체는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용어로 정의되기에는 매우 포괄적인 동시에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사도행전은 구원을 마치 다의성을 가진 사상인 것처럼 오해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각주, 이러한 오해를 전제로 한 변증이 예수를 통한 유일한 구원의 강조 속에 반영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구원 신학은 사도행전의 내용 전개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점진적으로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를 이룬다. 펼쳐지는 구원 신학은 그 초점을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 집중하면서 구원의 본질과 실체를 밝히며 전개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구원 신학이 어떻게
세계에는 각종 기록이 존재합니다. 세계 신기록 보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와는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습니다. 세계 최초로 창조된 여자입니다(창1:27, 창3:12). 세계 최초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입니다(창3:1, 6). 사탄이 여자를 먼저 공격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딤전2:14).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처음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세계 최초로 생명을 출산한 여자입니다(창4:16, 4:1). 그 당시 친정 엄마는 물론 상의할 이웃도 없고 출산을 받아준 산파도 없으며 도우미도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고 경험도 없이 아이를 낳느라 정말 외롭고 고생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3:20~21을 보면 아담이 자기의 부인이 된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하와는 범죄한 이후에 지은 이름입니다. 그 뜻은“산 자의 어머니”로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입니다. 하와에게서 생명을 받고 태어났으니까요. 비록 죄를 지었을망정 그는 인류의 시조가 된 행복한 여인입니다. 하와에게는 또 하나의 세계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옷을 입은 여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서적 몇 권을 찾아 읽었더니 대부분의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의 기본 요건으로 알려진 (1)해당분야에 대한 경험과 (2)전문지식 및 (3)인격과 (4)지도력에 덧 붙여“미래지향적 안목”을 필수요건으로 지적했다.이와 같은 정의(定義)는, “새의 눈을 가진 자 흥하고 벌레의 눈을 가진 자 망한다”는 옛 말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것만 보고 꿈틀거리는 지도자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혁신가는 지금이 어려워도 장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며 훌륭한 지도자는 편안한 오늘을 사기 위해 내일을 내주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100년 후의 파리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시 전역 지하에 지상 도시 규모에 버금가는 거대한 상하수로를 건설했고,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 시는 마차가 다니던 시청 앞 진창길에 100야드 너비의 도로를 닦았다.그 때 건설된 지하시설과 시청 앞 도로가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지도자에게 필요한 절대 요건이 선견지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역사(役事)가 없었다면 두 도시는 오늘날의 파리와 시카고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역
다시 겨울이다. 추위도 추위지만, 길마저 미끄럽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내릴 때만 복스럽고 분위기 있을 뿐, 일단 땅에 내린 뒤에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얼마 전에도 한 식당을 향해 가다가, 낮은 기온으로 길마저 꽁꽁 얼어붙어 많이 미끄러워져 있던 저녁, 마주오던 어르신 한분이 그만‘꽈당’하고 엉덩방아를 찧으심을 보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듯 했지만, 저렇게 이 겨울은 특히 노약자들이 조심해야 할 계절임이 느껴졌다. ‘어딜 나서는 것부터가 참부담 되는 계절이겠다.’싶어졌다.물론 그렇다고 다 그러는 건 아니다. 미끄러운 겨울길이라고 모두가 넘어지진 않는다. 넘어진다고 모두가 다치는 건 아니다. 넘어지지 않는 이도, 다치지 않는 이도 얼마든지 있다. 왜일까? 첫째, 민첩해서이다.아무래도 젊은이들은 동작이 민첩하여 중심을 잘 잡으므로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다. 혹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잘 넘어진다.둘째, 쿠션이 많아서이다.완충장치가 충분해서이다. 그래서 적당한 살도 필요하다. 아무래도 살(?)이 많으면 넘어져도 뼈까지 다칠 일은 덜 할 게다.셋째, 길을 잘 살펴서이다.어느 곳이 유난히 미끄러운지, 어디를 밟고 걸어야 하는지를 세심히 살펴 걷기 때문이다. 뛰지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로마가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비판하며 화체설에 입각한 교회의 미사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비판과 그 개혁은 미진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화체설을 비판하면서“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그 분이“실제로”임재(Real Presence)하시고 “육체적으로” 임재(Physical Presence)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쟝 깔뱅은“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영적으로”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루터나 깔뱅이나 모두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해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실제에 있어서는 로마가톨릭의 화체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예수님이 임재해 있는 떡과 포도주에는 하나님의 신비스럽고 마술적인 능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