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 저녁, 최우중 목사(보은구인)와 필자는 5박 6일 일정으로 필리핀 바기오에 소재한 헌드레즈타임즈아카데미중고등학교와 영어어학원연수원(이준성 선교사) 학생들에게 오카리나를 가르치기 위해 떠났다. 거의 4시간가량을 비행한 후 클락공항에 도착해 이준성 선교사와 조우했다. 1년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참으로 눈시울이 불거진다. 우리가 처음으로 교제했을때와 비교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초지일관 변함없는 거룩함과 경건의 영성으로 점철된 그를 만날 때마다 마치 사도 요한을 만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바기오에서 현지의 선교사역을 22년째하고 있는 이 선교사의 닉네임은 “요한 선교사”로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클락공항에서 바기오까지 약 3시간 30분의 거리를 중간 휴게소에 들려 한번 차를 마시고는 쉼없이 달려 이윽고 새벽시간에 목적지인 바기오 헌드레즈 아카데미 하우스에 짐을 풀고 장고의 여정을 달래기 위해 숙면을 취했다. 새날이 밝아오자마자 인자하고 상냥스러운 이준성 선교사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한정식으로 아침식사가 정갈하게 차려져 나왔다. 정말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어찌나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건강식으로의
우리 교회가 매입한 농지에 지하수를 세 곳이나 팠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업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올해는 그 교회 땅에 교인들이 함께 깻잎농사를 통한 수익사업을 하기로 해 모든 준비를 했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 지면이 말라버려서 교인들이 깻잎 어린 모를 심는 족족 말라서 비틀어집니다. 고민 하다가 우리 이장 교인 형제님의 트럭을 가지고 와서(저희는 차키를 서로 아무 때나 공유하는 교회입니다.) 800리터짜리 큰 물통을 싣고 바로 옆 교인 하우스에 가서 물을 받아 가져와서, 우리 농사짓는 밭으로 가져와서 일일이 물조리개로 주는, 다시 30~40년 전의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일이 10리터짜리 물조리개 두통으로 최소 80m 이상 되는 골을 수도 없이 다니며 일일이 물을 주어 거의 90%이상 살렸습니다. 뜨거운 태양에 생명의 싹이 죽어가는 것을 보니, 견디기 어려워, 8시간동안 점심밥도 못 먹고 시리얼로 대신하며 20kg을 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여러 번씩, 물을 줬더니 집에 들어와 스마트폰 어플에 제가 하루 종일 걸은 양을 보니 8.65km가 찍혔습니다. 그렇게 철야기도회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준비하며 교회당에 왔는데, 다리가
“당신들이 떠나간 후 우리에겐 더 큰 일들이 남았지요. 약 800 가정을 돕는 일, 거의 수천 명의 영혼을 돌보는 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맡기심에 감사하고 있어요!” 우리들이 단기선교한 필리핀 프라리델제일침례교회 마루자 청년이 서울교회 선교대원이었던 김정연 양에게 보낸 편지(이메일) 속의 내용이다. 또 오소리오 담임목사의 전화내용을 더해 간추려 본다. “우리는 한 달 동안의 양육계획을 짰어요. 첫 주에는 아는 사람 순으로 정리하고, 둘째 주에는 구원을 위해 새신자 교재를 사용하는 것, 셋째 주에는 반응의 평가를 살펴보고, 넷째 주에는 그들 결신자를 교회예배에 참석토록 초청하는 것으로 정했어요. … 우리는 각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임무와 큰 책임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두 힘써 일하고 있어요.” 지난 두 번의 집회 중 수백 명의 결신자들이 있었는데 양육관리를 안하면 다시는 옥외전도집회를 안할뿐더러 30여명 전도단원은 다른 도시나 나라로 갈 것이라고 경고한 후의 소식이었다. 집회 준비를 의논할 때나 집회 후 떠나올 때에도 새신자 양육(follow-up)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강도 높게 부탁했는데, 지금 오소리오 목사와 성도들은 선교집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위의 “이런 일”이란?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우상 숭배자들”과 “간음한 자들”과 “주를 시험한 자들”과 그리고 “원망하던 자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사건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깨우치게”란 단어는 개역개정 성경의 단어로서 그전의 성경의 단어와는 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 이전의 개역한글 성경에는 “경계”란 단어로 써져 있습니다. 그리고 NIV영어 성경에는 “WARNING”즉 “경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깨우치게”란 “깨어있어라, 정신을 차리라”는 말로,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딸 때는 따는 데만 몰입해서는 안 되고 감나무 가지가 약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경계”라는 말은 자동차 도로에서 차들이 오고, 갈 때 중간에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무시하고 차선을 넘어가게 되면 가히 상상하기조차도 힘든 무시무시한 사고를 당하
설교 구성 착안 사항 서론은 완성된 이야기로 제시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중간에서 단절됐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청중의 마음에 잃어버림에 대한 생각을 직면하도록 유도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본문에서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시금 발견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형성시켜 준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수사적 효과를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청중이 잃어버린 상태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기 원했다. 서론에서 중단됐던 이야기는 결론으로 이어져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공군이 잃어버렸던 조종사의 위치를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그 조종사를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그 조종사가 격추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그를 비난하면서 버려둘 수도 있었다. 당신은 공군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그들은 그 조종사를 찾으러 나섰다. 대여섯 대의 항공기와 수십 명의 해병대를 파견했고, 수백만 달러의 돈을 지불했다. 이 모든 것이 한 명의 격추된 조종사, 즉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사람을(작은 아들)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아오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지방사투리로 “무엇이 중헌디 쉬었다 가랑께” 졸음쉼터를 알리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졸려 눈을 비비면서도 조금 빨리 가려고 달려가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운전을 하는 동안 눈에 비춘 글귀가 한참을 머리에 맴돈다. “무엇이 중헌디?” 바쁘게 달려가는 걸음 속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 잊고 살아가지는 않았나 반문한다. 웃지 못할 이야기로, 초상집에서 한 참을 울다 “누가 죽었어요?” 물었다고 하듯이 무엇인가 정신 없이 달려가긴 하는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언젠가 제 아내가 주님께 기도 드리며 “열심히 했잖아요.” 투정 아닌 투정을 토로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 아내 마음속에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은 “무엇을 위해 열심했느냐? 반문하셨단다. 그리고 돌아보니 그냥 바쁘게 살아왔는데, 주님의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 앞에 대답 할 말이 없어 펑펑 눈물을 흘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일로 15년 넘게 목회자로, 사모로 열심히 목회 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열심만 부렸던 것은 아닌가 회상해
“목사님! 부교역자로 왜 안 불러줍니까?” “어느 교회에서 이미 사역하고 있다면서….” “그 교회 목사님과 뜻이 맞질 않아서 그만 뒀어요. 불러주면 바로 갈 수 있어요.” 전화를 준 사람은 한 때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했던 전도사였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경기도 어떤 지역에서 교회를 창립하고는 얼마동안 개척 교회 사역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두고는 다시 부교역자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둔 모양이었다. 그는 나의 개척 교회 목회 시절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면으로 도움을 줬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늦은 가을인데 오리털 점퍼를 한 벌 사갖고 왔었다. “목사님, 곧 겨울이 올 텐데 새벽 기도할 때마다 춥지 않도록 입으세요.” “집사님, 무슨 돈으로 이 귀한 선물을 샀어요?” “삼일 동안 노가다해서 그 품삯으로 샀어요. 이 옷 입고 기도많이 해주세요.” 그는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많았는데 막노동을 해서 옷을 사온 것이었다. 사무엘하 23장에 보면 전쟁을 하려고 이스라엘 군대는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는 베들레헴 요새에 진치고 있을 때였다. 다윗이 목이 말랐는지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
현대인들은 직장이나 사회가 짜놓은 스케줄에 의해 무척 바쁘게 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나 혼자 빠질 수도 없고 남들은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경쟁하며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하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해봄으로 몸도 마음도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옛날에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질문 하면 흔히 하는 말이 독서나 음악 감상 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취미도 다양하다. 취미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직장인이나 개인 사업자나 학생이나 가정주부나 사람들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병이 된다고 하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취미생활이 좋다.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고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재밌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에게 잘 맞는 취미를 찾으면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의욕이 생기고 재미에 빠져들게 되며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그 것을 하는 동안은
“자기가 만든 대로 자신이 돌려받는다” 인과보응으로 “죄(罪)는 지은대로 공(功)은 쌓은 대로 돌아온다“는 속담이다. 한국의 항공우주산업의 고온 플라즈마 연구로 아리랑 1호를 띄운 일이 있거니와 강대국들은 우주쟁취의 경쟁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국 천문연구원 우주위험 감시센터는 1976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지구궤도로 쏘아 올린 위성 7900여 개중 현재까지 운용중인 위성은 1900개로 나머지 5000개는 퇴락하거나 파괴되어 궤도를 돌고 있어 인공위성 파편 우주쓰레기가 포화상태로 치닫고 있다고 했다. 유럽 우주국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으로 지름 1mm에서 1cm의 우주 쓰레기는 총 1억 6600개에 이르고 지름 1~10cm의 것은 75만개며 또한 10cm 초과는 2만 9000개라 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관리를 위임한 아름다운 우주와 지구에 이들 우주 파편 곧 인공위성 파편은 평균 시속 2만 8000km로 초속 7.8km로 날아간다. 최근 10년간 대기권에 재진입 과정에서 전소되지 않고 지구 표면에 떨어진 1톤 이상의 인공 우주물체는 연평균 420여개로 모두 합쳐 약 100톤에 이르고, 최근 50여 연간은 약 5400톤이 지구 표면에 떨어진 것
지금 무속 종교에도 무녀들이 단골로 읊조리는 주문이 있다. 그렇거늘 소위 문화 종교인 자기 종교의 경전을 잠시라도 뒤로 하고 경전외적 말들을 늘어는 것은 가관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가롭기 그지없는 노목사의 부질없는 한담이라 할지도 모른다. 동네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광고지 인쇄물 서두에 불교의 어떤 중의 글이 실렸기에 읽고 있었다. 짧은 글에 인도의 타고르 시인과 자기 종교의 명승 성철의 이야기를 주로 실었다.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의 어느 한 소절을 인용할 수도 있었지만 깜깜소식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스스로 우습긴 마찬가지다 성경에 이런 말도 있지 않나.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26:27) 중이 타고르와 제자의 대화를 실은 것이 그들 종교의 교리일까? 하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으니까 실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자기 종교경전에서 가르칠게 없으면 곁눈질하기도 한다. 타고르에게 여러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인생의 승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이 때 다른 제자가 또
생명이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일은 무조건 옳다. 얼마 전 대학생 딸이 유기견 센터에서 죽기 직전의 작은 개 한 마리를 데려와서 집에서 키우게 됐다. 보호소에 갇힌 개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도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안락사를 시킨다고 한다. 처음에 이 외모 멀쩡하고 귀여운 개가 왜 버림을 받았을까 궁금했는데, 한 가지 혹시나 하고 짐작해 보는 대목은 있다. 전 주인이 베풀어준 정관 수술이 잘못됐는지, 이 개는 반가움을 표현할 때마다 오줌을 싼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거실에서 풀어놓고 키우려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묶어 놓되 가끔씩 산책을 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죽음 직전에 살려준 것을 안다는 것인지, 볼 때마다 반갑다고 오줌을 싸고,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하고, 가끔씩은 당당하게 짖어댄다. 이 개를 보면서 생명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구출당하지 않았다면 벌써 생명이 끊어졌을 운명. 마찬가지로 캠퍼스의 수많은 청춘들이 아파하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된 영혼들이 방황하고 신음한다. 한 때는 하나같이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이겨 영광스런 합격의 감격을 누렸으나,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를 잃은 청춘들이다. 매주
지난 며칠은 조금 일찍 출근한 탓에 목양실로 향하기 전, 먼저 대예배실에 앉아 좀 오래 머물렀다. 물론 나 외엔 아무도 없을 시간. 조명도 없고, 찬양대도 없고, 반주도 없고,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도 없는, 적당히 어둑하고 심하게 고요한 그 큰 대예배실에 홀로 앉으니 새삼 느끼는 그 경건함에 마음이 푸근하다. 어쩌면 목사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익숙한 장소, 늘 설교하고 예배 인도하는 곳이건만 왠지 지난주는 참 다른 느낌이었다. 두 곳의 성전을 번갈아보아도 그랬다. 일단 그 분위기에 압도되니 찬양 한곡부터가 입에서 흐른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서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그 흥얼거림을 따라 묵상과 읊조림을 반복하니 나중엔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란 후렴구만 남아 끝까지 반복된다. 마치 이사야가 보았던 성전의 영광도 이랬을까 싶었을 정도….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하나님이 날 이곳에 이 아침에 앉히셨을까? 늘 앞에서만 성도를 바라보던 시선이 아닌, 앉아서 강단을 바라보게 하셨을까?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우선 며칠 전 한 집사님과의 대화부터 떠올랐다. 오후 내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III. 복음서 설교 실제 1. 본문 선택 일반적으로 성서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설교할 때와 같이 복음서의 설교를 위한 본문은 ‘pericope’를 기준으로 설정돼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주어진 콘텍스트를 고려해 해석돼야 하지만 때때로 복음서의 내용은 중심 구절들을 중점으로 설정될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떤 특정 사건이나 장면을 묘사하는 이야기(narrative)는 몇 개의 페리코피에 걸쳐 본문이 설정될 필요가 있으며 비록 본문은 핵심절들로 선택이 됐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체를 고려해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설교에서 본문 선정은 단일 페리코피를 고집하거나 본문의 범위가 길고 짧은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그 본문이 하나의 설교를 위한 한 단위로서(unit) 동일한 콘텍스트 안에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아가 본문의 콘텍스트의 일관성이 요청되기 때문에 본문을 정함에 있어 다른 복음서의 페리코피나 병행구절들을 결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페리코피를 다른 문학적 상황이나 역사적 콘텍스트와 혼합시킴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상 칠언”을 중심으로 성금요일(Good Frida
어떤 정치인은 가치 지향적이고 도덕 군자형이라고 한 때 평가받았다고 한다. 그는 정의, 공정, 신뢰, 인권 존중이란 브랜드를 내세우며 차기 대권 주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각계에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정무 비서인 여성을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가 내세웠던 브랜드는 그의 의해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온 천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빈사의 사자상’을 본 적이 있다.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서 완성된 조각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길이가 10m이고 높이가 6m에 달하는 대형 조각이지만 사자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어깨에 부러진 창이 꽂힌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 당시 스위스인들에겐 알프스 산맥에서의 관광업 외에 용병이 되어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자기들을 고용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요한은 로고스의 신적인 존재성에 대한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 있어서 로고스의 주체적인 참여를 묘사한다. 요한은 나아가 성육신하신 로고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현장에서 감당한 구체적인 사역을 이 어두움의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의 계시 사역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이제 그 참된 빛의 사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말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언급될 로고스의 성육신과 세상에서의 활동을 가리킨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의 참된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에게 적절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보다’라는 동사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사건이나 사물에 관한 사람의 인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것은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에 관하여 아는 것 곧 그들 사이의 관계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아들의